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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

오늘(5월 22일 일요일) 막을 내린 권진규 100주년전.

일단 대단히 훌륭한 전시였고,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줘야 하지만, 누군가 어떤 말을 굳이 반복해서 한다면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권진규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젊은 시절 일본 가서 조각 배우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전시 초반에 써 있는데, 실제로 걸어온 행보는 그와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 모두 그렇다.

그의 예수상은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멀쩡히 교회에서 돈 받고 의뢰 받아서 만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권진규는 그 예수의 머리의 후광을 굳이, 굳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들었다.

수레바퀴란 종교에서 어떤 상징인가? 불교의 상징이다. 불교의 法이요, 윤회의 輪이다. 예수 머리의 halo를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령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전국의 여러 성당들은 앞다투어 '상투 틀고 있는 예수'라던가, '색동저고리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성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Roman Catholic'과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천주교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런 유형의 성상을 주문 제작할 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권진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아서 작업을 할 때도 아주 대놓고 자신의 의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곤조를 밀어붙였다.


나무로 만든 불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커미션 받은 작품이 아니지만, 종교의 내적 논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가주의적 의지가 강하게 개입해 있다. 미륵의 관을 썼지만 옷깃과 수인, 결가부좌는 부처의 그것이다. 종교의 문법을 알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권진규의 예술가적 목표가 뭔지, 얼마나 잘 추구하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써두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기술자/장인/등등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진정 간도 쓸개도 빼놓고 시키는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에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2-03-26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정신이 물질을 이기지 못할 때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슬픈 전시다. 푸틴이 전쟁을 시작한 후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전시를 앞당겨 종료하네 마네 하는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내부 맥락만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서글퍼지는 전시다. 물질적 영역, 다시 말해 현실에서의 공허와 빈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하던 이들의 발버둥은, 결국 초라한 물질적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 유명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보자. 도판이나 화면상의 이미지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을 보면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보존 상태가 너무 나쁘기도 하고, 이전에 '물질'적 측면에서 너무 작품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미술 작품은 실물을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화가 그렇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그 역사적 의의나 화면상의 이미지에 익숙한 채로 들어가 실물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감, 캔버스, 기타 여러 측면에서, 작품을 통해 '초라함'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질적 에너지와 풍요의 과잉이 낳은 정신주의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가 빈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하지만 본인은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택하고 있다고 자기 기만을 거듭하는, 그런 정신주의랄까.

우리 현대 한국인, 특히 20세기 출생자들은 그 변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변방인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달성하고자 할 때, 변방적 특질과 줄타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최근 1960-1970년대생들이 '눈떠보니 선진국 이얏호' 꼴값을 떠는 게 우려스러웠으나,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자이며, 정권을 뺏겼으니 이제 그들은 다시 헬조선 타령을 할 것이다. 이런 정치 과몰입 또한 변방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인간들이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학과 마찬가지인, 그런 맥락을 놓고 보면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러시아'에 방점을 찍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법칙 중 가장 슬픈 법칙인 '원판 불변의 법칙'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왜 사회주의라는 서구 사상의 뉘앙스 대신 뭔가 토속적이고 구린 느낌 일색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1부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을 보던 나는 왠지 그 뿌리가 결국은 러시아적 향토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걸 떨쳐내고 좀 어케어케 해보려던 머리 좋고 예민한 자들은 소련이 된 러시아에서 살지 못해 망명하거나(칸딘스키), 소련에서 두 번이나 간첩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일찍 죽었다(말레비치).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은 따로 있다. 알렉산드르 티실레르가 그린 <장애인들의 시위>다. 야만적인 나라에 사는 이가 그 야만성을 직시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물론 어제 오늘 내가 경험한 어떤 맥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언제 휙 돌아가버릴지 모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입장료 2만원, 전시기간중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