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1

우리에게 진중권은 무엇인가

1.

이명박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진중권은 프레시안에 연일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기존에 진중권을 마땅찮게 생각하던 이들도, 그가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은 즐겁다고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역시 진중권은 개 팰 때 최고야!' 같은 찬사가 줄을 잇는다. 극우파와 싸우는 것이 진중권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식의 평가가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진중권이라는, 한국 사회가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의 위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진중권에 대한 은근한 폄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진중권이 하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딘가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나쁘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령 허지웅은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디 워> 광풍 당시 언론은 이를 영화의 질적 수준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으로 몰아갔고, 궁극적으로 평론가 대 관객이라는, 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발끈하기 딱 좋은 마술적 대결구도를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입 바른 말 했다가 고생한 진중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하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다.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정색하고 논하는 건 일종의 넌센스에 가깝다. 이 논쟁은 현상으로 접근해야 의미가 있다.
허지웅,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http://ozzyz.egloos.com/3611252

여기서 허지웅이 가지고 있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둘째, 바로 그러한 일을 하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어려운 단어를 끄집어내 대중들의 심기를 거스른 진중권의 행동은 잘못되었다. 이 각각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가 한국 사회에 어떤 의의를 지니는 존재인지에 대해 좀 더 명료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이 넌센스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것은 영화평론가로서의 직업적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소리이다. 물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가 대단히 형편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알고 있음'은 그저 그렇거니 하고 짐작하는 정도의 앎일 뿐이지, 왜 그 영화가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이 특히 어떻게 잘못 만들어져 있는지를 다른 이에게 설명하고 그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앎'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석판!'이라고 외침으로써 조수가 석판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오도록 할 수 있음을 뜻하지, 언어의 사용을 둘러싼 현상에 접근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비평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디 워'가 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나쁜 작품인지에 대해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을만한 분석력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 평론가의 1차적인 의무 아닌가? 비평가가 자신이 다루는 작품에 대해,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는 사실상 극장을 드나드는 수많은 대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감상을 과장된 수사로 포장하여 진열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문체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을 비평이게 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해석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평론가는 자신의 존재론적 위의를 상실하게 된다.

진중권이 '디 워' 사태에서 유일무이한 '비평가' 였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디 워'라는 말도 안 되는 영화 앞에서 수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입을 다물거나 버벅거리고 있을 때, 진중권은 브라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각오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던 서사적 결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내는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사람 답게, 그는 자신이 아는 고전적인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디 워'라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함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것은 허지웅이 말하는 것처럼 '디 워'를 "현상으로 접근"하려 했던 여타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한 미덕이다.

비평에 있어서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그것에 "현상으로 접근" 하는 것은 결국 대상 그 자체를 비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에는 사이언스에 게재된 황우석의 논문이 있었고, '디 워' 사태의 핵심에는 쇼박스의 극장에 내걸린 심형래의 영화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때에는 진중권 본인을 포함하여, 그 광기에 "현상으로 접근"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정작 그 파문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집요한 탐구와 과학적 검증을 통해 황우석의 논문 그 자체가 날조된 것임을 밝혀낸 MBC PD수첩의 황학수 PD였다. '디 워' 파동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어쩌고 광기가 어쩌고 떠드는 이들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디빠'들의 파동을 잠재우고 '디까'들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중간계의 균형을 50대 50 정도로 바로잡은 이는 '디 워'가 2000년 전부터 구리다고 정평이 났던 극작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산물임을 폭로한 진중권이다. 그가 작품 자체에 대한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다면, 허지웅 같은 희생자가 아무리 대중의 광기 앞에서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들 '디 워' 사태는 곱게 마무리되었을 리 만무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표현이 공중파에 등장한 것은, 허지웅을 포함하여 진중권의 계몽주의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이들이 불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앞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 마법의 여덟 글자는 '디 워'의 서사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수세에 몰려 있던 디까들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대중들이 어려운 말이라면 무턱대고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대중들은 어려우면서도 자신들이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싫어한다. 그 용어를 사용하는 '지식 계층'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맥락에서 차분한 설명과 함께 그것을 풀어준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선선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바로 그렇다. '디 워'라는 모범적인 텍스트와 함께 그 말을 듣고 보니, 한 방에 쉽게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생각보다 그리 심하게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계몽을 해줄 수 있는 비평가가 진중권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보론: '디 워' 사태에서 진중권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게 아니다. 그는 '디 워'의 CG를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고 평가함으로써, 디빠들이 딛고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영토를 승인하는 전략적인 패착을 범하였다. 물론 개별적인 오브젝트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 화면 안에 합성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프레임 안의 피사체가 지녀야 할 질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거기서 동원된 CG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데 복무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CG는 아무리 따로 떼어놓고 볼 때 그럴싸하다 한들 좋은 CG가 아니다. 하지만 진중권은 고사하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비평하는 이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큰 목소리로, 전문가적인 식견과 함께 제시한 이가 과연 있던가?)


2.

이러한 논의를 통해 나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는 '디 워' 같은 개 쓰레기 영화도 찬찬히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비평적 언어로 해설하려 했다. 진중권은 한국 비평계에 횡횡하던 가짜 규칙을 허물어뜨리고 진짜 논쟁을 시작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 속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응시의 끈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비평가인 것이다. 문제는 진중권이 지닌 그러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이명박 싫어하는 게 자랑이지만 사실 그 지지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진중권을 오직 '극우파 까는 호두까기 인형' 정도로 치부하려 든다. 그런 식으로 진중권을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평론 혐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중권이 지닌 가치는 그가 쓰는 칼럼이 아닌, 앞서 길게 논한 비평가로서의 자세와 더불어, 그 칼럼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이론적 틀에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몇 편의 글을 통해 넌지시 언급한 후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구술문화'로, 서구의 분위기를 '문자문화'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식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논거로 댈 게 따로 있지, 무슨 구닥다리 월터 옹 이야기를 꺼내냐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한 논의 구조는 지나치게 편리한 의제 설정이라는 식의 비판이 두 번째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요컨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진중권의 문제 제기는 비평계에서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한윤형이 "지존키워 진중권의 전투일지"에서 연대기순으로 정리해놓은 바와 같이, 진중권은 한국의 인터넷 토론의 역사 그 자체라고 불리워도 무방한 인물이다. 레닌을 빼놓고 러시아 혁명을 논할 수 없듯, 진중권을 빼놓고 인터넷 말싸움을 논할 수도 없다. 그런 그가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여느 사람들이 내놓던 것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면, 우리는 한 번쯤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가 당시 골 족의 풍속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원조 진빠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진중권은 실제로 《갈리아 전기》의 문체와 형식을 모방하여 '조독마 원정기'를 쓸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보자. 가령 이글루스 블로거 찬별은 "영어 교육 잡상"이라는 포스트에서 이오공감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이글루스의 반대의견의 상당수는, 같은 사람이 하나의 글 안에서
1) 영어 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했다가,
2) 영어 공교육의 필요성은 있지만 방법이 틀렸다고 헀다가,
3) 박명이와 인수위는 애초부터 하나같이 ㅄ들이라고 했다가,
기타 등등 상호 모순적 주장을 이것저것 말하는데,
그런 글에 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모두들 행간만 읽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글 내용이 아닌 <이미지> 만을 읽기 때문이다. -_-

찬별, "영어 교육 잡상", 찬별은 초식동물, http://coldstar.egloos.com/3598330, 2008년 1월 30일

글의 내용이 아닌 이미지만을 읽는다는 말은, 진중권이 인터넷 토론을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내 편 많은 놈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평가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립할 수 있는 관찰이다. 찬별의 관찰과 진중권의 관찰이 지니는 공통점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포괄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인터넷을 포함한 한국의 문화를 '구술문화'로 보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의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진중권의 구술문화 논의에는 큰 약점이 존재한다. 개항 이후 100년이 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시대의 문자 문화가 한국에 계승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지금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 왜 문자문화가 이리도 희박한지, 혹은 왜 아직까지도 구술문화가 판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이 내놓는 대답은 '이게 다 박정희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논의에 대한 실망감만을 야기시킬 뿐이다. 설령 그것이 답이라고 해도, 그 책에서 제시된 논증 과정은 너무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중권이 쏟아내는 칼럼에서 얼마나 이명박을 '시원하게' 까느냐에만 관심이 있지, 그가 어떤 이론적 바탕 하에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명박을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한국이 구술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사회라는 문제의식에는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 혹은 텍스트를 소비하는 대중들은 진중권을 그저 '극우파 잡는 광대'로만 치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 광대야말로 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유일한 증인일지도 모르는데.


3.

진중권이 지닌, 비평가로서의 성실한 자세는 대중이 아닌 날로 먹는 '칼럼니스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디 워'에 대한 값싼 감상을 그대로 내놓기가 면구스러웠던지 자기 자식들을 방패막이 삼고 덤벼들었던 김규항이 그렇고, 분명 본인은 '선빵'을 맞았는데도 자기 대신 대중들과 싸워주는 진중권에게 투덜거리는 허지웅이 그렇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들은 평론가의 의견과 함께 제시되는 전문적인 지식을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평론혐오시대"가 도래한 것은 대중들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가 아니라, 평론가들이 대중들이 납득할만한 지적인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평론들을 보면 하나같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론가의 지식과 식견은 온데간데없고, 네티즌들이 리플로 찍 하고 달아놓으면 그만일법한 감상을 거창한 수사로 처발라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용도로 지젝이니 라캉이니 주디스 버틀러니 등등이 남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인문학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진중권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보라. 그는 '디 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두 번이나) 보았고, 그 속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초보적인 미학 이론의 결여를 발견해내어, 그것을 대중에게 가르쳤다. 진중권이 오직 비난만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소녀시대는 벤야민이 말한 대량복제의 산물이고, 반면 원더걸스는 좀 더 전통적인 아이돌에 가깝기 때문에, 나는 그래도 소녀시대가 좀 더 좋다고 적혀있던 '위(僞) 진중권'의 인터뷰를 떠올려보자. 그러한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중권이 가진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대중들이 시인하고 있음을 방증한다(반면 허지웅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원더걸스에 대한 애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더걸스 팬들은 '허지웅도 좋아하는 원더걸스'라는 식으로 소녀시대 팬들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이 겪어낸 인터넷과, 그것을 포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을 이론적으로 종합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그의 논의를 곱씹으며, 나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였고 그것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대한민국에 극히 드물게 존재하는 '진짜 비평가' 진중권의 텍스트를 곰곰히 되짚어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지식인들을 그저 소비만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다.

일전에 만난 KBS의 안주식 PD는, 향후 5년간 진중권이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우리 사회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진중권이 이명박 정권의 안기부에 끌려가 주리를 틀리고 고문을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프레시안에 올라오는 칼럼들이 보여주는 거친 호흡과 완성되지 못하는 문장 등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앞선다. 자신이 글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만 그저 약간의 대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밥벌이하고 사는 청맹과니들, 그리고 그들에게 호응하면서 그저 글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대중들이 결합하여, 진중권과 같은 진정한 비평가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열린우리당, 아니 통합민주당은 총선을 의식한 나머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의 뜻을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결국 한반도 대운하는, 완성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착공은 될 것이고, 남한강과 낙동강의 상류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나갈 것이다. 혀뿌리를 자른 채 콩글리쉬를 더듬거리는 지진아들이 인터넷에서 저글링처럼 뛰어다닐 때, 대상을 비평하는 대신 그저 "현상 차원"에서 논의하는 '글쟁이'들은 서로 못난 글에 추천의 리플을 달고 있을 터이다. 세상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중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그 괴이함에 어쩌면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시대는 더욱 우울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꼭지는 돈다.

2008-02-28

블로그와 인터넷 언론의 가능성

물론 한국적 상황에서 '블로고스피어는 언론의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아우성이 기존 저널리즘을 전부 대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청맹과니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로그라는 형식과 그것을 통한 기사 생산이 기존 언론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사실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미국의 경우, 다수의 언론사가 블로그 형식을 활용하여 독특한 컨텐츠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있고, 또 몇몇 유명 블로그는 기존 저널리즘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던 영역의 컨텐츠를 생산하며 뉴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가령 내가 매일 들어가보는 폴 크루그먼의 블로그는, TimeSelect를 무료화함과 동시에 뉴욕타임즈에서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일괄적으로 블로그를 제공한 경우에 속한다. 폴 크루그먼은 그 블로그를, 자신이 쓴 칼럼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칼럼에 사용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물론 부시와 오바마를 씹는 용도로도 매우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미국 빈곤층에 대한 그의 칼럼인 Poverty Is Poison을 본 후, 거기서 언급된 통계 자료를 직접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의 쏠쏠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뉴욕타임즈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블로그를 제공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기존 미디어에서도 인정받는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Lifehacker.com을 꼽는다. 라이프해커는 지나 스테파니가 만든 블로그인데, 특히 컴퓨터와 관련하여 일상 생활과 업무에 도움이 되는, 다소 geeky한 프로그램이나 해킹 방법 등을 매일 스무개 남짓 정리해서 올리는 사이트이다. 라이프해커에 들락거리고 있으면 미국인들이 얼마나 '생산성'에 환장하는지, 인간의 행동과 생산성을 기계처럼 묘사하는 일에 얼마나 친숙한지, 뭐 이런 것마저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언론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사이트가 미국에는 없지 않다. 비록 지금은 IT 분야에 주로 한정되고 있지만,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올블로그나 다음 블로거 뉴스와 같은 '블로고스피어'가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확실하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캐내는 대신, 기존에 밝혀진 사실에 대한 블로거들의 의견을 집산하는 역할만을 겨우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곳에서 메인 화면에 편집되고 덩달아 조회수를 높이려는 블로거들이 넘쳐나는 만큼,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사실이 아닌 의견만이 넘실거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블로거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고, 또한 그 차원에서의 '블로그'는 언론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형식이 결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웹에 게시물을 시계열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블로그의 가장 원초적인 개념 정의라고 할 때, 그러한 형태는 개인이나 작은 규모의 집단이 매체 혹은 유사 매체를 꾸리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도 하다. 태터툴즈에 기반하여 하루 2만명 정도의 조회수를 올리고 있는 익스트림무비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강유원 홈페이지의 부속물인 그의 서평란 또한, 일종의 서평 매체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다. 블로그라는 형식이 개발되기 전,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들이 다들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을 당시에는 이런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듀나처럼 매일 웹페이지를 손으로 뜯어고쳐가며 업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블로그가 제공하는 RSS 기능이 없으니 방문자가 매번 찾아오게 만들지 않는 한 조회수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정보가 시계열적으로 1열 정렬된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언론과 네티즌들의 지나친 설레발이 불러일으키는 반감을 꾹 누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블로그는 개인이 소규모의 언론 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웹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으로 기능하는 블로그가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그 이유를 블로그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맥락을 놓고 볼 때 라이프해커나 kk.org/cooltools 따위는 전부 블로그가 아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식의 마케팅을 타고 블로그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네티즌들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번에 얼핏 언급하였지만, 오늘은 서평을 쓰고 내일은 영화평을 쓴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잠수를 하다가 자신의 일상 잡사를 늘어놓거나 생활 속의 사소한 '깨달음'을 마치 엄청난 발견이라도 되는 양 떠벌이는 그런 공간이 우리가 아는 '블로그'가 아닌가.

블로그는 언론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 언론의 대안적인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인적 요건이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리플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모든 리플이 자기 블로그 하나에 집중되기를 바라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만큼은 내 글을 이 사이트에 몰아 넣어야지 같은 생각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 평론을 쓰고 싶다면 영화 평론만을 올리는 블로그를 개설하는 편이 낫고, 서평을 꾸준히 쓰고 싶다면 알라딘 서재를 활용하는 편이 제일 낫다. 하지만 그러면 조회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를 파악한 알라딘에서는 태터툴즈와 이글루스 등의 블로그에서 직접 서평을 작성하고 알라딘에 링크를 걸 수 있도록 하는 플러그인을 제공함으로써 네티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한국 네티즌들의 관심사는 언론 형성이 아니라 리플 섭취인 것이다.

알라딘 서재가 흐지부지 망해버린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추적 가능하다. 알라딘 서재는 서평이나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올리기에 최적화되어 있고, 반대로 일반 블로그로서의 기능은 상당히 미흡한 편이다. 그래서 그 곳에 터를 잡은 최초의 '알라디너'들은, 서평도 올리고 자기 개인사도 올리고 하다가, 그게 뭔가 영 어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금슬금 다른 블로그 환경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아까도 말했듯이 한국 네티즌들이 절대 두 개 이상의 블로그를 유지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알라딘 서재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태터와 이글루스 등에 플러그인을 제공하며 중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블로그를 통한 언론 형성이 난망한 이유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문제에 좀 더 가깝다. 타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 또한, 그곳에서 정련된 정보와 세심한 고찰을 읽으면서, 동시에 '주인장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느끼고 싶어하고 그런 것이 없으면 낯설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사실과 의견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핵심이지만, 그 이전에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의견은 의견대로 명확하게 분리가 되는 것이 논리적 선행 요건이다. 이렇게까지 실컷 씹어놓고 보니 나름대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블로그의 이름이 머리에 스쳐지나가지만, 그것들이 온전하게 수용되어 그 블로그의 저자들이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할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인터넷 언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네티즌 자신들이다. 블로그 사용자의 노출증과 자기 중심성이 극복되고,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목적성을 확고하게 갖추지 못하는 한, 인터넷에서 생산되는 글이 기존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일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2008-02-27

취향 테스트 결과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보고 나도 한 번 해봤다. 일단 결과는...












창의적, 예술적인 아방가르드 취향


당신은 여기 분류된 8개 취향 가운데 가장 예술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전위적'이라는 단어가 당신에겐 어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경험이나 교육이 아닌, 선천적으로 예술적 오감을 타고 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선천적인 예술 에너지는 당신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소비자로 만들어 줍니다. 

자신감과 솔직함은 당신 취향에 중요한 기준입니다. 대중을 의식하면서 쓴 시,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그린 그림, 카메라 의식하며 하는 연기, 겉멋든 음악... 이런 것들은 경멸의 대상입니다. 서툴고 즉흥적이라도 자신만의 진실함이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이런 취향은 전세계 모든 평론가들이 공유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비록 '평론'을 쓰기엔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최소한 당신은, 전문 평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우수한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고흐는 평생 참으로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모델을 살 돈이 없던 그는 평생 거울 속의 자신을 모델로 삼았죠.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았던,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이 바라보던 자화상.
당신의 취향은 이 자화상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것
당신은 어쩌면 괴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당신 취향은 지금까지 주류에 속한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속적인 대중을 떠나 고답적인 예술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당신은 영락없는 메인스트림입니다. 당신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것들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일탈적인 것들이 진실되길 바랍니다. 다음 시에는 바로 그런 진실이 있습니다.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괘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저주하는 것
당신은 (아마도) 훈계하거나 훈계받는걸 제일 싫어할 겁니다. 규율, 법, 질서, 사회 정화, 국민 정서 어쩌고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취향을 제한하고 옭아 매려는 검열주의자, 엄숙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작품과 인생을 함부로 가치 판단하고 평가하고 거기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으려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낄 겁니다.



인용된 황지우의 시가 마음에 든다. 아무튼, 다른 결과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 저것 다 찍어봤는데,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가령 키치 예술 취향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딱 어울린다고 하거나, 하이퍼리얼리즘을 "심오하고 추상적인 미술 작품"의 대척점에 놓이는 조류로 언급한다거나,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절제력에 의해 품격을 갖춘 시"라고 평하는 것 등이 전부 그렇다. 이 테스트를 만든 사람들의 취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이런 식이니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아방'하지 않다.

2008-02-22

타자의 언어와 한글의 덫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륀지' 발언이 이후 온 인터넷이 시끌시끌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한글 표기법을 이렇게 저렇게 뜯어 고치겠노라는 설레발이 판치는 것은, 정착 단계에 접어든지 고작 5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언어'인 한국어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숙명(여대 전 총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 표기를 뜯어고쳐서 '조국 근대화'에 일조하겠다는 발상의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일제의 강점 당시 서구의 학문 체계를 흡수한 지식인들이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는 제1의 대상은 당연히 한국어였다. 한국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한국어로 문학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기본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충남의 천재 홍명희는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아들 홍기문은 국어 연구를 하다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해낸다. 이것은 비단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의 유입을 겪는 사회의 지식인은 그 충격을 자국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선 흡수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독일 시절부터 스와힐리어 복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한글 표기법을 영어 발음에 맞게 뜯어고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으며,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반론들이 덜컹덜컹 생산되었다. 그 내용들은 대체로 '외국어와 외래어는 다르다' 내지는, '오륀지라고 써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다' 정도로 형성되었고, 급기야는 '영어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국가 경쟁력과 무관하다'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영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외국어와 자국어 사이의 갈등에 대한 문화적 고찰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 내용들은 대체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는 무관하게 원래 옳은 내용이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위해 한글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되지도 못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경숙은 과연 '오륀지'를 발음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수 있다. 이경숙이 발음한 그것을 '오륀지'라고 표기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표기를 통해 이경숙이 한 발음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의의 90% 이상이 그 영상을 직접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선 밑에 링크된 참고 영상을 보고 이후의 내용을 전개하도록 해보자.

"혼선의 주역?", MBC 뉴스투데이, 2008. 02. 01

나는 이경숙이 '오륀지'를 발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경숙이 발음한 것은 [ˈorӕndʒ]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전에 orange의 발음이 [ˈorindʒ]로 표기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경숙의 발음은 표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무튼 발화하는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면, 모음의 변화가 아닌 강세의 부여가 영어 화자의 발음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오린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어퍼스트로피에 유의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경숙이 말하는 발음의 문제는 우리가 orange라는 단어를 읽을 때 각각의 모음을 어떤 음가로 소화하느냐가 아니라, 첫 번째 음절에 강세를 찍느냐 찍지 않느냐에 따라서 갈라지는 언어적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가 한글 표기가 아닌 영어 발음에서의 강세에 대한 인식과 적응이라는 것을, 심지어는 그 말을 하는 이경숙 본인도 철저하게 몰랐다는 데 있다.

오랜지를 '오린지' 혹은 '오륀지'로 써놓는다고 해서 이경숙이 말하는 바 '미국인이 알아듣는 발음'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뉴스 영상 38초에서 40초 사이에 기자가 그 표기를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서 즉각 폭로된다. [ˈorindʒ]와 '오린지'의 간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모음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 주둥이를 어떻게 옴쭉거리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다. 언어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에는 강세가 있다. 그것은 영어 화자들이 단어의 정확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이경숙이 [ˈorindʒ]를 '어랭재'로 읽었다 하더라도, 첫 음절에 강세만 정확히 찍혀 있었다면, 눈 앞에 오랜지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음 [r], [n], [dʒ]과 모음 [o], [i]의 발음이 완벽하다 해도 강세가 없다면 영어 화자가 그 단어를 이해하는데에는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한국인이 하는 영어 발음'에 숙달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신문과 방송에서는 '오린지'가 판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이경숙 본인부터가 자신이 무슨 발음을 했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차원으로까지 한글 표기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되지도 않을 것을 다짜고짜 '오랜지라고 써 있으면 외국인이 못 알아듣는다'라고 넘겨버린 탓이 크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의 음성적인 차원과 문자적인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 발언을, 정말 곧이곧대로 '한글 표기법을 바꾸자'라는 내용으로 보도해버린 언론의 편의주의가 이 논의의 혼탁함에 한 몫을 더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이경숙 위원장이 자신의 그 애틋한 사연을 말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음한 내용이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한글로는 표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수위원장은 영어 발음에 맞도록 한글 표기를 고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곧이곧대로 이해한 다음, 영어 사전에서 [ˈorindʒ]를 찾아보고는 그것을 '오린지'라고 적었다. 말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에게도 교양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ˈorӕndʒ]는 '오린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디에도 [ˈorindʒ]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경향과 맞닥뜨릴 수 있다. [ˈorindʒ]를 발음하기 위해 '오랜지'라는 외래어 표기를 뜯어고치자는 이경숙이나, 그걸 또 사전 뒤져서 '오린지'라고 적어놓는 언론이나, 모두 영어를 한국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로서 영어가 갖는 기본적인 성격, 즉 한글로는 절대 표기할 수 없는 강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것은 양자가 똑같다. 언론에서 써 놓은 신문 기사만 읽고 설레발치며 세월을 보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이경숙의 '오린지' 사건의 본질은, 우리가 영어를 한국어와 완전히 별개의 것인 외국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 공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불어를 처음 가르칠 때 교사들이 악상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과 달리, 영어 교육 현장에서는 [θ], [ð], [r] 처럼 개별적인 음소의 발음을 다듬는 것에만 집중한다. 정작 중요한 개별 단어의 강세 표시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어 사이의 연음, 즉 혀 굴리기를 연습하느라 혀 뿌리의 근육을 자르는데, 단어의 강세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연음을 굴리는 것은 앉은뱅이가 달려가겠다고 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미련한 짓이다.

특히 영어에 환장하는 한국어 화자들은, 영어가 타자의 언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구성하는 방식은, 자음과 모음의 발음부터 단어마다 찍히는 강세,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에 대한 '정확한 한글 표기법'이라는 성배를 찾아 헤맨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대신, 그들은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표시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숭고한 대상(이 표현 쓰는데 재미 들렸다)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도중에 영어 단어를 정확한 발음과 함께 섞어서 쓴다면, 그것은 한국어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애초에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단어를 섞어 쓸 때마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강세, 장-단 모음의 구분 등을 무시하고, 그것은 결국 그 단어를 한국어의 일종이 되게끔 한다.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 단어를 섞는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와중에 한국어 단어 한 두 개를 매끄럽게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체계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할 수 있었던, 바꿔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훨씬 영어를 잘 배웠고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의사로 잘 먹고 잘 산 서재필, 미국인들에게 하도 전화질을 해서 부아를 돋굴 정도였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영어로 일기를 쓰다 한국말로 쓰다 한자로 쓰다 할 수 있었던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 등이 모두 그렇다. 그들은 모두 한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 써 있는 내용을 입으로 옮겨 발음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고, 가령 '치킨나라' 같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사전에 표시된 발음 기호 그대로 그 책의 내용들을 읽었다. 세 사람 모두 엄청난 속도로 영어를 배웠고 그 실력은 평생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자가 우수해서일 수도 있지만, 영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지금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해방 이후 맹꽁이 배처럼 부풀어오른 '한글에 대한 자부심'에 충만해 있다.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언어인지 떠벌이는 떡밥은 요즘도 잊을만 하면 인터넷에 올라온다. 하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지던 순간부터 불완전했다. 최세진이《훈몽자회》에서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며 절감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자음과 모음이 사용되었던 그 당시에도, 외국어인 중국어는 한글로 온전히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언어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한문 고전과 함께 들어온 유교 계통의, 혹은 불교 계통의 한자 어휘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섞어 쓰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외국어로 쓰여진 외국의 고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고전 한문을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다닐지언정 중국어로 대화를 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지금이야 고전 한문과 만다린의 격차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한자를 '외국어'로 받아들여 중국어의 4성조와 발음을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한자 문화권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덕분에 주로 필담에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은 나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글이라는 '숭고한 언어'(한글이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써놓도록 하자)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글은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넋을 지켜낸 그릇이요, 우리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영어를 표기해서 읽는다면 그 발음은 미국인의 귀에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불완전한 외래어 표기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한글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극도로 심각한 분열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한글을 숭배하면서 멸시하고, 칭송하면서 폄하한다. 그 이면에는 '영어'라는 언어가 타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혹은 영어를 쓰는 힘 센 미군 샘 아저씨와 똑같아지고 싶다는 달성 불가능한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글은 '완전한 문자 체제'가 되는데,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가 영어 학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글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너무도 우습게 아는 일본어도 한글로 완벽하게 표기될 수 없다. 한글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하는 음가 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로 한국어를 완전하게 표기하는 것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숭고한 한글'에 대한 숭배에, 앞서 언급한 '국어를 통한 민족 개조'라는 전통적인 맥락이 더해지면서, 나라 걱정하는 애국지사 이경숙은 '영어 단어의 강세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을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로 치환하여 온 나라를 들쑤셔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 기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사전에 등장하는 발음 기호를 강세 표시만 쏙 빼놓고 한글로 옮겨 지면에 표시하였고, 그러자 마치 이경숙이 [오린지]라는 발음이 미국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말했다는 듯 이야기가 와전되어버렸다. 그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여 우리의 네티즌들은 벌떼같이 일어났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바라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옳은 소리'나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애초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자들이, 경찰로 치자면 초동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태의 논점을 명확하게 잡고 있었더라면, 논의가 불필요한 방향에서 불타오름으로써 정치적인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글로 영어를 표기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네티즌 중 상당수는 '오뤤지'니 '오뢘지'니 하며, 마땅한 별명을 짓기가 곤란할 때 가령 '노정태'를 '노줭퇘'라고 발음하며 시시덕거리는 고등학교 1학년 유소년들처럼, 극도로 유치하게 자신들의 '반 MB 감정'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영어가 타자의 언어임을 깨닫지 못한 채, 숭고한 글자인 한글의 덫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8-02-21

자기 아니면 우주

요컨대 민족국가의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돼온 친일이란 문제는 생활사라는 큰 틀 속으로 흡수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각적인 사고와 조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가 민족 표준어 등 근대의 큰 틀이 깨지면서 소설 역시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보십시오. 그리고 일본 만화를 보세요. 자기, 아니면 우주입니다. 소설이 담당해왔던 중간항인 역사나 사회는 빠져있지요. ‘창공의 별’은 사라지고 아주 유치한 동물적 단계와 아주 높은 우주적 단계만 남아있습니다.”

김윤식, “향후 100년 문학의 화두는 ‘우포늪에서 우주 상상하기’”, 경향신문, 2008년 2월 21일, W2면


‘이 작가’란에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을 초대했다. 김애란은 첫 창작집『달려라, 아비』를 통해 한국 소설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창작집 『침이 고인다』 역시 이 작가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적 밀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 사회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궁핍한 실존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특유의 ‘우주지리학’을 펼쳐 보이는 이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서의 김애란의 뜨거운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문학과사회』겨울호를 엮으며, 『문학과사회』80호


"일본 만화를 보라"는 김윤식의 지적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모닝구무스메의 "Love Revolution" 가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지구' 타령이 나오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문득 기억난다. "The stars, my destination."이라고 선언하는 걸리버 포일은 현존하는 사회적 인간 관계를 손수 파괴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질서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한 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 먼지에 불과해'라고 쉽게 나불거리는 일본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결국, 자신의 유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냉소해버린다.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