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2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요 며칠 사이 사람들 사이에 Telegram(https://telegram.org/)이라는 채팅 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다. 아무래도 며칠 전인 9월 19일, 검찰에서 '인터넷 명예훼손 전담 소송팀'을 출범시켜서 포털, SNS, 카카오톡을 언제나 감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돈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만들어보자. 당신이 구성지게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대화 내용을, 단체 대화방에 있던 누군가가 캡쳐했고, 그 내용이 '짤방'으로 매우 흥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부주의하게도 당신의 대화명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 대화명이라는 게 딱 보고 누구라고 분간할 수 있을만큼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카카오톡의 협조가 없다면 감히 존엄하신 박근혜 대통령님을 모독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고 해보자.

이 경우 경찰이나 검찰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1.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온 후, 카카오 본사에 간다.
2.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오지 않고도, 카카오 본사에 간다.

당연히 어떤 시점까지는 2번이 정답이었다. 어떤 시점까지 그랬다는 것은,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는데, 천천히 보면 어렵지 않다.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정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통화를 하는 '나'의 이름이나 주소 등의 신원 정보. (2)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되는, 통화 시간, 상대방의 전화번호, 통화 위치 등의 기타 정보. (3) 통화 내용 그 자체.

통신비밀보호법은 여기서 (1)에 해당하는 내용을 '통신자료'라고 부르고, (2)는 '통신사실확인자료'라고 하여 따로 규정한다. (3)은 내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떤 법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2)와 (3)은 영장을 받아와야 통신사로부터 수사기관이 자료를 넘겨받을 수 있는 반면 (1)은 그렇지 않다.

다시 우리의 카카오톡 단톡방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 경우 (주)다음카카오는 설령 검찰이 와서 대뜸 '내놔'라고 하더라도, 통신사실확인자료에 해당하는 것, 즉 당신의 그 단톡방에 누가 있었고 당신이 그 드립을 언제 쳤는지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면 안 된다. 검찰이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한, 그런 자료를 제공하면 다음카카오라는 회사도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드립을 친 당신이 누구냐 하는 것, 즉 '통신자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영장을 받아와야만 하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통신사업자는 수사기관에 그 정보를 임의제출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 '통신자료', 즉 '카톡에 꼬끼요 라고 적은 애 이름하고 주소 불러'는, 수사의 기본이며 수사기관이 가장 필요로 할 가능성이 큰 정보라는 데 있다. 어디 사는 누군지 알면 수사의 반은 끝난 것이다. 게다가 영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어떤 시점까지, 경찰과 검찰은 국내 통신사업자들에게 '통신자료'의 제출을 요구하고, 통신사업자들은 별 생각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관행처럼 통용되어 왔다.

그 '어떤 시점'이란 그럼 무엇인가. 세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김연아, 유인촌, 차 모씨. 2010년, 김연아 선수에게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포옹을 요청했는데, 김연아 선수의 표정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차 모씨는 영감을 얻어, GIF 파일의 프레임을 몇 개 빼는 방식으로, 김연아 선수가 유인촌 장관의 포옹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듯한 영상(처럼 보이는 이미지 파일)을 만들었다. 이른바 '회피 연아' 영상이다.

그 파일은 처음 어떤 네이버 까페에 올라갔다는데, 그리고 나서는 여기저기 퍼졌고, 유인촌은 이거 만든 놈 누군지 몰라도 경찰 수사를 의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경찰은 동영상의 최초 유포자를 찾다가 결국 네이버 까페에 도달했고, 늘 그렇듯 (주)NHN을 향해 '아이디 뭐뭐뭐 쓰는 사람의 주소, 이름, 전화번호, 기타등등을 제공하라'며 임의제출을 요구했다. 당연히 당시의 NHN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차 모씨는 난데없는 송사에 휘말렸지만, 유인촌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일단 명예훼손 건은 마무리됐다.

문제는 차 모씨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NHN을 향해 소송을 걸었다. 당시의 기사를 인용해보자.

유 전 장관은 고소를 취하했지만 차씨는 NHN이 경찰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송을 걸었다. 1심에선 차씨가 패소했고 지난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선 “약관상의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고 인적사항을 경찰에 제공했다”며 원심을 깨고 NHN에 “50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서윤경, "‘회피 연아 동영상’ 이후 포털 업체들 “수사기관 통신자료 요청 제한적으로만 협조할 것”", 국민일보, 2012년 11월 1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587774&code=11151100&sid1=eco&sid2=0001

2012년 연말 이후, 그래서, 한국의 통신사업자들은 기존의 관행을 바꿔, 수사기관에서 이용자의 '통신자료', 다시 말해 신상정보를 요구하더라도 잘 내주지 않는다. 올해 4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합동수사본부는 카카오톡 자료를 좀 보고 싶어했는데, 그 경우에도 압수수색을 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통신자료'를 그냥 제공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사를 위해서는 '통신사실확인자료'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정리해보자. NHN이 됐건 카카오가 됐건, 국내의 통신 사업자는 만약 통신자료를 함부로 제공했다가 소송이 걸릴 경우, 물어줘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 이전처럼 경찰에서 되는대로 이용자의 신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과민한 일이다. 하지만 국내 법원의 영장을 받으면 그들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을 경우, 아예 서버를 이용하지 않는 비트토렌트 챗(http://labs.bittorrent.com/experiments/bittorrent-chat.html)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다음에야(이것도 현재 알파 서비스 단계) 완벽하게 공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정보를 보내지만 그 '온라인'은 어딘가에 놓인 서버에 저장되는 디지털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법원이 발급한 영장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한국 수사기관의 협조 요구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이석기 일당을 때려잡아야 하는데 그런 온갖 절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검찰의 심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지메일은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에 서버를 두고 있는 데다 가입 시 개인정보를 기재할 필요가 없어 수사당국의 압수수색 및 추적이 어렵다. 구글은 우리 사법당국이 요청할 경우 내부 기준에 따라 일정 부분 이메일 내용 열람을 허용하고 있지만, 복잡한 사법 공조 절차 등으로 인해 실제로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의 법 집행력이 지메일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공안사범들은 실제로 2000년대 후반부터 국내 이메일보다 지메일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닷컴, "'이석기 R0 수사' 발목잡는 구글 지메일…美측 사법 공조에 불응 압수수색 못해", 2014년 6월 24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4/2014062402763.html

즉, 한국의 수사기관이 특히 지메일을 '종북메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입김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서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해킹한 NSA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경우에는 영장 없이 개인의 정보를 무작위로 도감청한 것이고, 이 경우에는 영장이 있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당신이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사건을 터뜨렸고, 미국 경찰에 의해 수사받고 있다면, 그 범죄가 무엇이냐에 따라 구글은 아주 흔쾌히 당신의 계정에 대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구글 감청 프레젠테이션. 당시 구글의 클라우드 서버 사이에서는 암호화되지 않은 텍스트로 통신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한다).  GFE의 SSL을 뚫었다고 말하면서 웃고 있는 :-)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는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national-security/nsa-infiltrates-links-to-yahoo-google-data-centers-worldwide-snowden-documents-say/2013/10/30/e51d661e-4166-11e3-8b74-d89d714ca4dd_story.html

그러므로, 만약 국내의 수사기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메시징 앱을 원한다면, 굳이 텔레그램을 쓸 필요도 없다. iOS 디바이스에 기본적으로 딸려오는 아이메시지를 쓰거나, 모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필수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구글 행아웃을 사용하면 된다. NSA는 어쩌면 그것들을 해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경찰이나 검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받아도 당신이 타인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 거물'이 되지 않는 한 그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

정리해보자.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들여다볼까 걱정된다면, 일단 예전에 비해 국내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이 수사기관에 덜 협조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면, 극소수만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후 아무도 없는 대화창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리다가 삭제하지 말고, 행아웃이나 아이메시지처럼 국내에 서버와 본사를 두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방법을 사용해보자.

한국의 수사기관은 첨단 해킹 기술이 아니라 법치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를 동원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크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과연 '카톡'으로 표상되는, 복잡한 한국식 소셜 네트워킹 그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이다. 카톡 뿐 아니라 싸이월드를 해본 적도 없고, 페이스북은 가입만 해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2014-09-13

21세기 번역

『21세기 자본』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는데, 역시나, 책이 시중에 풀리기도 전에 그놈의 '번역 논란'이 한창이다.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간된 책인데 왜 영어판을 옮겼느냐는 것이다. 이미 출판사 글항아리는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했다'는 해명을 여러 차례 내놓은 바 있지만, 토마 피케티의 심오한 경제학을 온전히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우리의 인문-소비자들의 원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왜 번역한 책을 읽을까? '원문'이 아니라 번역한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 우리가 어떤 책의 원서를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T1이라고 해보자. 반면 그것을 번역으로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T2로 표기한다. 우리는 논의의 대상이 한국어 화자라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T1은 T2보다 언제나 크다. 만약 T1과 T2가 같거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 작다면, 굳이 번역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그것을 U라고 표기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1
U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즉 우리는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원서를 읽느라 고생하는 만큼의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번역 논란'을 벌이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가령 당신이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는다고 해보자. 한국어로는 24시간이 걸릴 책이 영어로는 100시간도 더 걸린다고 해보자. 2014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은 5210원인데, 그렇다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적어도 76시간을 더 쓰게 되며, 간단한 곱셈을 해보면 39596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으면, 책값의 차이를 논외로 했을 때, 약 40만원을 손해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떤 분은 반박을 하실 것이다. 엉터리 번역, 날림 번역으로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읽은 그 책이, 저자가 쓴 그 책과 같은 책임을 대체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간단한 산수도 그렇거니와, 인식론적인 대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연 언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오랜 세월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트위터도 열심히 해본 바에 따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모국어로 쓰여진 글을 읽고도, 그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책을 무슨 언어로 읽더라도, 독자가 저자의 '진짜 진짜 그 내면의 그 속마음'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어불성설이다.

'번역서의 오류로 인해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오늘날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서에 오류가 없더라도, 심지어 한국말로 쓰여진 글을 읽더라도, 우리는 종종 저자의 뜻을 잘못 파악한다. 

번역 논쟁을 일으키는 당신이나, 그 책을 번역한 번역자나, 저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신이 직접 원서를 읽다가 저자의 의중을 잘못 짚을 경우, 당신의 오해를 지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려면, 일단 번역자가 읽고, 그 내용을 한국어로 쓰고, 원문과 번역문을 놓고 편집자가 교정, 교열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요컨대 독자와 번역자의 싸움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독자는 책을 혼자 읽고 오해를 교정받지 않지만, 번역자의 작업은 출판사의 검토를 거친 후 세상에 나온다.

고의로 내용을 빼거나 왜곡해서 번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그렇다는 것이다. 번역자가 오역을 저지를 수 있는 만큼, 원서를 직접 읽는 당신도 그 책을 잘못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완벽한 이해를 추구해야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다소 무모한 발언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변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E1은 원서를 직접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총합이다. E2는 반면, 번역서를 읽는데, 번역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여 책으로 찍혀 나오는 오류의 총합이다. 당신이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E1과 E2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나는, 대부분의 경우 E2보다 E1이 클 수밖에 없다고 겸허하게 인정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그냥 재미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뭔가 재생산을 해야 하는 독자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E1과 E2의 관계에 대해 사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번역서의 오류마저도 일종의 즐길거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읽고 그에 기반해 뭔가 논의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폼을 잡아야 할 때, 어떤 오역으로 인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일을 우리는 대체로 피하고 싶어한다.

가령 당신이 『이방인』을 읽었는데, 지금까지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뮈르소가 무어인을 쏘아 죽인 것이 정당방위임을 몰랐다고 해보자. 그래서 당신은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고, 빈정이 상해서, 술상을 엎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이방인』을 읽었다면 까뮈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지 몰랐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즉 E1과 E2 중 뭐가 더 큰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 어쨌건 당신은 번역서를 읽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E2일 것이다.

이 경우 앞서 등장한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은 변형을 겪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을 위해 앞서의 경우를 U1, 지금의 효용을 U2라고 한다면,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2
U2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 E2

가 도출된다.

결론을 내보자. '번역에 대한 논란이 많네요, 저는 그냥 (나중에) 원서로 읽으려고요'는 과연 얼마나 타당한 표현인가?

T1이 T2보다 큰 사람, 다시 말해 원서를 읽는 속도가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빠른 사람은 굳이 그런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T1과 T2의 차이가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원서를 읽거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피해가, 그 책을 어쨌건 익숙한 언어로 빨리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보다 클 때에야, 우리는 번역서를 집어던지고 원서를 읽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오역, 혹은 오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는 '피해'가, 기꺼이 그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은 당신에게 그렇게나 심대한 타격을 주는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저 허접한 공식을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읽어도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할 가능성', 즉 E1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리고 당신의 실수는, 번역자의 것과 달리, 그 누구도 지적해줄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 '뽀록'이 나서 망신을 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번역 논쟁'을 부추기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야 하겠고,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번역된 책이 나오면, 적어도 읽어보기라도 하고, '논쟁'을 하던 말던 하자는 말이다.

2014-09-09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지금까지 쓴 칼럼 및 서평들

2014-04-20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http://basil83.blogspot.kr/2014/04/blog-post.html

2014-05-06
[북리뷰]초대형 참사는 작은 사고로부터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찰스 페로 지음·김태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html

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_20.html

2014-05-2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http://basil83.blogspot.kr/2014/05/1.html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http://basil83.blogspot.kr/2014/07/blog-post.html

2014-08-03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3.html

2014-08-25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html

2014-08-26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함인선 지음·마티·1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26.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http://basil83.blogspot.kr/2014/08/28-28.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뉴욕타임스’에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그 제목은 “In Ferry Deaths, a South Korean Tycoon’s Downfall”(여객선 사고, 한국의 한 부호의 몰락)이었다. 200개에 육박하는 댓글 중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고, 한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도 화제가 됐다. “북한은 공산주의의 문제를 보여주고, 남한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물론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가 한국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을 폭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문제의 기사를 읽어보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목포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세월호에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

세월호가 보여준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한국선급은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개조했을 때, 그것이 안전의 기준선을 넘지 않았는지 제대로 감독했어야 한다.

한국해운조합은 세월호에 실린 화물이 너무 많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지나치다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단체다. 만약 지금까지 밝혀진 대로, 세월호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진 이유가 제대로 묶여 있지 않은 컨테이너 때문이라면, 그 책임 중 적지 않은 부분이 한국해운조합에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세월호라는 배는 인천에서 제주도까지의 항로를 수도 없이 오갔다. 세월호 참사는 그 수많은 항해 중 어떤 하나가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다. 적지 않은 분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어떤 음모, 특히 정권 차원에서의 음모를 직감하고 있는 듯하지만, 배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이 참사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이 감수했던 ‘위험’의 범위 안에 속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리 기업을 감독해야 할 공적 프로세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선급은 사실상 선주들의 이익단체이고, 한국해운조합의 양심적인 직원들은 문제를 고발할 수 있을 만한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배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외부의 관리·감독 없이, ‘셀프 감시’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안여객선의 안전 기준이 실제로 점점 후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일명 ‘윤 일병 사건’에서 보게 되는 모습이 그와 같다. 현 법체계상, 군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은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법권도 행사한다. 그러니 본인이 지휘하는 부대가 ‘이상무’이기를 바라는, 그렇게 무사히 전역해서 연금을 수령하는 편안한 삶을 꿈꾸는 지휘관들은, 내부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고 죽이는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감추려 든다.

한국선급으로서는, 모든 일이 무사히 잘 돌아간다고 가정할 경우, 세월호의 증축과 개조를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28사단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군부대의 지휘관들도 내부의 가혹행위를 그저 덮어두고 쉬쉬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이유로 ‘참사’가 되어버렸다. 공식적인 지휘 통제권을 가진 누군가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그 피해는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이 승객들에게 제대로 탈출 안내 방송을 했더라면, 그리고 윤 일병이 소속되었던 의무대의 부사관이 가해자 병장의 가혹행위를 저지했더라면 말이다.

이후의 전개도 비슷하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작 한국의 연안여객선 관리의 복마전에 대한 조사 및 처분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듯,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군은 자신들이 가진 재판권을 전혀 내놓을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의 접점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그들이 ‘내부’에서 행사하던 관리·감독의 권리를 ‘외부’로 끌어내야 한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햇볕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2014-08-26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함인선 지음·마티·1만5000원

1911년 뉴욕. 당시 미국은 세계의 공장이었고, 그 중에서 뉴욕은 세계의 봉제공장이었다.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브라운 빌딩에 불이 났다. 그 건물에는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봉제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주가 문을 잠가놓은 탓에 123명의 여성과 23명의 남성이 화재로 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미국의 의류업계도 어린 여성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탓에 사태는 더욱 끔찍해졌다. 생때같은 10대·20대 소녀들이 불에 타서, 연기를 들이마시고, 그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창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저자의 말을 읽어보면,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나의 작업기를 바탕으로 그 작업들의 이론적·실천적 배경이 된 근대 건축가들의 얘기로 꾸며볼 계획”(232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의 탈고를 앞둔 시점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으려던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에 대해서도 발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책 자체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거기에 각각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우리는 책 제목을 통해 그 구분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앞에서는 ‘정의와 비용’을, 뒤에서는 ‘도시와 건축’을 논하는, 뜻하지 않게 시의성을 갖춘 책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의’라는 단어 뒤에 곧장 ‘비용’이라는 개념이 붙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담론 지형에서 상당히 낯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다. “결국은 공학과 돈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자꾸만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로 바꾸려 든다”(19쪽)고 지적한 후 “공학적 사고의 원인은 안전율의 부족 때문이고 안전율의 부족은 돈의 부족 때문”(27쪽)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안전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안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삼풍백화점부터 경주 리조트 붕괴, 세월호 침몰까지 공학적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것은 안전 불감‘증’(症)의 문제가 아니다. 안전 ‘공학-경제학’의 문제이다.”(같은 곳)

그러한 시각으로 세월호 침몰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참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배의 안전율은 곧 운항 수익의 함수이다. 그리고 운임은 좁게는 그 회사의 경영진이 정했겠지만 넓게는 동종업계의 합의였을 것이고 더 크게는 물가를 통제하는 당국과 시장이 정했을 것이다.”(22쪽) 실제로 정부는 연안여객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의 불만을 고려하여 요금을 올리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었고, 청해진해운은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배의 평형수를 빼고 신고하지 않은 화물을 실었다. 그렇게 생긴 이윤은 배와 안전에 재투자되지 않고 유병언 일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박하게 책정된 안전율임에도 범죄자들은 이마저도 빼먹을 것이라는 것은 경험상 ‘예견된 일’이다.”(같은 곳)

1911년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화재 이후 미국은 같은 종류의 대형 참사를 다시는 겪지 않았다. 안전이 사회적 비용의 문제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울의 도로가 푹푹 꺼지는 싱크홀 현상까지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그 비극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배웠을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