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1만2천원.
그들은 본디 놀림감이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등장하자 더욱 심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어버이연합이 단돈 2만원에 보수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언론 보도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애초부터 그 '어버이'들은 존경 혹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불쌍하되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의혹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의 입김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들은 2010년대의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현장마다 등장하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당 2만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고찰은 '일당 2만원'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변변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에게 그 돈은 소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면, 일당을 두 배로 쳐준다 한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까? 그 '어버이'들은 돈벌이 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의 일부가 되어 집회 현장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에리히 프롬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독일 국민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무기력한 사회당, 공산당과 달리 나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들이대기에는 나치가 내세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은 진작부터 독일 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공격성과 약자 혐오를 감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들은, 그런 정당에게 표를 던졌는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本有的)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욕구가 없다면, 오늘날 어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1쪽)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롬은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냈다.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을 파해치고, 또한 그 심리적 요인을 낳는 사회적 변화를 짚어내는, 대범한 지적 기획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절대적인 권위를 희구하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기도 한다. 전자와 구분짓기 위해 후자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이름붙인 프롬은 나치의 집권 당시 독일 국민들이 바로 그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였음을 분석해냈다.
'어버이'들을 욕하기란 쉽다. 그들에게 값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선택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독일을 읽어냈다. 1940년, 아직 나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반면 우리는, '어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2016.05.24ㅣ주간경향 117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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