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또 하나의 문화, 9000원
추모의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고, 공포와 분노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여성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그러자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외치는 새로운 목소리에 시큰둥하던 이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특히 남자 지식인들의 입장 변화가 눈에 띈다. 성정치의 이론적 복잡성에 기대어, 혹은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여성주의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한없이 보류하던 이들이 한 마디씩 말을 보태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한국의 지성계는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혹은, '그 페미니즘'과 '착한 페미니즘'을 가르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은 그저 약간 움텄을 뿐인데, 남자들은 호들갑을 떨며 '부잣집 딸내미들을 위한 운동을 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손사레를 치고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남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공론장을 과점하는 남자 지식인들과는 기꺼이 다른 입장을 택했던 사람이 있다. 권혁범의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글들은 여성주의자에게는 너무도 단순하고 당연한 글"이라고 겸양의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2007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던 남성주의적 합의에 대해, 그들 중 일부인 한 남자가 반기를 들었던 기록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남성-진보들은 틈만 나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선동하고 있을까? 혹 그들은 '부르주아'가 싫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마음껏 위반하고 유린하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 지식인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괜히 양념으로 '가부장 좌파'에 대한 비판을 끼워넣은 게 아닐까? 그들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똑똑한 여성에 대한 근본적 혐오감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178쪽)
여성이 '잘난' 모습을 보이면, 피해자가 되어 엉엉 울지 않으면, 상당수의 남성 지식인들은 지지하지도 연대하지도 않는다. 권혁범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부당하게 묘사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2001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아줌마'에 대한 그의 단상을 살펴보자. 장진구와 이혼을 택한 주인공에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는 "여전히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심혜진 씨가 분한 역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유포되어 있는 여성 지식인에 대한 전형적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한 고학력 여성은 예민하고 잘난 체하고 히스테릭하고 이기적이며 철모르고 자라난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통념 말이다."(59쪽)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의 심리를 한 남자가 거침없이 폭로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편견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지적인 수준이 높은 여성은 부담스럽고 또한 쉽게 지배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60쪽) 그렇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자신이 차별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당의(糖衣)라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에 대해 남자는, 특히 지식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빨리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다른 남자들을 가르쳐야 하나? 그도 그렇지만, '그 페미니즘'과 '저 페미니즘'을 구분하고 손가락질해왔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그런 면에서 좋은 귀감이 되는 책이다.
2016.06.21ㅣ주간경향 118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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