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
대륙의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들이 사는 북방과 맞닿아 있기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서 방어한다. 그 장벽을 지키는 것은 죄수로 이루어진 밤의 경비대. 그것을 운영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윈터펠의 영주가 할 일이다. 원래 죄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므로 탈영자는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에다드 스타크는 옛 법도를
지킨다. 탈영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칼을 빼들고 목을 친다. 고귀한 영주가 왜 이런 잔인한
망나니짓을 해야 하는 걸까? 에다드는 아들 브랜에게 설명한다. “우리는 선고를 내리는 자가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그 눈을 똑바로 보고 마지막 말을 듣는 정도는 해야 해. 그것도 견디지 못할 거면, 그
누군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미국의 작가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왕좌의 게임’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HBO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다. 칼과 갑옷과 마법이 등장하고 드래건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세계관, 그들의 가치와 지향점 등에서 진지한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형수를 직접 처형하는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칸트 윤리철학 중 자유와 책임, 그리고 존엄이라는 가치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처형하면서 존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심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사형수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범죄자는 자신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법을 어긴 자’인 범죄자를 처벌할 때, 역설적이게도 사회는 그 범죄자의 자유로운 인격과 존엄을 존중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붙잡힌 안중근 의사가 ‘나를 전범으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안중근은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 의도적이었다. 처벌당할 것을 알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실행에 옮겼다. 우발적 충동이
아닌 본인의 신념에 따른 행동임을 일본의 법정에서 당당히 외쳤다. 안중근의 이 존엄한 태도 앞에 일본인들 역시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는 존재다.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자유와 책임은 하나다. 칸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응보주의’로 분류되어 비판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원인은 다양하므로 철학적 원리를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한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라는 사고방식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옳다.
자유롭지 않다면 책임질 수도
없다. 책임이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지배를 받는 사람, 혹은 법을 어기고 처벌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 역시 스스로의 판단과 행위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에다드 스타크의 말은 그런 의미다.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그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의 부담까지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치자의 자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풍경은 이와 사뭇 다르다. 법무장관은 인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며 검찰총장의 수족을 잘라내고,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퇴임 후 정치 활동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둘을 임명한 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개입하지도 중재하지도 않고 그저 방관하는 중이다.
이와 같은 행보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하며 그에 따라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는 영주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으며, 적절하게 조율해낼 수 없다면, 둘 중 한 사람을 해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재인 본인이 인사권자라면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궤적을 놓고 볼
때 문 대통령이 칼을 빼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어이 임명했던 검찰총장이 바로 윤석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윤석열을 임명해놓고 자기 손으로 해임한다면, 검찰을 정권 보위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직접 자르지는 못하고 스스로 나갈 때까지 괴롭힌다. 마치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들개를
풀어놓는 장면을 연상케 할 지경이다.
게다가 윤석열의 말에 따르면
문재인은 지난 총선 이후 윤석열에게 자리를 지켜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렇다면 지금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치를 일부러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권에는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 대신 문제를 방치하거나 부풀리는 이 아수라장은 과연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왕좌의 게임’으로
돌아가보자. 윤리적인 영주 에다드 스타크는 음모에 휩쓸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다. 평화로웠던 대륙은 일곱 가문이
뒤엉킨 전쟁에 휘말리고 동쪽의 대륙으로 망명을 간 구 왕가의 후손은 신비한 힘을 얻어 재기를 도모한다. 선한 자는 쓰러지고 악한
자들이 날뛰는 가운데 윈터펠의 후손들은 가문에 내려오는 좌우명을 되뇌며 각오를 다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
드라마와 달리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상 매체에서 온전하게 다루기 힘든 철학적 고민과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이는 걸작이다.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질 때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가 된다. 이는 사형수부터 영주까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끝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그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머잖아 오게 될
것이다.
●모든 물은 삼중수소 함유수 ●원전 오염수 방류, 원자력 시대 일상사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 ●인체 피해 방사성 물질은 금보다 비싸 ●원전 ‘절대악’ 만든 건 美 대중문화 ●文대통령과 영화 ‘판도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물이 대량 발생했다. 그 양은 현재까지
118만t에 달한다. 원전 자체가 해안가 낮은 지대에 건설돼 있다 보니 지하수가 스며들어와 매년 오염수 5~6만t이 추가
발생한다. 지금처럼 보관만 해서는 시설 용량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절하게 방사성 물질을 처리해 독성을 없앤 후
바다에 방류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계획이다. 한국 정부는 진작부터 반대의 뜻을 표했다.
온갖 언론 보도를 봐도, 일본
정부가 방류하겠다는 '오염수'가 대체 얼마나 오염돼 있는지, 방사성 물질 제거 처리를 했다면 그 결과물은 얼마나 깨끗한지 비교
가능한 숫자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저 '어마어마한 삼중수소가 바다로 쏟아져 들어온다고요!'라는 호들갑스러운 공포 마케팅뿐이다. 이
지면을 통해 국내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숫자 몇 개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오염수 안 삼중수소 8조6000억㏃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안에 담겨 있는 삼중수소는
8조6000억 베크렐(㏃)이다. 그 외에도 세슘-137 등의 방사성 물질이 포함돼 있다. 낯선 단위가 나오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보자. 현재 보관 중인 오염수 중 28%인 30만t 정도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안전규제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머지
72%는 기준에 미달한다는 사실만 기억해둬도 충분하다. 또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배출은 2021년 한 해가 아니라 향후 30년에
걸쳐 이뤄질 전망이다. 나머지 72%에 대해서도 정화 작업을 완료한 후 방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8조6000억 베크렐. 겁이
난다.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수도권 주민의 식수를 제공하는 소양강댐에 2조9000억 베크렐의 삼중수소가 담겨 있다. 전체
물의 양과 그 속의 삼중수소량을 따지면 후쿠시마 오염수의 삼중수소 농도가 훨씬 높을 테지만,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 숫자를
들이밀며 겁을 내라고 윽박지르는 자칭 '환경주의자'들의 말만 듣고 따를 일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은 삼중수소
함유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이 방류하겠다고
하는 오염수는 정화 작업이 끝난 것이다. 말하자면 '정화된 물'이다. 나라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국제 표준을 따른다.
국제 표준에 따르면 원전에서 사용한 후 바다에 방류하는 물은 음용 가능한 수준으로 정화하도록 돼 있다. 일본이 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야 없다. 하지만 기준을 지켰다는 전제 하에, 이미 정화된 물 30만t의 방류를 반대할 과학적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2월 27일 일본을 방문해 "(원전 오염수를 정화 처리 후) 바다에 방출하는 건 국제 관행에
일치하는 방식"이라며 "전 세계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해양 방출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 것은 IAEA가 일본의
앞잡이거나 그로시 사무총장이 '푸른 눈의 토착왜구'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냥 과학적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
한국 언론 어느 곳도 '삼중수소수는 원래 적당히 농도가
옅어지면 바다에 버리거나 대기 중으로 증발시킨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 일본이 지금까지 후쿠시마 삼중수소수를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례적이다. 유엔과학위원회(UNSCEAR)의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공기와 바다에 삼중수소를
흩뿌려댄 '원자력 악당' 국가의 명단에는 캐나다, 대한민국, 그 밖에 온갖 국가가 속해 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캐나다의 포인트 르푸르 원전은 매년 170조 내지 64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대기 중으로 발산했다. 삼중수소가 들어 있는 물을
끓여 수증기로 날려 보냈다는 뜻이다. 매년 110조 내지 50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바다에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매년'에 주목해보자.
후쿠시마 원전 부지 내 저장고에 들어 있는 모든 삼중수소를 다 더해도 860조 베크렐 정도다. 캐나다는 그 정도 분량을 '매년'
공기 중으로 흩뿌리거나 바다에 뿌렸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건 특별한 환경 재앙과 거리가 멀다. 원자력 발전소라는 것이 생긴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져온 일상사에
가깝다.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과학위원회에서 내놓은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월성 1호기와 2호기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231조
내지 625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대기 중으로 방출했다. 매년 42조 내지 18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동해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프랑스의 라아그 재처리 시설은 매년 후쿠시마 원전수의 열 배 가량의 삼중수소를 바다에 버린다.
지금 나는 '후쿠시마의 재앙이
알고 보니 전 세계에 만연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월성 1호기와 2호기에서 삼중수소를 배출했지만 우리의
건강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후쿠시마의 오염수 방출 역시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과 그 밖의 세계인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나라에서 바다로 폐기하건 삼중수소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에는 너무도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이다.
푸틴과 '방사능 홍차' 사건
물론 모든 방사성 물질이 그런 건 아니다. 그 유명한 '방사능 홍차' 사건을 생각해보자.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직 KGB 요원 알렉산드르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푸틴은 자신이 그 범죄와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수가 푸틴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독살에 동원된 방사성 물질이 폴로늄 210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연간 생산량이 100g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히 희귀한 물질이다. 그런 방사성 물질을 생산하고 취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국가와 기관의 수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그런 국가의 수장 중 리트비넨코를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은 딱 하나
뿐이다.
대중이 갖고 있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실제 방사성 물질이 지니고 있는 특성의 차이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사람들은 흔히 원자력
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가 수백만 명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효과도 즉각적으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체에 즉각적 피해를 불러올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은 매우 비싸고 귀하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독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방사성 물질은 '그렇다면 범인은 푸틴'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만큼 귀하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의 재료나 발전소의 연료로 쓸
수 있는 방사성 물질 역시 비싼 물건이다. 2011년의 시세로 보더라도 플루토늄은 1g당 약 4000달러에 달하는데, 당시
금값은 1g당 50달러 내외였다. 금보다 80배는 비싼 광물이 바로 플루토늄이다. 흔히 '사용후핵연료'라고 불리는 그것에는 매우
비싼 방사성 물질이 한가득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방사성 물질을 함부로
유출할 것이라는 우려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금 세공 업체에서 금을 유출하는 일이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곳에서는 방사성 물질을 유출하지 않는다. 위험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자연계에 쉽게 존재하지 않는 아주 비싼
물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건 캐나다건 일본이건 바다나 대기 중으로 내보내는 방사성 물질은 삼중수소처럼 쉽게 희석시킬 수 있는
반감기가 짧은 것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과장된 대중적 공포, 상식 부합 안 해
방사능에 대한 대중적 공포는 과장돼 있다. 과학뿐 아니라
단순한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가령 일부 사람들은 도쿄가 후쿠시마와 가까우니 두 곳 대신 후쿠오카에 여행을 다녀오는 게
건강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 서울 등 수도권과 강원도는 화강암 지반이고 따라서 도쿄보다 자연방사능 수치가
높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지에 가까운 도쿄에 사는 일본인보다, 훨씬 먼 곳인
서울에 사는 한국인이 매년 평균적으로 훨씬 더 많은 방사능에 노출되고 있다. 자연의 법칙상 그럴 수밖에 없다.
서울 사람이나 도쿄 사람이나 그
미세한 방사능의 차이로 인해 건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의료계는 한국인의 연간 자연피폭량을 2.5밀리시버트로
간주한다. 반면 일본에 사는 사람은 연간 1.5밀리시버트의 자연방사능에 노출된다고 보는 게 통상적이다. 방사능 총량만을 놓고 보면
한국보다 일본이 '방사능 청정지대'인 셈이다.
그런 미세한 수치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인간의 건강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치려면 노출되는 방사선량의 단위가 '시버트' 쯤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5시버트에 노출되면 50%의 확률로, 10시버트에 노출되면 100%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2.5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되더라도 곧장 죽지는 않는다. 밀리시버트 1000개가 모여야 1시버트가 된다. 2.5시버트란 우리가 한
해 내내 자연 상태에서 노출되는 방사능의 1000배에 달하는 셈이다.
방사능의 공포에 대한 모든
숫자는 일상과 거의 무관하다. 방사능 홍차를 마실 일이 없는 한, 그렇게 높은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것 자체가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확률 높은 방사능 피폭은 의료기기를 통한 것일 텐데, 그마저도 전문적으로 훈련된 의료
인력에 의해 운영되고 또 모든 과정이 감시되고 있다. 불필요하게 긴장하거나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방사능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대중문화 속 '절대악'
이게 다 미국 때문이다. 워싱턴의 정치인들 얘기가 아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중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의 영향력 탓에 우리는 원자력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때는 1979년 3월 16일.
영화 '차이나 신드롬'이 미국에서 개봉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노심이 용융돼 한없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중국까지 닿을 것이라는
가상의 사고 상황을 다룬 작품이었다. 문제는 약 열흘 후인 1979년 3월 28일,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에서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열광적으로 공포를 퍼뜨렸다. 대중은 패닉에 빠졌으며, 이후 미국과 전 세계 대중문화 속에서 원자력은
'절대악'으로 내몰렸다.
잘 생각해보자. 1980년대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돌연변이 닌자거북' 시리즈라던가, 그 무렵부터 쏟아져 나온 온갖 B급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방사능 괴물'들을. '불가해한 환경 재앙으로 인해 발생한 돌연변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원전 사고나 방사능 물질 등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돼 왔다. 독립 단편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어떤 책에서는 '괴물의 정체를 설명하기 귀찮으면 적당한 핵폭발
장면을 편집해서 삽입하라'는 조언이 실려 있기도 했다. 원자력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무언가, 혹은 그 자체가 괴물인 무언가로
낙인찍히고 만 셈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원자력
혐오'다. 마치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특정 지역 방언을 쓰는 사람들을 죄다 조폭처럼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문화 매체가
죄책감 없이 혐오 표현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방사능이나 원자력 같은
단어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돌연변이'니 '환경 재앙'이니 하는 말을 떠올리고 늘어놓게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장된 공포는 현실과
무관하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는 사고 발생 직후인 1979년 4월 1일 현장을 시찰했다. 그는 따로 방호복 등을
갖춰 입고 있지도 않았다. 한국에 설치된 대부분의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스리마일 2호기는 가압경수로였다. 사고가 났다고 하지만 그
어떤 방사능도 유출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는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는 양복 차림으로 사고가 난 원자력 발전소
내부까지 시찰했다.
일단 불붙은 대중문화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원자력은 손쉽게 괴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중적 인식은
근거 없이 확증편향만을 덧붙였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대중문화가 원자력 혐오에 기여하거나, 적어도 무관심하게 동조하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다. 한국에서도 2016년 '판도라'라는 영화가 개봉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에 관람했다. 그 후의 전개 과정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혐오로부터의 탈피
이제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 혹은 그 공포를 빌미 삼은 혐오를 이겨내야 할
때가 아닐까. 기후변화 국면에서 탄소 배출 없이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돌파구가 바로
원자력이다. 테라파워라는 벤처 기업을 만들어 신형 원자로를 개발 중인 빌 게이츠가 늘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21세기에 화석연료에서
원자력으로 에너지 대전환을 이뤄내지 못하면 후손들이 살아갈 22세기는 매우 어두운 시절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를 통해 대한민국이 그 세계사적 전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부디 공포와 혐오의 선동을 걷어내고,
사실에 입각한 성숙한 과학 기술 정책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진보, '우리편 썩은놈들과 같이 할래'하면 정치퇴행" "보수는 어떤 약자 보호하고 있나?" "박정희 정권 초기 굉장히 진보적 면모" "한미동맹은 대체 불가능한 연결 수단" "美 패권 질서 있기 때문에 풍요와 번영"
진보 논객으로 알려진 노정태 작가가 현정부 지지자들과 보수 정치계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노 작가는 18일 유튜브에
공개된 국민의힘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 대담에서 “현재의 집권층을 지지하는, 스스로는 지금까지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낙심한 끝에 ‘아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 어차피 다 썩었으니까 지금까지 우리 편이었던 우리 편 썩은 놈들과 같이
있을래’라고 하면서 퇴행해버리면 정치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추미애 건이 터져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여론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가 자신들이 군대에서 겪어 보니까 보수 정권 있을 때도 군대 문제는 똑같았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진단하며 이같이 말했다.
또 “더불어민주당이 세월호
사건이라든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서 일종의 사기극을 벌여 왔다 폭로가 있었지만 여론이 (국민의힘에) 넘어오지 않는 것은 어쨌건 이
사람들은 좀 등쳐먹을지언정 옆에는 있어주지 않았냐 이런 생각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보수 진영을 향해 “구체적으로 보수가 어떤 약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떤 약자를 공동체가 지켜야 할 약자로 인지하고 있고 그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 구체적인 사고의 프로세스가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천에서 발생한 일명 ‘라면 형제’ 사건을 예로 들며 ‘엄마가 집에 있었어야지’라고 얘기 하는 순간 이 보수는 낡은 보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담을 진행한 지상욱
여의도연구원장 역시 국민의힘이 여전히 외면 받는 상황에 대해 “(국민들께서 보시기에) ‘적폐라고 했는데 새로운 정권도 다른 게
없네?’여기까지 온 것 같다”면서도 “그런데 거기서 우리(보수)를 돌아보면 앞으로 다시 정권을 주면 안 그러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지금 못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책했다.
노 작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초기에 굉장히 진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2020년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 진보라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봉건 구습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한국 사회에 근대적인 사회의 토양을 뿌려준
것만으로도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국제정세와 관련해서는 “미국
패권 질서가 흔들리면 기뻐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정도의 경제적 풍요와 번영과 안정은 미국이 안정되게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한 질서 위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했다.
한미동맹에 대해서는 “우리를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대체 불가능한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노정태 작가와 지상욱
여의도연구원장의 만남은 여의도연구원의 유튜브 방송 ‘소통대통’을 위해 이뤄졌다. 여의도연구원과 진보·개혁 성향 인사들의 대담
시리즈인 ‘소통대통’은 지난주 일요일 첫 방송 했다. 1화에는 유재일 시사평론가가 출연했고, 노 작가가 2화 인사로 출연했다.
노 작가는 이번 대담의 자기소개에서 “대한민국의 진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요즘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재·데이터 모두 알아차린 정조의 안목 ●‘소주성’ 논란 확산 즈음 통계청장 조기교체 ●전·월세 폭등하자 부총리 “통계 방식 한계”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GOMS) 자료 수집 폐지 ●청년 고용 정책 효과, 전 정권과 비교 가능한가 ●원자료(raw data) 존중한 정조에게 배워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 엑셀'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해보자. 1795년 3월, 정조가 명을
내렸다. 7년간 전국 여덟 고을에서 나무를 심었는데 어느 고을에서 얼마나 더 심었는지 알 수 없어 정확한 논공행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수레 하나에 가득 찰 만큼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를 내놓고는 책 한 권으로 요약해내라는 게 정조의 명령이었다.
정약용은 일단 장부를 고을
별로 분류했다. 또 연도와 날짜 별로 다시 나눴다. 이렇게 자료의 체계를 잡은 후 각 고을 별로 한 장씩 표를 만들어 세로축에는
나무의 이름, 가로축에는 연도 별 날짜를 적었다. 이렇게 한 수레의 장부를 여덟 장으로 요약한 후, 다산은 그 여덟 장을 다시 한
장의 표로 축약했다. 정조는 나무의 종류와 상관없이 얼마나 많이 심었느냐에 따라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세로축에는 고을의 이름,
가로축에는 연도 별 날짜에 따른 나무의 숫자를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확인된 바, 여덟
고을은 7년에 걸쳐 나무 1200만9772그루를 심었다. 정조의 손에는 어느 고을이 언제 얼마나 나무를 심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한 장의 표가 들어왔다. 정조가 나무의 종류에 따른 최종 보고서를 요구했다면 정약용은 그 또한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충실한 원자료(raw data)에 바탕을 두고 스프레드시트 작업을 끝마친 상태니 말이다.
데이터를 요구하는 임금
대부분 사람들은 이 일화를 두고 정약용의 지적 탁월성에 주목한다. 그
말도 옳지만 유능한 부하를 알아보았으며, 본인이 원하는 자료가 무엇이고 어떻게 제출돼야 하는지 정확한 오더를 내린 클라이언트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조의 안목과 능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다산은 천주교 문제가 얽혀
있는, 말하자면 정조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대를 살았던 유능한 인재였다. 정조는 그 능력을 귀하게 여겼다.
정약용이 아무리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들, 임금이 숫자에 기반 한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고을 사람들이 나무를 심을 때 더욱 정성스럽게 심었는지, 얼마나 감동적인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는지 따위를 물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정약용이 '인간 엑셀'로서 힘을 발휘한 까닭은 정조가 제대로 된 정량적 데이터(Quantitative
Data)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숫자에 친한 권력이란
한반도 역사에서 극히 드문 예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권력자는 숫자를 싫어했다. 숫자에 입각한 정확한 보고를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설령 숫자에 입각한 보고를 받는다 해도 권력의 입맛에 맞을 때만 좋아했다. 쓰라린 현실과 차가운 팩트를 일러주는 숫자를
들고 가는 일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같은 일이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권과 숫자와의 악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득주도성장의 유효성과 성패에 대해 논란이 커졌다.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발상은 극히 실험적인 생각이며 아직까지 현실에서 검증된 바 없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적어도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제시되는 통계와 지표는 건전하고 건강한 경제 상황과 퍽 거리가 멀었다. 소득주도성장이 본격화하기 전인
2018년 1분기와 비교해 2분기에는 소득분배 지표가 급격히 나빠졌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서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소득이 한 해 전보다 각각 8%와 7.6%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 동력을 유지‧강화하면서도 소득 분배를 고르게 한다는
정책 목표가 전혀 달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험적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주역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장하성 현 주중 대사의 경질을 점쳐볼 만했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목이 잘린 사람은 장하성이 아닌 통계청장이었다. 청와대와 정부는 '마음에 안 드는 숫자가 나와서 통계청장을
잘랐다'고 하지 않았지만, 여당과 정부를 옹호하는 이들은 통계청이 소득 조사 표본을 5500가구에서 8000가구로 확대하면서
통계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목이 날아간 통계청장과 '소주성'
대체로 2년 내외 임기를 채웠던 통계청장이 고작 1년 1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 자리는 강신욱 현 통계청장이
채웠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장관님들의 정책에 좋은 통계를 만드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소득주도성장이 실패로 돌아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슬그머니 정책 방향을 철회했다. 8000가구로
늘어난 표본을 5500가구로 다시 줄였는지, 아니면 그들이 말하던 '문제'를 시정했는지와 무관하게, 통계가 정치에 휩쓸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과 숫자와의 전쟁은 부동산 문제를 놓고 또 불거졌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핀셋
규제'를 해가며 집값을 잡겠다고 했지만 공급을 틀어막고 수요만 억누르려 하니 집값이 잡힐 리 없었다. 아주 초보적 경제학 상식을
거스르고 있었지만 청와대는 자신들의 정책이 옳았음을 숫자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정부의 온갖 대책은 집값을 낮추기는커녕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정부와 무관한 거의 모든 전문가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요지부동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옳다고, 혹은 지금은 과도기지만 곧 효과가 날
거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냥 우기기만 하면 얼마나
다행일까.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숫자가 나올 때까지 통계의 기준을 만지는 정황이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8월 19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을 살펴보자. 그는 전·월세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통계에 대해 "현행 전세
통계는 집계 방식의 한계로 임대차 3법(새 임대차보호법)으로 인한 전세 가격 안정 효과를 단기적으로 정확히 반영하는 데 일부
한계가 있다"며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보완 방안을 신속히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침대에 누웠는데 사람의 발목이
삐져나왔으니, 침대를 늘리는 게 아니라 사람 발목을 자르겠다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통계를
주무르다보니 말도 안 되는 희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부는 8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은 매주 0.01%씩 상승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부의 규제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취지다. 그런데 같은 기간 월간 상승률은 0.29%다. 한 달은 4주니까,
단순히 합산하건 누적 계산을 하건, 주간 상승률을 모두 더해도 월간 상승률에 미치지 못한다. 숫자가 안 맞는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지속되고 있는, 산수와의 전쟁이다.
바다 위의 갈매기와 물고기
바다 위에 갈매기가 모여들면 물 밑에 물고기들이 모여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가 '이
통계는 잘못된 통계'라고 손가락질하면 해당 영역에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매년 수행하는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GOMS)의 자료 수집을 폐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던 생각이다. 시험을 망쳐놓고 나쁜 결과가 나올까봐 채점하지 않고 있는 학생처럼, 문재인 정권은 지표가 나쁘게 나올 것
같으면 통계 자체를 없애는 선택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생긴다는 말이다.
진보성향 젊은 사회학자인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고용노동부에서 GOMS 자료 수집을 폐지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신 청년
패널을 행정자료와 붙여서 보완하려는 계획이라는데, 더 구체적 안을 봐야겠지만 상식적으로 GOMS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썼다.
한국고용정보원은 GOMS를
"매년 새롭게 졸업하는 전문대 및 대학 졸업생들의 노동시장 진입 과정 등을 조사하는 대졸자 코호트 조사"라고 소개한다. 진보성향
사회학자인 김창환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는 블로그에 "한국에서 수집되는 자료 중 (a) 고교 정보, 고등교육 정보, 대졸 직후
초기 노동시장 정보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b) 표본수도 크고 (c) 10년 이상 자료가 누적돼 추세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데이터"라고 썼다.
매년 졸업하는 대학생들이 어떤
직장에 어떻게 취직하는지, 그것을 매년 조사한 자료가 누적돼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에도 같은 기준으로 수집돼온 귀중한
데이터 세트(data set)다. 프라이버시 때문에 일반에 공개하지는 않지만 현재 직장과 부서까지 추적한다. 이런 정보를 갖고
있어야, 취업하는 회사에 따른 소득 불평등과 그 장기적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올바른 정책 대안도 여기서 비롯한다. "정책적으로
무엇을 해야 20대 후반 대졸 청년층의 노동시장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지, 그 증거를 가장 명확하게 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가
바로 GOMS"라고 김창환은 결론짓고 있다.
훌륭한 자료가 있으니 학자들
역시 좋은 연구 성과를 낸다. 김창환은 진보성향의 젊은 사회학자인 최성수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인용했다. 이에 따르면 "최근에
출판된 계층, 불평등, 공정성 관련 핫한 사회학 연구들은 GOMS를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이 자료가 꾸준히 축적된다면,
문재인 정권이 펼친 청년 고용 정책의 영향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 같은 기준으로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관두고, 다른 연구의 자료를 활용하는 간접적 조사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성적이 마음에 안 들면 성적표를 바꾸려 드는 이번 정권의 일관된 경향을 부정할 수도 없지 않은가.
성군이냐 암군이냐
미국의 통계청과 국세청은 대단히 상세한 통계 정보를 장기간에 걸쳐 수집한다.
사생활 침해 여지가 없도록 적당히 처리한 자료를, 약간의 요건만 갖추면 어느 연구자건 다운로드받고 활용할 수 있도록 여건을 완비해
놨다. 가장 보수적 정치단체뿐 아니라, 토마 피케티나 이매뉴얼 사에즈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들 역시 정부의 통계에 근거해 연구하고
정치적·정책적 방향을 제안한다.
민주 국가의 정부가 통계를
두루 수집한 뒤 대중 일반에 공개하는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기 전, 즉 갓 연방국을 구축했을 때부터
미국의 국회도서관은 세계의 모든 책과 정보를 한 곳에 모으고 국민에 공개해 왔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쓸 때 영국 정부의
통계 자료를 적극 활용했다. 근대 국가의 민주주의란 곧 정보의 민주주의다.
애석하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 정책의 실적이 나쁘게 나오자 곧장 통계청장을 갈아치운다. 부동산 정책의 약발이 듣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경제부총리가 직접 나서서 통계의 기준을 바꾸겠다고 한다. 예고 없이 갑자기 GOMS 자료 수집을 중단한다니, 현
정권의 청년 고용 정책이 실패한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통계가 엉망이고 신뢰하기 힘든 나라에서는
마르크스가 살아서 돌아와도 혁명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
문 대통령을 정조에 빗대는 건
타당하지 않다. 정조는 신하의 출신이나 정파, 종교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능력을 보고 중용했다. 정확한 숫자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올바른 자료를 요구했다. 문재인 정권은 숫자와 논리에 의해 정책을 펴지 않는다. 외려 멀쩡히 잘 작동하는
통계마저도 조사 범위를 축소하거나 폐지하려 든다.
나는 대통령을 왕에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야 알아듣는 현 정권과 지지자들이니, 비유를 해보자. 성군은 고사하고 암군으로
남지 않으려면 문재인 정권은 통계에 손대는 일을 멈춰야 한다. '성종실록'을 열어보겠다고 우기던 연산군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1983년생인 나는 가수
나훈아가 한창 날리던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게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파티 초청을 거부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두세
곡 부르고 약 삼천만원 정도 받는 쉬운 돈벌이였지만 단호히 거부하며 이런 뜻을 밝혔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려고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대체 저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의문은 올해 추석을 하루 앞두고 풀렸다. 지난 9월 30일 KBS 2TV에서 방송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보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호랑이 같은 얼굴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이 대범한
예인(藝人)이,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격식 없이 건넨 말 덕분이었다. 아, 테스
형!
나훈아는 노래한다. “세상이 왜
이래, 사랑이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원래 이 가사는 그가
작고한 아버지의 무덤에서 떠올린 것이지만, 너무 어둡고 무거워질 것 같아서 모두가 아는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후문이 전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 주제만큼은 진작부터 그의 가슴 깊이 묻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노랫말이 되었고 온 국민의 안방에 전달되었으리라.
고대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델포이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세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중 하나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인 델포이는 예나 지금이나 험난한 곳이다.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었던
셈이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웅장한 신전에 도달하면 신의 메시지가 기다린다. 너 자신을 알라.
즉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의 원작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워낙 열심히 저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사람이 ‘땡벌’을 나훈아가 아닌 강진 노래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회상록’에서 전하는
바는 이렇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며,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미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한다. ‘카르미데스’ ‘프로타고라스’ ‘파이드로스’ ‘필레보스’ ‘법률’
‘알키비아데스 1’. 총 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는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았다. 대화 편에 따라 언급되는 맥락과 방식이 다르다.
가령 ‘알키비아데스 1’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라는 취지에서 저 말을 인용한다. 반면 ‘파이드로스’에 담긴
맥락은 훨씬 무겁고 비장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인 튀폰을 거론하며,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튀폰보다 더 끔찍하고
사나운 짐승인지, 아니면 오만하지 않은 명(命)과 신성을 타고난 온유하고 온전한 피조물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치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처럼,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소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그 이전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인간보다 자연에 쏠려 있었다. 우주가 어떤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순환하는지, 숫자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 그들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우주를 인식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고
귀찮게 질문을 던져댔던 것이다. 자네는 참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자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 이건희의 초청을 거절하던 나훈아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나훈아는 자신이
‘대중 예술가’, 즉 표를 사고 공연장에 온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와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혼돈에 빠지면 더 큰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없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은 평범하고도 위대한 국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런 단단한 자기 인식에서 나왔으리라. 정권 따라 팔랑거리는 얄팍한 ‘개념 연예인’이 아닌 당당한 대중 예술가 나훈아.
그는 그렇게 온 국민의 가슴에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눈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통령 문재인부터 그렇다. 지금은
대단한 권력자인 것 같지만 고작 1년여 후에는 평범한 국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임기 말년의 선출직 공무원이다. 5년 빌려 쓰는
권력을 쥐고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며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앞에 빌빌 기면서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모습 앞에
국민은 입을 모아 외칠 수밖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골칫거리였다. 권력자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망자로서 살아가느니 아테네 시민으로서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팬이나 추종자라고 스스로를 착각하는 이가 퍽 많은 이 나라의 모습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뭐라고 할까.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답답한 마음을 한 줄기 노래에 실어 보내며,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두 차례나 “김정은 계몽군주” 언급 유시민 ●‘명령하노니, 너는 자유다’ 말하는 王은 근대인인가 ●김정은, 자유와 번영에 힘 실어줄 의향 없어 ●계몽군주는 부유하고 똑똑해진 시민에 의해 무너져 ●자칭 ‘지식 소매상’의 현란한 궤변과 대중 기만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유시민(61)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북한의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8년 JTBC '썰전'에 출연해 김정은을 두고 소년가장이며 계몽군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반발은
있었으나,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이벤트 덕에 큰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9월
25일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시신을 소각한 지 고작 사흘이 지났을 때다. 유시민은 또 다시 김정은에게
계몽군주라는 수식어를 헌사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북측 통지문이 공개된 직후다. 북측 통지문에는 유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논란이 커지자 유시민은 닷새
후인 9월 30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계몽군주라는 표현이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는 취지로 둘러댔다.
독재자 중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개혁적 행보를 하는 사람들을 계몽군주라고 칭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자신은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한 독재자임을 명시했으니 칭찬이 아니라는 논리다.
물론 궤변이다. 생각해보자.
지구상 그 누구도 김정은이 독재자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김정은에게 독재자라고 말하는 건 특별한 비난이 되기 어렵다.
유영철을 살인자라고 부른다 해서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계몽군주라는 수식어는
김정은에게 붙을 경우 당연히 칭찬이 된다. 유시민 스스로가 설명했다시피 '그나마 상대적으로 좀 나은 독재자'라는 뜻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봐야 저런 소리를 변명이라고 늘어놓을 수 있는 걸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계몽군주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개념이다. 모순이라는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우리가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계몽된 사람은 그 누구의 지도나 간섭 없이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독립적 주체다.
따라서 그 정의상 계몽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짧지만 중요한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칸트는 단언한다.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민중에게 자유만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다." 계몽주의자는 궁극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가 스스로를 계몽해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계몽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계몽군주라는 문제적
존재가 등장한다. 역사상 어느 지역에서도 계몽주의의 꿈을 시민계급 스스로 이루어낼 만한 역량이 없었다. 시민에게는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구체제의 기득권을 이겨낼 힘이 부족했다. 구시대적 권력을 쥔 통치자는 새 시대의 문물과 부국강병을 원하지만 자유로운
시민들이 활개 치며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 경우 계몽은 밑에서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반대로 한 사람의 군주가 근대화의 이상을 품고 있을 때, 이를 실현하는 하향식 프로젝트의 형태로 근대화가 시도된다.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구하는 기묘한 형국이다.
그 '근대화' 속에는 자유,
평등, 신분제 폐지, 민주주의 같은 가치가 포함돼 있다. 계몽군주는 근대화를 원치 않는 귀족과 백성을 근대로 이끌고자 한다.
신민들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니 더욱 큰 권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몽군주의 권력이 커질수록 진정한 근대화는 이뤄질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이회영(1867년~1932년)에 대한 일화가 떠오른다.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해 가산을 정리하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거느리던 식솔들에게 "너와 나는 평등한 관계이므로 더는 내게 존댓말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 없다. 입에서 나오는 게 존댓말이요 몸은 여전히 굽신 대며 시중을 든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이회영은 회초리를 들어
"너와 내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 어서 존댓말을 그만두지 못하겠느냐"고 혼을 냈다고 한다.
물질적 측면을 넘어 정신적,
제도적 근대화까지 추구하는 계몽군주가 흔히 처하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내가 명령하노니, 너는 자유다'라고 왕이 명령한다면 그
백성은 자유인인가, 아닌가. 전근대적 권력을 이용해 근대화를 추진하는 계몽군주는 근대인인가, 전근대인인가.
강제수용소 운영하는 독재자가 계몽군주인가
정리해보자. 계몽군주는 부국강병을 원한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모든 군주가 계몽군주는 아니다. 근대 이후
세계에서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상공업을 키워야 한다.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징병제를 도입해야 하므로
그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국민에게 나눠줘야 한다. 평범한 국민도 일사분란하게 명령에 따라야 하니 적어도 문맹은 면하고 사칙연산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보통교육이 필요해진다.
이와 같은 개혁은 장기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근대 이후 세계에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려면 어쩔 수 없이 국민을 부유하고 똑똑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중산층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들고 일어날 테다. 군복무를 통해 공통의 정체성을 갖게 된 군중은 문맹에서 벗어나 자유사상가들이 찍어낸
팸플릿과 선동문을 읽고 왕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댈 거다.
계몽군주는 스스로 만들어낸
조국 근대화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모순의 운명을 끌어안고 있다. 세계사의 수많은 계몽군주들은 무사히 퇴임하거나 사망했어도
결국 자신이 추구한 근대화로 인해 자신의 왕조가 몰락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만든 대학에서 육성된 인텔리겐차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다.
김정은을 두고 계몽군주
운운하는 유시민의 말이 엉터리인 것은 그래서다. 김정은은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번영에 힘을 실어줄 의향이
없다. 최근에는 장마당에서의 거래가 늘고 있다는 관측이 없지 않다. 그것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을 형성하고 거래를 보장하며
사유재산권을 지켜주는 근대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저 암시장이 늘어난다는 뜻일 뿐이다. 외려 중앙권력의 약화 내지는 의도적 방기로
인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유럽 대부분의 계몽군주는
가혹한 처벌과 고문을 줄여 자신의 근대성을 입증하려 했다. 김정은은 고모부를 잔인하게 처형했다. 지금도 북한 곳곳에 아우슈비츠를
방불케 하는 강제수용소가 있다.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그렉 스칼라튜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 북한 강제수용소에 12만여 명이 수감
중이다. 계몽군주와는 정반대의 길을 오롯이 걷는 셈이다.
박노자는 10월 5일 블로그와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모든 것은 민을 위해서지만, 민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게 없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말을 인용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개혁'을 계몽군주의 본질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공산주의 체제와 그 권력을
세습한 김정은을 보며 계몽군주를 연상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는 얘기다. 앞서 말했듯 그러한 관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무엇'이냐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일부러 도외시한다. 계몽군주는 평범한 독재자가 아니다. 자신의 발등까지 찍을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근대화의 도끼를 크게 휘두르는 독재자다.
근대화라는 신념 혹은 이념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계몽군주는
박정희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군주'는 아니었으나 군주 수준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라는 명료한 목표를
스스로 인식하며 추구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 법질서를 정비했고 사회 치안을 확립했다.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했고 중산층을 육성했다.
보통교육을 확립했고 더 많은 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박정희가 근대화를 이념으로서
추구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지금도 정부서울청사에 가로 2m, 세로 4m로 새겨져 있는 박정희의 휘호가 그의 신념을
웅변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일천구백육십칠년 일월 십칠일 대통령
박정희.'
물론 박정희 시대는 완전한
시민적 자유와 거리가 먼 독재 정권 시기였다. 이는 모든 계몽군주의 통치기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현상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에서 그랬듯, 국민의 평균 수명이 늘고 영양 상태가 개선되며 문맹률이 낮아지고 고등교육기관이
발전한다.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신장은 그런 물질적 성장을 채 따라잡지 못한다. 이에 국민 사이에 불만이 누적된다.
핵심은 박정희가 근대화 자체를 자신의 신념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자.
길을 뚫어야 하는데 '미신'에
사로잡힌 마을 주민들이 영험하고 신성한 나무를 지켜야 한다며 결사반대했다. 그러자 박정희의 명을 받들어 조국 건설에 한창이던
정주영 현대 회장이 직접 다이너마이트로 나무를 폭파하고 길을 뚫었다. 거침없는 근대화의 길 앞에 과거의 풍습과 전래의 신앙은 그저
폭파의 대상이었다. 박정희는 한국의 명절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추석과 설날을 없애기까지 했다.(물론 두 명절은 고속도로 건설
현장의 거대한 고목처럼 한방에 폭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오히려 신정(新正)이 사라지는 추세다.)
계몽군주를 다른 절대권력자와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화에 대한 집착 말이다. 계몽군주는 농노제를 폐지하고, 대학을 만들고, 수염이나 상투를
자르도록 하고, 국민에게 익숙지 않은 서구적 풍습을 도입하는 독재자다. 박정희도 그랬다.
박완서가 단편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에서 잘 그려냈듯 "박정희 정권 초기에 사회를 정화한답시고 관청이나 국영기업체에서 축첩한 자는 자진하여 사표를
쓰라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남자의 수가 적었다. 먹고 살만한 남자들이
첩을 거느리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었다. 박정희는 계몽군주로서 피지배층의 반감을 무릅쓰고 축첩제를 근절하기
위해 나섰다.
박정희는 진심으로 근대화를
추구했고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자신이 이룩한 근대화의 결과물인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재규의 돌발적인 박정희 암살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현장을 목도하고 심상치 않은 민심을 느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조국 근대화는 성공했다. 그리하여 더는 계몽군주를 용납할 수 없는 근대적 시민이 탄생했다.
‘지식 소매상'과 '용팔이' 사이
이 글의 목적은 박정희 예찬이 아니다. 계몽군주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유시민의
궤변과 달리 김정은은 21세기가 아니라 18세기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계몽군주는커녕 한낱 폭군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야말로
계몽군주의 엄밀한 개념에 부합한다. 조국의 근대화를 원했고, 성공했으며, 역사를 진전시킴으로써 자신이 만든 역사에 뒤쳐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역설까지 놓고 볼 때, 실로 그러하다.
유시민이 잘 말했다시피
계몽군주라는 말은 칭찬도 비난도 아니다. 특정 시기의 특정 독재자가 역사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느냐를 기술하는 표현일 뿐이다.
자칭 '지식 소매상' 유시민은 이른바 '용팔이'처럼 거짓말을 섞어가며 현란한 말솜씨로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김정은은 계몽군주가
아니며 박정희는 계몽군주의 역할을 해냈다. 우리는 그 유산과 부채를 모두 상속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때로는 더디고 뒷걸음질
치더라도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한 걸음씩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