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0

나무 심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뭉개버리네… 이것이 ‘국토 농단’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LH사태로 본 ‘공유지의 비극'

1913년, ‘나’는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알프스 산맥 속을 걷고 있었다. 라벤더만 듬성듬성 핀 삭막한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수통에는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 흔적은 있었지만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절망감이 커져갈 즈음 늙은 양치기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던 고독한 양치기는 식사 후 테이블에 앉아 도토리를 쏟아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는 좋은 도토리를 자루째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들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뚫고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그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부피에는 진심으로 그 일에 매진했다. 어린 가지와 잎사귀를 뜯어 먹어 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자 양을 팔아버리고 대신 벌을 치기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 산을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그 수십 년 동안 부피에는 꿋꿋하게 나무를 심었다. 숲이 자리를 잡자 말라붙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고 곤충과 동물이 찾아오면서 결국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1953년 작 <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이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이 1987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가 세계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을 푸른 숲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실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장 지오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오늘날 정치학, 경제학, 사회철학 등의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숲, 어장, 혹은 깨끗한 공기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자원을 떠올려보자. 내가 먼저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남이 잡는다. 어부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그런데 그 어장을 개인이나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와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이가 경쟁적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공유지는 망가지고 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 주민들은 숯을 구워 도시에 팔았다.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적으로 나무를 베었다. 화자인 ‘나’는 숲의 파괴에 대해 부피에와 대화를 나눈다. “난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공유지거나, 주인이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있는 땅 같다고 했다.”

부피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땅을 되살리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 조용한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숲이 저절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에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33년 산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1935년에는 정부 조사단이 숯 굽는 일을 금지했다. ‘나’는 감탄한다. “숲은 국회의원들에게조차도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 공동체의 힘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마저도 국가의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법 집행의 영향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건 결국 국가 몫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속 프랑스 정부가 되살아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고위 공직자들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허겁지겁 매입했다. 더 많은 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값비싼 묘목을 빽빽하게 심었다. 나무가 자라기는커녕 다 말라 죽어버릴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뽑아버리기 위해 심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검찰 개혁이니 검수완박이니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검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체 조사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여당은 공허한 특검 논의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소유권과 올바른 공권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는 법.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면서 ‘영농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땅에 농사를 짓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든가 해야 한다. 교양과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불법이 아니어도 하지 않을 일을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모는가. 누가 누구를 청산한단 말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영웅의 조용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들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 이후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늘리겠다며 산을 깎고 나무를 뽑아왔다. 농지 구입을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을 향해 ‘좀스럽다’고 쏘아붙였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뽑는 사람’인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일으킨 알프스의 화전민처럼,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정부 고위층은 경쟁적으로 게걸스럽게 땅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국토 농단’이다. 알프스의 숲이 저절로 살아나지 않았듯 부패한 권력이 알아서 반성하는 일은 없다. 우리 스스로 정치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건강한 도토리를 심어 나가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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