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헝거게임’을 통해 본 ‘참여연대 권력’의 시작과 끝
일러스트=안병현
어느 날 크나 큰 재앙이 닥친 후 북미 대륙은 수도인 ‘캐피톨’과 13개 구역으로 이루어진 판엠이라는 국가로 재편되었다. 오래전 반란을 일으켰던 13구역은 초토화되었고, 나머지 12개 구역은 오직 캐피톨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16세의 소녀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은 그중 가장 가난한 12구역에 살고 있다.
판엠에는 74년째 이상한 제도가 운영 중이다. ‘반란을 속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캐피톨을 제외한 전국 12개 구역에서 매년 12세부터 18세까지 남녀 한 쌍을 추첨해, 총 24명의 청소년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선수 추첨부터 단 한 사람의 승자가 살아남을 때까지 벌이는 살육전의 이름은 ‘헝거 게임’. 캣니스는 동생을 대신하여 헝거 게임에 자원한다.
헝거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24명중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 캣니스처럼 가난한 구역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모든 판엠 주민들은 원치 않아도 시청해야 한다.
자기네 구역 출신의 누군가가 이기라고 응원하고, 열광하고, 실망하면서. 가장 잔인하게 고안된 ‘빵과 서커스’인 셈이다.
대체 왜 이런 잔인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하는 걸까? 판엠의 독재자인 스노우 대통령은 설명한다. “겁주는 게 목적이면 24명을 모아놓고 몰살하는 게 낫잖아?” 헝거 게임의 목적은 공포가 아닌 희망이다. “두려움보다 강한 유일한 것이지. 단, 그것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가두어 둬야 해.”
미국
작가 수잰 콜린스의 소설 <헝거 게임>의 설정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또한 4부작으로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둔 바
있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맞서는 시위대가 영화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미얀마 국민들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며, 이 지면에서는 좀 더 깊은 논의를 해보도록
하자. 스노우 대통령이 말한 ‘헝거 게임’의 내용과 목적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의
작동 과정을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맞서 싸웠던
사람이다. 당시 많은 이는 자본주의와 불평등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정권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하는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 때로는 도리어 옹호하는가?
그람시는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와 그
밖의 ‘시민사회’를 구분했다. 시민사회는 교회, 언론, 학교, 지역 공동체 등 다양한 제도 및 삶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배계급은 국가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통해서도 지배한다. 심지어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게모니’다.
가령 무솔리니 정권에 불만이 있는 한 공장 노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잠재적 혁명분자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매주 성당에서 신부의 강론을 들으며 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국가’의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교회’의 설교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그중에서도
종교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희망을 주는 헝거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평생 자신이 태어난 구역에서
착취당하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젊은이에게 헝거 게임은 ‘인생 역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각 구역 출신 우승자가 ‘멘토’가 되어
출전자를 지도하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갖춰져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서 24명의 젊은이가 잘못된 체제와 싸우는 대신 자기들끼리 덫을 놓고 칼로 찌르며 화살을 쏜다. 판엠의 헤게모니는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다시 그람시로 돌아와 보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은
어지간해서는 혁명에 동참하지 않는다. 한 번에 세상을 뒤엎는 ‘기동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득하게 사람들 틈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때를 노리는 ‘진지전’을 펼쳐야 한다. 대중을 천천히 견인해나가는 전략이다.
헤게모니론과 기동전, 진지전은
한국의 운동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주사파 등 혁명을 꿈꾸던 세력과 달리 시민운동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쪽을 택한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김창엽, 성낙돈 교수의 논문 “헤게모니론 관점에서 본 시민단체 시민교육의 성격: 참여연대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시피, 참여연대는 그 ‘진지전’의 핵심 거점이었다.
참여연대는 조국이 주도한 사법 개혁 운동, 장하성의
소액 주주 운동, ‘재벌 저격수’ 김상조의 재벌 개혁 운동, 박원순이 이끈 부패 정치인 낙천 낙선 운동 등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피지배층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만한 권위를 축적한 것이다. 결국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참여연대는 문재인 정권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실세 집단으로 등극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 대한민국은 내로남불 부동산 천국이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은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면서 빚을 내 주식과 가상 화폐 투전판에 뛰어들고 있다. 근로소득만으로는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캐피톨’ 강남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온 나라를 헝거 게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캣니스는
헝거 게임에서 우승한다. 우승자로서 얻게 된 인기와 영향력을 바탕으로 혁명군에 동참하여 판엠의 헤게모니를 파괴한다. <헝거
게임>은 한 청년이 ‘진지전’을 벌여왔던 혁명군과 힘을 합쳐 ‘기동전’을 통해 잘못된 체제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교육, 언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는 저들 손에 넘어간 상태다. 자발적인
복종 상태에 빠진 이들은 여전히 단단한 결속력을 과시한다. 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강남좌파의 헤게모니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응징의 화살로 헝거 게임을 끝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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