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8

[캠페인] 지금, 세계문학전집을 읽읍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아주 잘 팔렸습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랑스 출판의 기틀을 닦은 가스통 갈리마르 평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령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 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 303-304쪽.

사회 활동의 제약이 있고, 가슴은 답답하고, 불평을 함부로 털어놓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런 상황. 그럴 때 2차 대전을 겪던 프랑스인들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고, 검증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죠.

21세기의 인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전에 Financial Times에서 본 보도에 따르면 COVID-19 발병 이후 중국의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 올랐다고 합니다. 다들 스마트폰 게임 아니면 유튜브, 혹은 SNS에서 뇌를 벅벅 긁으며 도파민을 쥐어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에코 체임버에 갇힌 채 답답해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일반적인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책장에도, 괜히 사두고 안 읽는 '세계문학 고전'이 한 두 권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읽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꼭 '세계 문학의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한참 전에 나온 책, 시간의 검증을 버텨낸 책, 그리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책을 우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지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그런 책 말이죠. 그럼 당연히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이런저런 소설들이 1순위로 거론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줄창 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둬서, 그럼 뭐 어쩔 건가요? 아이들은 시간이 남아 PC방에 가고 거기서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어른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웃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를 가고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인문주의자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단 하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읽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책과의 거리 좁히기' 입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식재료를 이번 기회에 털어 먹듯이, 책장 위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고전 소설들을 꺼내어, 읽읍시다.

사족) 저는 W. G. 제발트의 책 중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 <토성의 고리>는 한 번 읽었는데, <현기증/감정들>은 사놓고 아직 안 봤군요. 지금이 그것을 읽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각 나름대로 '아 이거 읽어야지 언젠가'의 리스트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에 적합한 시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댓글 4개:

  1.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 평소 책을 거의 안 읽다시피 하다가 갑자기 읽으려 하면 쉽지 않죠. 뇌에 독서를 위해 사용하는 근육이 전혀 발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팔뚝에 근육을 붙이기 위해서는 가장 가벼운 아령부터 드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듯이...처음부터 무리하게 무거운 아령(예;두꺼운 고전 명작소설)에 도전하면 실패하기 딱 좋죠. 독서 근육을 키우기 위한 가장 가벼운 아령중 하나는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추천 추리소설 리스트 중에 개인적으로 권할 만 하다고 판단되는 리스트를 아래에 링크합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어려운 시기에 멋진 근육 키우기에 성공하시길...

    http://blog.naver.com/jedai3000/220163192918
    http://blog.naver.com/jedai3000/220176995729
    http://blog.naver.com/jedai3000/22029096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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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쉬운 책부터 읽으면 좋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 게시물의 취지는 '새로운 책을 찾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을 읽자'이기 때문에, 쉽고 재미있는 새로운 책을 소개하기보다는 '책꽂이에 있는 그거, 생각보다 재미있고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추천작 리스트는 좋군요.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소수의 독자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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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몇 년 동안 낮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엔 개인적인 인문학 연구에 매진하다보니 오히려 '가벼운 책 읽기'에 소홀한 상태입니다.
    올해 들어 밥 먹을 때나 통근 시간을 이용해 맛폰으로 쟁여 둔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같은 종이책=흉기가 되는 어마어마한 장편보단 다양한 나라의 작가들의 단편을 읽으니 짧은 텀에 많은 서사를 즐길 수 있어 유익합니다.

    특히 세계 공통의 격변기인 19세기말 20세기초의 작품들은 어느 나라 작가의 것이든 빗나가지 않고 흥미진진합니다.
    시대정신이 반영된 작품뿐 아니라 실험 정신에 의거하여 쓰인 독특한 작품들도 많습니다.
    여러 출판사의 문학전집이 있지만 굳이 콕 집어 추천하자면 얼마 전 창업주 전병석 회장이 타계한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선이 좋습니다. '양서 번역의 선구자'라는 평가답게 당시 전병석 회장의 돌봄을 받은 번역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참 작품 선택의 안목이 탁월합니다.

    한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도 여전히 나오고 있어 국내 번역 시장에 기여하는 바가 커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음사판 '롤리타'는 종이책으로 소유 중인 몇 안 되는 번역소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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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개인적으로 을유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아끼는 편입니다. 도저히 팔릴 가능성이 없는 책들을 내주는데, 고맙죠. 이미 한 차례 냈던 지난 전집에 포함된 잘 팔리는 타이틀을 내지 않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한 것도 그렇고요. 을유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윤혜준 교수 번역 [로빈슨 크루소]가 문득 떠오르네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작품들이 어느 나라건 흥미진진하다는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그렇죠. 지금과는 다른, 영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고, 그래서 사회주의 운동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니까요. [자본]이라는 책도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고 말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야 여러권 가지고 있고 [롤리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잘 살펴본 적이 없네요. 말 나온김에 온라인 서점에서 둘러봐야 하겠습니다.

      전자책에 대해 저는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책을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전자책은 애초에 '책'이 아니라 '책 서비스'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지를 따지면 종이책이 상대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죠.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그걸 사용자가 잘 절충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좋은 리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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