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

2017-03-28

[북리뷰] 전쟁의 문헌들, 평화를 위해 읽는다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열린책들, 2만8천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문헌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문헌을 통하여 한 민족 또는 시대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그 연구의 대상이 꼭 협의의 '문화'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에 있어서도 문헌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김시덕의 책 『전쟁의 문헌학』을 펼쳐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이 책은 15~20세기까지 6세기에 걸쳐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문헌이 형성되고 주변 국가로 전래되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 전쟁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결과물이다."(5쪽)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지성 교류사를 전쟁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독자'보다는 문헌학이나 역사학 등에 기존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쫓아갈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추리물같은 즐거움이 있다. 가령 조선에서 출간된 『동국통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책을 당대의 장서가 하야시 라잔의 가문에서 재출간하여 『신간동국통감』이 일본에 유통되는데, 하야시 라잔의 차남 하야시 가호가 쓴 서문이 문제가 된다.

그는 『동국통감』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고대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잘못된 책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기반해 조선의 책을 비판한 그러한 관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통설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동국통감』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논박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건너간 책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정당화 논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 내부로부터 비판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문과 결론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청이나 일본과 달리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200여년을 보냈다. 청은 준가르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과의 교역과 군사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학술과 군사라는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병존 가능한 것이고 또 병존해야 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367쪽).

반면 조선인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의 권12에 실린 두 편의 '일본론'을 통해 일본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명인'이 되어서 더는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물론 말년에는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으나,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지 오래인 그의 주장은 조선이 빠져 있던 기나긴 평화의 단잠을 깨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문헌학』은 특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문헌학적 논의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책을 불태우지만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쟁의 문헌'들을 더 치열하게 쓰고 읽은 쪽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

2017-03-19

[별별시선] 태어나고 싶은 나라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를 만든다 해도 내가 그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의 장막'이 쳐져 있다면, 사람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존 롤스의 생각이었다.

무지의 장막을 쳐놓고 대한민국을 검토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본인에게 어떤 조건이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자신의 성별, 성정체성, 신체적 장애, 부모의 재산, 교육, 가정환경, 신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말이다.

무지의 장막에 싸여진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을 낳는 원인이다. 게다가 여자로 태어나면 내 엄마가 겪고 있는 차별이 내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확률은 반반이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 한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라면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결혼 등 동등한 법적 제도를 누릴 수 없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되는데, 일단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경제적 궁핍을 각오해야 한다. 고소득 정규직 혹은 전문직이 된다 한들 워낙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다면 그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론조사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6년 1월에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 1000명 가운데 30.2%에 지나지 않았다. 11.9%는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유보했고 57.9%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69.0%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꿈꿔보았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마음 속에서 이 나라를 버린 것이다.

출산율이 낮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론 수준'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자,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탈조선'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려왔던 사람들조차 자기 자식은 '탈조선' 시키겠다며 온갖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지탄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수십년에 걸쳐 대한민국에 '빨대'를 꽂아온 최순실 일당의 목적도 결국은 '탈조선' 아니었던가?

이 땅에 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지키고, 일구고, 가꾸고, 이루어내고,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야 하는지, 무지의 장막 너머의 아기를 설득해낼 수 있는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입력 : 2017.03.19 19:37:00 수정 : 2017.03.19 23:29:07

2017-03-16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2017-03-14

[북리뷰] 역사의 회색지대를 관통해 온 그들의 문학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
김윤식, 소명출판, 1만8천원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보자. "내외 조선인 전문·대학생 4,395명이 일제히 입영한 것은 1944년 1월 20일이었다."(11쪽) 당시 조선인 전문·대학생의 총 숫자는 7천여 명이었으나, 일부는 이공계거나 사범계이기에, 또 일부는 일부러 징집을 피해 도망갔기에, 4,395명이 징집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부족한 병역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일본과 조선의 대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학병'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병들은 다양한 출신지와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 가문이란, 다양하겠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자식을 대학에 다니게 할 만큼 상류층에 속했음을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15쪽)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가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전했던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4.19 세대가 그랬다. "순종 한글세대인 이른바 4.19세대는, 그들의 순수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제로상태에서 출발했다고 자부"(67쪽)하면서, 이전 세대의 업적 뿐 아니라 문제의식까지도 단숨에 밀어내버렸다. 작가 및 비평가의 숫적으로, 그들이 생산해내는 원고의 양적으로, 4.19 세대는 압도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새로운 세대는, 책에 인용된 김현의 말마따나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69쪽)은 채 오늘까지 한국의 문학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여진 책이다. 첫째, 이병주와 선우휘라는 두 명의 작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학병세대의 존재를 되새기며 그들이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지 검토한다. 둘째, 학병세대에 속하는 가상의, 현실의 인물들을 통해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과제를 두고 평생을 싸워온 김윤식 본인의 학문적 궤적을 반추한다. 셋째, '일본 전후 지성계의 천황'인 마루야마 마사오를 학병세대에 속하는 한 사람의 일본 지식인으로 정의한 후, 그의 영향력 하에 전개되어온 일본 및 한국 지성사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 책은 세 번째 주제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주제는 김윤식의 다른 책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서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 문제는 첫 번째 화두다. 일본인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간 후 학병세대는 각자 나름의 각성을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을 경험한 후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친일파냐 독립군이냐'같은 너무도 단순한 구도에만 매몰되어, 어떤 세대는 그런 고민을 동남아시아나 만주의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함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 역사 속 회색의 시공간을 관통해온 이들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망각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학병세대는 그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기에 이후 세대들에게 문학적으로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었다. 그러한 선택적 망각은 정당한가. '순수한 민족의식'은 얼마나 순수한가. 김윤식은 우리에게 묻는다. "학병세대의 글쓰기를 건너뛰고도 한국문학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67쪽)

2017.03.14ㅣ주간경향 12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