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2

황교익의 레퍼런스, 『맛의 달인』

『맛의 달인』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최고의 맛을 찾아 나선 신문사 기자 지로와 미식가인 아버지 우미하라가 요리 대결을 펼쳐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지로와 우미하라가 닭고기 요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되면, 먼저 서로 가장 맛있는 닭고기부터 찾는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닭고기는 좁은 닭장에서 인공 사료를 먹이며 대량 사육되는 닭임을 확인시켜주고, 진짜 맛있는 닭고기는 자연 상태에서 천연 사료를 먹고 자라는 닭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후 닭고기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을 연구하고 시식회를 열어 우열을 가린다.

몇 해 전 『맛의 달인』을 탐독하면서 지로 방식으로 맛의 세계를 깨쳐나가기로 작심하고 음식 재료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다. 가령 '최고의 김치'를 상정하고는 그 작품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 황교익, 『소문난 옛날 맛집』(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25쪽. 강조는 인용자.

황교익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시피, 그의 '미식'은 일본 만화 보고 배운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책에 직접 써 놓은 내용이다.

2018-07-23

미 에너지국: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옮긴이의 말: 미 에너지국(Department of Energy)의 차장인 댄 브리예트가 발표한 게시물을 번역합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energy.gov/ne/articles/it-s-time-world-recognize-nuclear-clean-energy-source 세계는 탈원전과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모두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며 건강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2018년 5월 21일

금주, 저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9차 클린에너지장관회의(Clean Energy Ministerial)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전지구적 청정 에너지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정책과 프로개램을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촉진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에너지 관련 고위직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릭 페리(Rick Perry) 미 에너지부 장관이 지난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청정 에너지"의 개념 정의에 원자력 에너지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원자력은 탄소 배출량이 적은 순서대로 놓고 볼 때 2위로, 오직 수력발전소만이 원자력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습니다.

만약 세계가 진지하게 탄소 배출량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싶다면, 각국의 장관들은 모든 선택지를 검토해야만 합니다. 깨끗하고 신뢰도 높은,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인 원자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NICE 미래 계획

미국, 캐나다, 일본은 원자력 혁신: 청정 에너지 미래 계획(Nuclear Innovation: Clean Energy (NICE) Future initiative)을 출범합니다.

미래의 발전된 청정 에너지 시스템과 혁신을 위한 논의의 장에 원자력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혁신적인 원자력 시스템은 전지구적인 탈탄소화(decarbonization)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높은 밀도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장비를 포함합니다.

  • 담수화
  • 산업 내에서 사용되는 열 에너지의 처리
  •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의 복합 시스템
  • 유연한 전력망
  • 수소 생산
  • (열, 전자, 화학적) 에너지 저장

NICE 미래 에너지 계획은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12개국 이상이 참가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 중요한 계획에 다른 국가들도 참여해야 할 때입니다.

원자력의 깨끗한 힘

이미 전 세계 30개국에 449개의 상업용 원자로가 운용중입니다. 종합해보면 이 원자로들은 전 세계 에너지의 11퍼센트 가량을 제공합니다. 그 모든 에너지가 깨끗하고도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99개의 원자로가 전체 전력량 중 20퍼센트를 생산하며, 이는 전체 청정 에너지 가운데 56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은 1995년부터 2016년까지 1400억톤 분량의 탄소 배출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30억 대의 차량을 없앤 것과 동일한 효과라 하겠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청정 에너지를 논의하는 장에 원자력의 설 자리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협력의 힘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있어서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습니다.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페리 장관이 천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경제를 발전시키느냐 환경을 보호하느냐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접근법은 기술 혁신을 불러오고, 우리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환경을 보호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력은 깨끗하며, 신뢰도 있고, 탄력성을 갖춘 에너지원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연이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클린에너지장관회의에서 원자력을 포함하는 것은 이 기술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될 것이며, 전 세계의 우리 동맹국들에게 효용을 안겨주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해 없는 미래를 그리는데 있어서 모든 청정 혁신 기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미래(NICE Future)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모두 함께 힘써야 합니다.

나이스 미래 계획에 대해 더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댄 브리예트(Dan Brouillette)

댄 브리예트는 미 에너지국의 차장입니다.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에너지와 관련하여 30여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8-03-11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서동진의 이론적 왜곡에 대하여

서동진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본인이 페이스북에 쓴 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나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옹호하면서 미투에는 반대하는 그런 일관성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적인 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글 덕분에 우리는 서동진의 생각을, 혹은 서동진으로 대변되는 '남성 좌파 지식인'들의 성폭력 고발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동진이 쓴 글로 돌아가보자. 이 글의 취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폭력'에 모종의 특수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발로서의 미투 고발과 연대가 '피억압자의 정당한 폭력'에 귀착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소리다.

일단 우리는 '정당한 폭력'의 논의가 좌파 진영에서 대체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그들은 벤야민과 아감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인용하는 지젝의 논의에 힘입어 폭력을 옹호한다. 자본가들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 노동자를 탄압할 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생산수단을 파괴하며 경찰 등 '자본의 하수인'에게 육체적 피해를 입히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벌어져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정권이 '인민의 적'을 처단하는 과정에도 당연히 동원될 폭력을 미리부터 정당화하고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하자. 중요한 것은 한국의 좌파들이 '저항으로서의 폭력' 혹은 '신적 폭력' 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의를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해왔다는 데 있다. 서동진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을 통해 우리는 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동진 같은 좌파들이 무언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경멸한다. 요컨대 '폭력 시위는 절대 안 된다'거나, '도로교통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 시위는 엄단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에 그는 결사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것은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의 도입 부분이다. 그 이후로 몇 문단에 걸쳐 '폭력'에 대한 멋지구리한 '성찰'이 이어진다. 몇 대목 쭉 인용해보자.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난데없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정치철학의 테마로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 에티엔느 발리바르의 제법 오랜 시간 동안의 사색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 그는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자본주의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이들엑[sic.] 가장 중대한 질문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려 할까. 왜 지금 대치시키고 토론해야 할 인물은 레닌과 간디일까?", "해방적인 열정으로서의 폭력과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반동적인 폭력을 엄격히 나눌 수는 없을까. 예수의 폭력성과 나치즘의 폭력성을 분할할 기준은 없을까."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서동진은 억압당하는 자의 폭력만큼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옹호할 태세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미러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서도, 그 언어의 날선 에너지에 대해서도 응당 옹호해야 할 듯 싶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그렇지 않다. '폭력'와 '혁명'에 대한 서동진의 우아한 성찰은, 그 분노와 증오의 에너지가 '남성 일반'을 향하는 순간, 딱 멈춰선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의 방향을 뒤틀어버리는 것이다.

미투운동에서 폭력성은 결정적인 쟁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투운동에서 쟁점은 성폭력이란 점을 간과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호도한 채 성적 지배를 막연하게 나쁜 짓으로서의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강조는 인용자)

밑줄과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서동진은 '성폭력'을 '폭력'과 구분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동진과 좌파 진영의 논의 속에서 폭력은 둘로 구분된다.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 그가 속한 좌파 진영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자면 지배자의 폭력 역시 '존재론적 당위'까지 부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배자의 폭력은 비판하고 피지배자의 폭력은 옹호한다.

그렇다면 서동진 같은 좌파가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방법은 둘 뿐이다. 첫째, 여성을 피억압자가 아니라 억압자의 위치에 놓는 것. 둘째, 여성에게 향하는 남성의 폭력, 남성을 향하는 여성의 분노를 그가 옹호하는 (이론적) '폭력'과 다른 무언가로 치부해버리는 것. 주지하다시피 첫번째 방법은 주로 '남성연대' 따위 반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 그들은 남자들이 '역차별' 당하는 세상이라고 울부짖으며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동진은 반면 두 번째 길을 택했다. 어떻게?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 인용한 문장 뒤로는 다음과 같은 비문(非文)이 이어지고 있다. "그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성폭력을 저지른 점을 무시하고 용서하는 나쁜 짓이라는 게 나는 한결같이 생각한다."[sic.] 숙달된 저술가가 비문을 내지르는 것은 그의 무의식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Freudian slip?). 그는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면, 해당 악행을 저지른 자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점을 무시하게 된다고, 그것은 결국 용서로 이어지게 되며 따라서 나쁜 일이라고 한결같이 생각해온 듯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서동진에게 있어서 성폭력이란 '폭력'만큼 즉각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폭력 그 자체보다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을 더 문제적으로 받아들인다. 믿기 어렵지만 서동진 본인이 블로그에 그렇게 써 놓았다. 물론 그는 곧이어 "가해자, 그를 은밀하게 혹은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온당하고 또 지지할 수 있다"고 면피성 발언을 하지만, 이미 속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서동진은, 가령 안희정같은 성폭력 가해자를, 노동조합 파괴 공작을 일삼아온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 같은 자본폭력의 가해자와 같은 비난의 강도로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성폭력범이지만 후자는 자본을 동원한 폭력행위를 지휘한 사람으로, '성폭력'과 '폭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이 논리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이것은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는 고전적 부르주아 가정경제(및 착취 구조)를 지탱해오던 양대 궤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서구권에서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남편에게는 부인을 '계도'할 권리가 주어져 왔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강간 피해자는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모두의 평온한 삶을 위해 피해를 고발하지 말아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부르주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두 개의 착취 논리다.

서동진이 좌파인 만큼 마르크시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교집합을 이루는 가장 깊은 뿌리에는 엥겔스의 책 한 권이 파묻혀 있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 그것인데, 주지하다시피 엥겔스의 논지는 명확하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같은 배에서 나온 다른 자식이거나, 심지어 같은 놈인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논의를 전제할 때, 어떤 '좌파 이론가'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미군 기지촌에서 벌어진 대한민국의 자국민에 대한 성적 착취와, 경제 개발을 위해 노동운동을 짓밟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에 대해 폭력을 저지른 것이며, 그에 맞선 운동권들 역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회 속에서 강간, 성폭행, 성추행, 다양한 성적 억압을 통한 직업적 차별과 배제 등을 겪어온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만큼은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 외에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는 서동진의 '이론적' 해석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의 저항의 의의마저도 변질시킨다. 노동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할 때, 서동진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사법을 이용하여 '이미 벌어진 일'을 정당화하려 든다. 하지만 여성들이 분노하고, 시위하고, 목청을 높이면, 그것은 좌파가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폭력'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러한 논리 구조 위에서 서동진은 '미투 운동'과 연대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상식에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는 폭력이라는 절망적인 주장에 기울어진 채 그 폭력의 해방적인 윤리를 보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여섯 글자로 줄이면 '착한 페미니즘' 아닌가? 그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2018년 3월 11일 현재의 대한민국 속에서, 존재하는가? 성폭력 고발은 좋지만 너무 심하게 하면 듣는 남자들 기분 나쁘니까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해달라는, 남성 지배 사회의 요구다. 그것이 동성애 인권 운동가이며 이론가인 한 남자의 입에서 반복되고 있다.

성폭력은 폭력이다. 그것은 삐뚤어진 사랑도 아니고 굴절된 성애도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수십년에 걸쳐 목숨 걸고 싸워왔고 그 투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성들의 분노가 쏟아지는 와중에, 여성들에게 현장 지도를 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영탄조로 내뱉는 것이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 곱씹을수록 다양한 의미에서 기가 막힌 문장이다. 나는 저 말을 이렇게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페미니즘을 이론적 비판으로 대체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철학의 정치화, 정치의 철학화에 대한 벤야민의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결국 벤야민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르주아 사회를 배신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옹호했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서동진은 남성 지배 구조를 배신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본국'과 '변방'의 차이가 아닐런지, 문득 아무말이나 떠올리며 이 글을 닫고자 한다.

2018-01-14

'흙수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말라?

대체 어떤 악마가 '흙수저들의 자수성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은 그와 정 반대다. '흙수저'를 보호하려면 소위 '암호화폐' 거래를 규제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하고, 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돈은 액수가 같아도 가진 사람에 따라서 절대 같은 돈이 아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쪼들린 적 없이 자란 청년이 친척들로부터 넉넉하게 받아온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만든 500만원을 생각해보자. 날려먹어도 큰 상관이 없는 돈이다. 잘 사는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들한테 '투자 경험'을 안겨준다며 일부러 과하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더라. 그런 돈은 아무리 유입되어도 큰 문제가 될 건 아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열풍에 귀가 팔랑거린 빈곤계층 청년이 월세방 보증금을 빼온 500만원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 돈이 사라지면 그의 월세방도 사라진다. 주거의 질이 급감하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더 나쁜 경우는 없는 돈 끌어모아 '가즈아~'에 동참한 경우.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거나, 기타등등. (회사 공금을 끌어다가 비트코인에 넣었는데 값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는 인터넷 게시물 캡쳐를 본 적도 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해둘만한 사안이다.)

이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흙수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우스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 아예 부자들은 돈을 날려도 된다. 하지만 가난하면 애초에 그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정권은, 청와대는, 그리고 코인판이 계속 이렇게 규제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또 잔인하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코인판에 갖다 부은 청년들이 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걱정되지도 않나?

처음부터 이건 돈놀이판이었다. 그냥 웃기는 장난으로 취급되던 비트코인이 진지하게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의 창업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여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가 '제미니'(라틴어로 쌍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거래소를 만들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 엉터리 아나키즘적인 몽상은 어엿한 투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흙수저도 윙클보스 형제처럼 '존버'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흙수저'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먹어서 인생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짓이다.

대체 대한민국의 국격이 어디까지 후퇴하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무슨 정당한 논의인 양 언론에 오르내리고 정치인이 왈가왈부하기에 이르렀는가? 자기 돈 갖다 박아서 한탕 하건 쪽박 차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게 마치 정당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인 양 포장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모두 망가져가고 있는 듯하다.

2018-01-06

〈1987〉은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인가

나는 〈1987〉이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586세대가 내뱉는 승리의 함성과도 같은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온당히 받았어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허구의 서사를 창작하는 일에 대한 인식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적인 현상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여성 캐릭터에 대해 내린 판단을 보다 정확히 서술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픽션을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시점에서만 '현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있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대신 남은 것은 '그 모든 민중'의 대변자인 연희(김태리 분)라는 '순수한 여대생' 뿐이다.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가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의 한 대목.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이우정 제작자도 그러한 인물 배치를 순순히 인정한다.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요컨대 연희는 도구적 인물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혹은 직·간접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남성들에게는 '시위 현장에서 마주쳤던 것도 같은 아련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 87년 6월 항쟁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예정대로 작년 12월이 대선이었다면 '역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계속 훈계를 들었을 젊은이들에게는, 쉽사리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 요컨대 피와 살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아닌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좋은 캐릭터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면으로부터의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할 때, 배우 김태리의 단정한 용모와 선을 넘지 않는 연기 톤이 조화를 이루어 기대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연희가 '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학 새내기인 그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연희가 할 일은 그저 눈을 뜨고 거리에 나가 버스에 올라 깃발을 휘두르는 것 뿐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세상을 낳기 위해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존재로 설정된 연희 말고는, 유의미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씨네21〉 인터뷰를 통해 확인하고 나니, 나도 이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6월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배우 문소리씨다. 어떤 역할이든 캐스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배역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목소리만 썼다. <1987>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조금 더 조화롭게 여성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볼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우리는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이 대답은 실로 문제적이다. 감독은 "팩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드라마적으로 윤택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서, "한병용 같은 경우 실제로 편지를 빼내오고 전달한 교도관은 두분이었는데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쳤다"라고까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은 극적 긴장감을 위해 실존인물 두 명을 하나로 합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운동권 여성 캐릭터 한 두 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교회건 절이건 성당이건 운동권이건, 어떠한 신념에 기반한 조직이 작동하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제공하는 이들 중 상당수, 때로는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공식 기록에 충실하려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애초에 그 공식 기록으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을 끌어안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는 그러한 효과를 알면서도 선택을 했다. 현실 속에 존재했던 두 사람의 교도관을 하나로 합칠 때에는 '극적 재미'를 앞세우던 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내지는 않으면서 그 핑계로 '팩트'를 들이댄 것이다.

역사의 악역은 거의 모두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권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는 남녀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선한 역할에는 남성과 여성이 고루 포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싸움이 승리로 기록되건 패배로 기록되건, 역시 기록하는 자는 남성적인 시각을 전제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혹은 숫제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정착 과정에서 예수가 부활한 빈 무덤을 처음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어떻게 축소되었는지,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은 왜 남아있지 않은지, 대신 우리가 아는 것은 12명의 남자 제자들 뿐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남자들끼리 뭉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여성들의 힘을, 마치 1단 로켓처럼 소진시켜버린 후 떨궈버리기 일쑤였다.

〈1987〉의 제작진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에 여성의 이름이 부족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건 조금만 생각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도 뻔한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해도 어차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사화가 이루어지지만, 특히 픽션을 창작하는 중이었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의미에서건 (왕년의?) '운동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1987〉에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야 했다. 선량한 교도관의 수더분한 누이, 시대적 각성을 하는 주인공과 덩달아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는 날라리 친구 같은 기능적 인물 말고, 그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유의미한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 '팩트'로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것, 그게 바로 픽션의 임무 아닌가?

역사는 전두환, 노태우, 박처원, 박종철, 이한열, 이부영, 김정남, 함세웅 등의 이름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밥을 먹었고 세탁된 옷을 입었다. 그러한 돌봄노동은 자연스럽게 운동권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문건을 쓰고 몰래 인쇄하고 뿌리며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여성들이었고, 심지어 남자 운동권들의 자기 서사화와 달리, 여자들이야말로 용맹하게 돌을 던지고 전경들에게 얻어맞아가며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런 기록의 부재를 〈1987〉의 제작진은 '팩트'로 받아들여, 영화로 만들었다.

이런 이중적 기준 앞에 나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자들을 픽션의 세계에서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 길게 말을 이어봐야 중언부언일 수밖에 없으니 시 한 편을 인용하면서 끝내도록 하자. 우리는 역사를 이런 식으로 기억해서도 안 되며, 이런 식으로 서사화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