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본인이 페이스북에 쓴 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나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옹호하면서 미투에는 반대하는 그런 일관성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적인 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글 덕분에 우리는 서동진의 생각을, 혹은 서동진으로 대변되는 '남성 좌파 지식인'들의 성폭력 고발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동진이 쓴 글로 돌아가보자. 이 글의 취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폭력'에 모종의 특수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발로서의 미투 고발과 연대가 '피억압자의 정당한 폭력'에 귀착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소리다.
일단 우리는 '정당한 폭력'의 논의가 좌파 진영에서 대체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그들은 벤야민과 아감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인용하는 지젝의 논의에 힘입어 폭력을 옹호한다. 자본가들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 노동자를 탄압할 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생산수단을 파괴하며 경찰 등 '자본의 하수인'에게 육체적 피해를 입히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벌어져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정권이 '인민의 적'을 처단하는 과정에도 당연히 동원될 폭력을 미리부터 정당화하고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하자. 중요한 것은 한국의 좌파들이 '저항으로서의 폭력' 혹은 '신적 폭력' 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의를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해왔다는 데 있다. 서동진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을 통해 우리는 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동진 같은 좌파들이 무언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경멸한다. 요컨대 '폭력 시위는 절대 안 된다'거나, '도로교통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 시위는 엄단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에 그는 결사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것은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의 도입 부분이다. 그 이후로 몇 문단에 걸쳐 '폭력'에 대한 멋지구리한 '성찰'이 이어진다. 몇 대목 쭉 인용해보자.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난데없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정치철학의 테마로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 에티엔느 발리바르의 제법 오랜 시간 동안의 사색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 그는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자본주의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이들엑[sic.] 가장 중대한 질문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려 할까. 왜 지금 대치시키고 토론해야 할 인물은 레닌과 간디일까?", "해방적인 열정으로서의 폭력과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반동적인 폭력을 엄격히 나눌 수는 없을까. 예수의 폭력성과 나치즘의 폭력성을 분할할 기준은 없을까."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서동진은 억압당하는 자의 폭력만큼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옹호할 태세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미러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서도, 그 언어의 날선 에너지에 대해서도 응당 옹호해야 할 듯 싶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그렇지 않다. '폭력'와 '혁명'에 대한 서동진의 우아한 성찰은, 그 분노와 증오의 에너지가 '남성 일반'을 향하는 순간, 딱 멈춰선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의 방향을 뒤틀어버리는 것이다.
미투운동에서 폭력성은 결정적인 쟁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투운동에서 쟁점은 성폭력이란 점을 간과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호도한 채 성적 지배를 막연하게 나쁜 짓으로서의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강조는 인용자)
밑줄과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서동진은 '성폭력'을 '폭력'과 구분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동진과 좌파 진영의 논의 속에서 폭력은 둘로 구분된다.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 그가 속한 좌파 진영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자면 지배자의 폭력 역시 '존재론적 당위'까지 부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배자의 폭력은 비판하고 피지배자의 폭력은 옹호한다.
그렇다면 서동진 같은 좌파가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방법은 둘 뿐이다. 첫째, 여성을 피억압자가 아니라 억압자의 위치에 놓는 것. 둘째, 여성에게 향하는 남성의 폭력, 남성을 향하는 여성의 분노를 그가 옹호하는 (이론적) '폭력'과 다른 무언가로 치부해버리는 것. 주지하다시피 첫번째 방법은 주로 '남성연대' 따위 반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 그들은 남자들이 '역차별' 당하는 세상이라고 울부짖으며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동진은 반면 두 번째 길을 택했다. 어떻게?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 인용한 문장 뒤로는 다음과 같은 비문(非文)이 이어지고 있다. "그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성폭력을 저지른 점을 무시하고 용서하는 나쁜 짓이라는 게 나는 한결같이 생각한다."[sic.] 숙달된 저술가가 비문을 내지르는 것은 그의 무의식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Freudian slip?). 그는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면, 해당 악행을 저지른 자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점을 무시하게 된다고, 그것은 결국 용서로 이어지게 되며 따라서 나쁜 일이라고 한결같이 생각해온 듯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서동진에게 있어서 성폭력이란 '폭력'만큼 즉각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폭력 그 자체보다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을 더 문제적으로 받아들인다. 믿기 어렵지만 서동진 본인이 블로그에 그렇게 써 놓았다. 물론 그는 곧이어 "가해자, 그를 은밀하게 혹은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온당하고 또 지지할 수 있다"고 면피성 발언을 하지만, 이미 속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서동진은, 가령 안희정같은 성폭력 가해자를, 노동조합 파괴 공작을 일삼아온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 같은 자본폭력의 가해자와 같은 비난의 강도로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성폭력범이지만 후자는 자본을 동원한 폭력행위를 지휘한 사람으로, '성폭력'과 '폭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이 논리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이것은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는 고전적 부르주아 가정경제(및 착취 구조)를 지탱해오던 양대 궤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서구권에서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남편에게는 부인을 '계도'할 권리가 주어져 왔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강간 피해자는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모두의 평온한 삶을 위해 피해를 고발하지 말아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부르주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두 개의 착취 논리다.
서동진이 좌파인 만큼 마르크시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교집합을 이루는 가장 깊은 뿌리에는 엥겔스의 책 한 권이 파묻혀 있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 그것인데, 주지하다시피 엥겔스의 논지는 명확하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같은 배에서 나온 다른 자식이거나, 심지어 같은 놈인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논의를 전제할 때, 어떤 '좌파 이론가'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미군 기지촌에서 벌어진 대한민국의 자국민에 대한 성적 착취와, 경제 개발을 위해 노동운동을 짓밟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에 대해 폭력을 저지른 것이며, 그에 맞선 운동권들 역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회 속에서 강간, 성폭행, 성추행, 다양한 성적 억압을 통한 직업적 차별과 배제 등을 겪어온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만큼은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 외에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는 서동진의 '이론적' 해석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의 저항의 의의마저도 변질시킨다. 노동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할 때, 서동진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사법을 이용하여 '이미 벌어진 일'을 정당화하려 든다. 하지만 여성들이 분노하고, 시위하고, 목청을 높이면, 그것은 좌파가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폭력'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러한 논리 구조 위에서 서동진은 '미투 운동'과 연대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상식에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는 폭력이라는 절망적인 주장에 기울어진 채 그 폭력의 해방적인 윤리를 보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여섯 글자로 줄이면 '착한 페미니즘' 아닌가? 그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2018년 3월 11일 현재의 대한민국 속에서, 존재하는가? 성폭력 고발은 좋지만 너무 심하게 하면 듣는 남자들 기분 나쁘니까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해달라는, 남성 지배 사회의 요구다. 그것이 동성애 인권 운동가이며 이론가인 한 남자의 입에서 반복되고 있다.
성폭력은 폭력이다. 그것은 삐뚤어진 사랑도 아니고 굴절된 성애도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수십년에 걸쳐 목숨 걸고 싸워왔고 그 투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성들의 분노가 쏟아지는 와중에, 여성들에게 현장 지도를 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영탄조로 내뱉는 것이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 곱씹을수록 다양한 의미에서 기가 막힌 문장이다. 나는 저 말을 이렇게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페미니즘을 이론적 비판으로 대체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철학의 정치화, 정치의 철학화에 대한 벤야민의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결국 벤야민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르주아 사회를 배신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옹호했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서동진은 남성 지배 구조를 배신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본국'과 '변방'의 차이가 아닐런지, 문득 아무말이나 떠올리며 이 글을 닫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