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갈등의 범위를 단지 '숫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츠슈나이더가 보기에 기득권층은 갈등을 사사화(私事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약자들은 문제를 사회화(社會化)함으로써 갈등 내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우리가 흔히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기동들을 한데 묶어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매우 중요한 문단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에 관한 문헌들을 훑어보면, 정말이지 갈등의 사사화와 갈등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상반된 경향들 간의 오랜 투쟁을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이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주의, 기업 활동의 자유, 지방주의, 사생활 보호, 재정 지출의 축소와 관련된 이념들의 긴 목록은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혹은 공적 권위를 사용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갈등은 사적인 영역 내에 묶어 두는 방식으로 통제되었고, 그래서 갈등이 가시화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를 다룬 문헌에서 이런 전략에 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적 설명도 이런 이념들과 갈등의 범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갈등의 사사화는 이와는 다른 근거에서 정당화되었다.[48-49쪽](굵은 글씨는 원저자, 밑줄은 인용자 강조)
E.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반면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는 정치적 주제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뒤이어지는 문단을 살펴보자.
다른 한편, 갈등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일련의 이념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들 이념은 갈등을 전염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외부자들을 갈등에 참여시킴으로써 그 이전까지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적 권위에 호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49쪽](밑줄은 인용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르르 달려드는 이른바 '팩트 골룸'들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된다. 팩트 골룸들은 당장 '구경꾼'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사회적'으로 소화되어야 할 이슈를 '사사화'하는 것이다.
가령 쌍용자동차 공장 농성자들이 며칠 더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음용수를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팩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이슈에 반응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알고 보면 먹을 거 많았대요~!' '노조 지도부는 먹을 것을 안 나눠주고 있었대요~!' 이런 떡밥에 반응하는 '구경꾼'들은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쇄말한 팩트의 차원으로 끌어내려버리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그런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먹고사니즘'은 갈등을 사회화하는데 기여할까, 아니면 사사화하는데 기여할까? (나는 그것을 '매 사안마다 '먹고 산다'는 말로 지칭되는 막연한 생계 혹은 소득의 문제를 들먹이는 담론 구조'로 이해하고 있지만) 아직 '먹고사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사안에 한정지어서 물어보자. 진중권의 중앙대 해임 사건을 놓고 '그래도 먹고 살만 하대요...'라고 말하는 것은 진중권과 중앙대의 갈등, 혹은 진중권과 정부의 갈등이 사회화되는데 과연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될까?
다들 짐작하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사회화하고 싶다면, 샤츠슈나이더의 말마따나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을 언급해야 한다. 설령 진중권이 겸임교수 및 시간강사 자리에서 모두 잘려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해도, 이 이슈를 사회화함으로써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면 '진중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식으로 가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중앙대는 '대학(=기업) 활동의 자유'를 근거로 들어 그를 해임했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갈등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중권 본인이 겸임교수로 버는 돈이 얼마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어차피 먹고 사는 문제에 지장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 오히려 진중권의 그 발언을 통해 이 사건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게 된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순수하게 '부당한 해임', '정치적 외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침 진중권의 당당한 수입 공개를 통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 인터넷 논자들은 도리어 그 발언을 토대로 이 사건을 사사로운 일로 언급하기에 급급했다.
이명박을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 대신 '진중권은 먹고사는 일에 문제 없다 오바' 같은 소리가 난무한 이유 또한 역시 '사사화'에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저는 진중권에 대한 정보를 당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사마 끄떡 없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이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당위와 충돌하였는데, 적지 않은 인터넷의 논자들은 그 욕망에 굴복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덕분에 진중권이라는 거물이 정말 시덥잖은 일을 당하는 지경에 몰렸지만 아무도 그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좆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작 총대를 매고 나선 것은 그의 수업을 듣던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비겁하다고 나약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던 20대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중앙대는 문자메시지로 학생들에게 징계 사실을 통보했다. 학부생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엄연한 대학의 일원이다. '돈줄'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고 '애새끼들'도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 역시 일종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습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기서 혹자는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더라' 같은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떤 별로 재미 없는 농담이 떠오른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를 보고 의사가 물었다. "Oh, my god. It's serious. How are you?" 그러자 한국인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I'm fine. Thank you. And you?"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진중권이 다른 누구처럼 아이고 데이고 나 죽네 생계가 어려워서 미치겠지만 웃음으로 참아야겠네 동네 사람들 나 좀 보소~ 이러고 있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모든 갈등이 사사화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그 결과 가장 오버스럽게 고통을 호소하고 난리를 쳐야만 슬쩍 관심을 보이는 식으로 길들여져 있다. 그럼 '유쾌한 미학자 CJK'가 블로그에서 오열하고 삭발식이라도 하리?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냥 괜찮은 거야? 당신들 바보인가?
밖에서 큰아들이 맞고 돌아왔다. 그 큰아들은 속내가 깊어서 웃는 얼굴로 '괜찮아요. 병신같은 애들이 병신짓 하는 건데요 뭐. 삥도 별로 안 뜯겼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 부모가 '아, 우리 애가 정말 생각보다 괜찮나 보다. 과자 사먹을 돈 아직 남았다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할까? 더군다나 그 큰아들을 때린 깡패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닐 것이 불보듯 훤한 시점에, '우리 애는 문제 없어요. 자기가 괜찮다는데 뭐'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먹고사니즘'이 정말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사람들이 뭐에 홀린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중권은 먹고살만하다고 한다'는 말을 옮기고 있고,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같은 단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잠시 염두에 두었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하등의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우석훈의 주도 하에 두 번째 서명판이 돌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먹고사니즘'은 이 갈등을 진중권의 '밥줄'에 대한 것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 보게 된 것은 결국, 20대들이다. 진중권을 위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가 징계를 당한 그 학생들 말이다.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한 상황이다. 사태를 파악해보기 위해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실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용기를 낸 의로운 학생들이 결국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놓인 것이다.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는 진중권과 달리, 나는 이 일에 정말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