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된 채 오랜 시간이 지속되자,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고 보도된 그의 말은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조깅을 열심히 한 덕분에 아직까지 건강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중 한 문장만큼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YS는 ‘우리가 함께 잘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뤘다. 아니었다면 버마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내용을 기사로 읽으면서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추정된다. YS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을 DJ가 했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실로 버마의 상황은 정말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현지시각으로 8월 11일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다시 군부에 의해 1년 6개월의 가택연금 처분을 당함으로써 버마의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야 없겠지만, 버마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미약한 희망이 다시 한 번 짓밟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아니면, 버마처럼...지금 버마는?
지난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의 민주화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바람을 타고 이루어졌다. 1987년 한국에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필리핀에서는 그 전 해인 1986년 피플 파워 운동이 벌어졌다. 그 영향을 받아 버마에서도 1988년 8월 8일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문제는 최루탄을 쏘다가 탄이 다 떨어지자 항복한 한국 군부와 달리, 버마 군부는 국민들을 향해 실탄을 마구 쏘았고, 시위대가 전부 투쟁 의지를 상실하고 집에 들어박힐 때까지 계속 실탄을 쏘았다는 데 있다.
▲ 동아일보 8월 12일자 1면. | ||
가택연금 기간이 끝난 후 다시 연금이 시작된 것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버마 군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웅산 수치를 법원으로 끌고 들어가고, 법원은 그에게 예정된 징역형을 선고한다. 차마 살해할 수는 없으니만큼 늙어 죽을 때까지 가두어두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가장 어이없는 경우는 바로 올해 벌어진 것이었다. 존 윌리엄 예토(John William Yettaw)라는 미국인이 수치 여사가 연금되어 있는 저택의 건너편 호수를 헤엄쳐 건너갔다. 그는 저택에 도착했고 수치 여사는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바로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가택연금 규칙상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와서는 안 되므로 아웅산 수치가 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법 논리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마 군부는 오래도록 재판을 끌었다. 재판의 방청을 요구하는 외국 저널리스트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묵살했다가 허용했다가 다시 묵살하는 식으로 갈팡질팡했다. 아웅산 수치 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숱한 범민주화세력들에 대해서도 일제히 연행 및 수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인세인 교도소는 새삼스레 밀려닥친 정치범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들이 항의를 하고 행동을 취해보았지만 이미 국제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버마 군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버마 봉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The Economist>가 도달한 결론도 그런 것이다. 이미 (‘인권’을 존중하는) 서구 세계는 버마에 대해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괴로워지는 것은 버마의 국민들이지 군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군부는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건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인 대우인터내셔널을 포함하여 여러 아시아 기업들이 버마의 해상 유전 및 가스전 개발에 진출하고 있고, 그 경로를 통해 군부는 엄청난 양의 달러를 직접 챙길 수 있다. 일반적인 봉쇄 조치가 실질적인 의미를 전혀 지니지 못하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서구 언론들의 중평이다.
<The Guardian>그런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군부의 돈줄이 되는 바로 그 에너지 수출에 대해서도 봉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버마의 주변에 있는 돈 많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버마의 국내 정치에 대해 거의 완전히 무관심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버마 뿐 아니라 수단과 나이지리아 등에서도 중국은 자원을 챙겨 떠나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일관하여 독재 정부의 후견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견제하기는커녕, 잃어버린 고구려의 꿈을 꾸고 앉아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버마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 중 하나로 대한민국을 지목하는 것은 그리 ‘오버’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 지배는 버마와 얼마나 다른가?
역설적이게도 국내에서는 한창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고작 싸이월드에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고 써놓은 것만으로도 수억원 어치의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되고, 다음 아고라에 글 좀 썼다고 구치소에 잡아넣고, 시위중인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이 엄연히 보도 위에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세 번의 경고방송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진압작전에 돌입한다.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그리고 법원의 사법 절차가 군사독재 종결 이후 이토록 문란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법 질서의 혼돈이, 버마의 군부 독재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데 있다. 군부의 개가 되어 있는 사법부는 이미 아웅산 수치에게 가택 연금을 내리겠다는 결정을 해놓고 수사 및 재판을 시작한다. 그나마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수치가 아닌 다음에야,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수사 기법’의 일환으로 폭행을 당해 사망하거나 하는 일이 벌이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나아질 리 없는 ‘현실’이니까.
버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18개월, 즉 1년 반 동안의 가택 연금을 추가로 명령했다. 사법 절차의 몽둥이를 휘둘러 정치적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는 행태는, 그러나 남의 일이 아니다.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폭로로 인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현재 재판중이다. 법원은 노회찬에게 아마도 실형을 선고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삼성의 비위를 거슬린 누군가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노회찬이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난신고끝에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조승수의 경우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거 전 날 밤 주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도와주는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선거운동을 한 후보자가 되었고,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일명 ‘젖사마’로 불리는 최연희 의원이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음으로써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과 비교해보자. 대한민국에 공정한 법의 지배가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차원 모두를 함께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미성숙한 부국(富國)이 국경 밖에서 어떤 해악을 끼치고 다니는지, 민주화를 염원하는 버마 국민들에게 얼마나 미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를 우선 똑똑히 알아야 한다. 동시에 버마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법의 횡포가 지금 우리에게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 60여명을 대상으로 검찰은 무더기 기소를 하고 나섰다. 심지어 예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어떤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이 노동쟁의를 일종의 공안사건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외국인도 사람이고 노동자도 국민이다. 외국인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대한민국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무턱대고 두들겨 패고 잡아 넣는 현행 법 집행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의 단호한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아직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어물거리다가는 곧 ‘내 차례’가 온다. 20년이 넘도록 암흑 속에 갇혀 있는 버마 국민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