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포터, 마티, 1만6천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표기한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를 재논의하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는 일반 지침과 다르게 작성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담당교수가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진료를 시행했으며,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말이다.
과학의 일부인 의학적 진술에 '진정성'이라니. 즉각적으로 조롱이 뒤따랐다. 주치의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진정성 따지고 들 거면 대체 한의학은 왜 비판하냐, 의사들이 결정적인 국면에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하니까 허현회 같은 대체의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이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책꽂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꺼내들었다.
2008년 여름,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가 아내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중고 요트 여행을 하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특공대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과 함께 책은 시작된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털어 중고 요트를 산 후,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우글거리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10쪽)
이 사례만 들어도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소비주의, 대량생산, GMO, 화학적 생산물, 기타등등 '현대적'(modern)인 것과 대척점에서 '진정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이제 제주도는 틀렸다. 산티아고나 히말라야에서 트래킹을 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개천의 물을 퍼마시고 과탄산소다를 풀어 빨래를 하는 삶이 '친환경적'인 것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진정한' 면역력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는 백신을 거부하고 서로 병을 옮겨주는 '수두 파티'를 벌인다.
캐나다의 트렌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현재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앤드류 포터는 전공인 철학 위에 다양한 대중문화적 지식을 접목하여 21세기 현재의 진보 운동이 빠져 있는 '진정성'의 늪을 파해쳐 보여준다. 그가 조지프 히스와 함께 쓴 책 <혁명을 팝니다>에서 보여줬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퇴행적 이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성'에의 추구와 파시즘에 대한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평범한 대중들과 달리 '깨어있는' 나는 대량생산되는 GMO 작물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는 자부심 느끼기.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분짓기'의 욕망이다. 그러한 '진정성' 담론이 힘을 얻을수록 수많은 인류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고 범죄율을 떨어뜨린 "자유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과학·법률·정치적 기반과 그 속에서 번성하는 문화"(312쪽)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찾아 야만과 폭력이 들끓는 전근대의 망망대해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진정성'을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진정성'에의 호소가 권력을 향한 전근대적 복종의 습속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18ㅣ주간경향 11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