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