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2

프리즈비의 발명자 월터 프레드릭 모리슨 사망

"Frisbee inventor Walter Frederick Morrison dies aged 90"

via BBC

전 세계의 개 주인과 개들을 행복하게 해준 분. 명복을.

한국어를 어떻게 형성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Null Model, 2010년 2월 11일)
'시'의 비밀(Null Model, 2010년 2월 12일)

아 이추판다님이 쓴 이 두 글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는 '주어'가 아니라 '주제(topic)'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얻은 문법적 상식에 어긋나는 듯 보이는 표현도 실은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고 단정한 한국어의 '용례'를 생산"하자는 나의 취지에 대해 반대의 뜻을 표한 후, 스티븐 핑커의 책을 인용하며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를 끝맺는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만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문장들이 문법적이었고, 특히 일상 언어의 절대다수가 문법적이었다. 또 중간계층의 대화보다는 노동계층의 대화에서 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더 높았다. 비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뜻밖에도 학식 있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였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에서 재인용.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문미선, 신효신 옮김,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동녘사이언스, 44쪽.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인 듯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문법적 타당성'이라는 것의 속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기대고 있는 언어학적 해설은 '현존하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어 학술적으로 정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늘은 파랗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찰 방법으로 하늘을 보면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 파란 하늘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주제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라는 표현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마찬가지 원리로 당연히 너무도 쉽다.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현상에 맞게 짜여진 이론을 들이대고 있는 한, 언제나 결론은 동일하다.

문제는 이러한 반박이 나의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데 있다. '비문'이라는 단어를 엄밀하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겠으나,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볼 때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통계적으로 따지면 언제나 그 숫자는 미비할 것이며, 전체 한국어 화자 중 그런 언어 생활에 반감을 느끼고 그러한 경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추판다님은 그에 대해 "이미 있는 걸 또 다시 '생산'하는건 삽질이고, 그저 아무도 쓰지 않을 한국어 닮은 인공언어를 하나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응한다. 여기서 그는 내 주장을 다소 과장하여 논박하고 있다. 인공언어의 창조까지는 바라지 않고, 다만 한국어 사용자들 중 일부라도 현존하는 방향과 다른 쪽을 일부러 지향함으로써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수준의 주장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화이트칼라'와 '윤리'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개인적으로 바빠서 적절한 시점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댓글들은 흘러 흘러 결국 '가게 점원들의 이상한 높임말'이라는 고전적 떡밥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이런 모습에서 한국어 화자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를 다루고 작성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앞서서 '올바른'(그것이 어떤 방향이 되었건)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적어도 내게는 그리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과 상관 없는 '타자'인 가게 점원들의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쌍심지를 켜고 사례를 외워둔 다음 기회가 날 때마다 되새기고 곱씹는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 체계 하에서도 이런 행동은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나브로' '우리말글'을 '바투어' 나가자는 식의 손쉬운 대응은 이제 그만두고, 혼동의 가능성이 최소화된 한국어 문장을 사용하며, 미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문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있다.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 거스름돈 있으시고요'를 탓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윤리적이다.

내게 한국어는 많은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의 통계적 합산치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이 결심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으되, 다른 이들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2010-02-11

한국어에 대한 게으른 사랑

역사다리꼴 형태로 지어지고 있는 용산구청 신청사 옆을 지나다가 공사 현장 안내 문구를 읽었다. '이 공사는 뭐시기 저시기 이러쿵 저러쿵을 건설중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의 디자인 수도 서울의 공식 글꼴인 서울한강체로 쓰여진 그 문구를 이해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쨌건 비문이기 때문이다.

'이 공사는'으로 시작하는 이 문장은 당연히 명사형 어구로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공사의 성격을 설명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중입니다'는 주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무언가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지, 공사 그 자체가 다양한 건물들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공사는 ……를 짓는 공사입니다'라고 하거나,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저희는 ……를 건설중입니다'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게 대략 이런 식이다. 한국'어' 그 자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내셔널리티와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부각시킨 후 그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훌륭한 한글 글꼴을 만들어서 무상으로 배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글꼴에 담기는 문구가 비문이라는 것은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사람들은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혹은 그렇다고 즐겨 말하지만), 그 사랑은 몹시도 파편적이다. 한국어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질 만큼 사람들은 부지런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이 아니라 '화이트칼라'임을 명확히 해두자. 말하자면 용산구청 신축 공사장 현수막 문구를 쓴 바로 그 담당자 같은 사람 말이다. 인터넷 앞에 앉아 한국의 지식인들을 비아냥거리고 메신저로 바삐 수다를 주고 받으며 이명박은 싫지만 진보정당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을 나는 지금 염두에 두고 있다.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은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으면서 윤리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노력도 그다지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내셔널리즘의 확대와 함께 자국어에 대한 관심이 솟구치는 것은 한국, 혹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영국의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낸 용례들로 가득 차 있다. 조지 오웰이 산문을 쓰던 당시에는 앵글로-색슨 계열 어휘만 사용하자는 운동(요즘 식으로 치자면 '순우리말 운동')이 벌어져서 지식인들이 그 주제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우리가 아는 현대 영어는 그런 식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짧은 역사에 비해 제법 깊이를 갖춘 국어국문학 연구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4·19 세대 이후 한국인들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상실한 채, 파편적인 상징으로서의 '한글'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맞아요, 사람들은 한국어와 한글을 구별하지도 않는다니까요'라고 어깨를 으쓱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런 식의 편리한 이분법을 통해 스스로는 뭔가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치고 한국어에 대해 어휘 수준 이상의 고찰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한국어에 대한 크나큰 관심을, 동시에 그것을 무신경하게 다루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아마도, 아직 사지 않았다면,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쓰기』를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는 '…적(的)' 같은 표현은 일제의 잔재가 묻어 있는 것이라고 비판할 것이며, 최대한 '순수한 우리말'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국의 화이트칼라들, 즉 직업적으로 원고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중심 세력들은, 딱 여기까지만 나간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누리집'에서 올바른 '말글살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싯거리'며 '톺아보는'데, 이것은 오세훈 식의 '디자인 서울'의 일환으로 건설된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이 두르고 있는 가갸거겨 금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다. 언어로서의 한국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부분적인 대상, 즉 훈민정음 내지는 몇몇 고유어 어휘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그것을 패티쉬의 소재로 삼아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그것을 아낀다면, 이제는 '일본식 한자어 추방'이니 하는 철 지난 노래는 집어치우자. 이오덕 선생의 책 한 권 읽고 '올바른 우리말'을 논하는 대범함은 차라리 '우리말 오덕질'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입만 열면 영어 단어를 섞어 말하며, 그렇게 하지 않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몇몇 단어를 지키거나 교체하는 게 아니라 명료하고 단정하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용례'들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인 문건이나 표어에 비문이 등장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눈을 뜨고 다니기가 힘들 지경이다.

한국어에 대한 쇄말한 집착은 사람들의 취향마저도 크게 왜곡하는 것 같다. 가령 김훈을 보자. 일부러 툭툭 끊어치는 단문 및 이유 없이 등장하는 고유어와 고어들은 그가 도서 시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의 '한국어에 대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판타지의 바탕에는 '긴 문장은 나쁜 문장', '외국에서 온 어휘는 나쁜 어휘'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이 포진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잠시라도 그의 문장에 열광했다면 스스로의 취향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미의식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서 글을 맺도록 하자.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는가? 남들은 게으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실컷 비난했지만, 여기서는 가부간에 답을 내놓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언어를 쓰고 있을 때에만 나는 자유롭지만, 이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자유롭지 않다. 국어사랑 표어를 머리에 걸고 남이 쓴 글에 빨간펜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에 너무 쉽게 답을 내놓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은 정말이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나는 '진지하게' 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물론 이것은 소심한 대답이다. 하지만 "소심한 주장을 소심함의 주장으로 간주하지 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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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41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서울: 책세상, 2006)

2010-02-08

칼 로브의 청춘시절

어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칼 로브의 청춘시절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때는 정확한 레퍼런스가 안 떠올라서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오늘 책꽂이를 살펴보다가 내가 그 비범한 청년의 이야기를 어디서 봤는지 깨닫고 스크랩했는데, 기왕 한 김에 공개하기로 한다.

권모술수에 능해야 공화당에서 출세할 수 있게 된 것도 닉슨시대의 일이다. 1970년 대학생이었던 칼 로브(Karl Rove)는 ①민주당 후보 진영에서 훔친 선거 팸플릿 안에 ②맥주를 무료로 준다는 가짜 전단지를 끼워 넣어 선거 집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로브는 전국대학공화당위원회(College Republican National committee)에서 상임이사직을 맡기 위해 대학을 자퇴했다. ③2년 뒤 로브는 전국대학공화당위원회의 회장 후보로 나서서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전국공화당위원회의 회장이었던 조지 H. W. 부시의 축하를 받았다.

보수주의 운동은 이런 유형의 전략에 갈채를 보냈다. …후략…

156-157쪽.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8)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공화당의 정치 꿈나무는 이후... 에혀.

2010-01-22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하기

그놈의 '소녀시대 만화'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웹툰 작가 윤서인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비단 그 지점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워낙 다방면으로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고 그 각각에서 용납되기 힘든 어떤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를 말해보고자 한다.

디씨뉴스의 기사로 뜬 "소녀시대 성희롱 논란 작가, 과거 만화까지 논란"을 보자. 이 만화에서 윤서인은 '다니엘'이라는 단어가 과거에는 '다니엘의 집' 등에 모여 있는 장애인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였는데, 지금은 다니엘 헤니의 등장으로 인해 미남을 더 빨리 연상시킨다는 내용을 뻔뻔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캡처된 리플을 보면 그는 항의하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다니엘 학교는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이었지요.
당연히 정신지체아 이미지를 그려놓은거구요.
정신지체아는 입가에 침흘리게 그려야지 눈부라리고 똑똑하게 그릴순 없죠.

장애는 장애일뿐 그게 비웃을일이라고도 나쁜거라고도 한적없습니다.
스스로 편견에 가두지 마세요. 누구나 오늘부터라도 장애인이 될수있습니다.
장애인은 어디서 장애라는 단어만 보여도 발끈발끈해야하나요?

왜 입가에 침흘리는 다니엘 이미지를 보면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지???


윤서인의 다른 불쾌한 만화들이 가지는 사고 방식이 다 이런 식이다. '그거 사실이잖아, 나는 그냥 만화로 그렸을 뿐이야'라는 편리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다해가 성형 많이 했으니까 "여러분 이거 다 성형인 거 아시죠?"라고 썼을 뿐인데 리플에서 남들이 난리를 치니까 대사를 바꾸는 거고, 한국 제품들이 일본거 베낀 거 많으니까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괜히 열등감에 쩔어있는 한국인들이 지들도 어차피 일본거 좋아하는 주제에 지랄을 하는 거다. 윤서인의 세계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며 불쾌감을 느낄까? 윤서인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어떤 가치에 기반한 행동 체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서인은 약자들에게 언제나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침흘리니까 침흘리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다. 와, 솔직하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과연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서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디씨뉴스의 아래 달린 리플들 중에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도덕 체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약자들을 향해 '솔직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며 부족한 지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불운한 요소로 인해, 혹은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강자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탄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이 오면 약자, 혹은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시선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문제시될 수 있고, 그래서 그냥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기도 한다. 동성애자나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적 입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적극적이고 치열한 '보호'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오버스럽다고, 남사스럽다고 불평들이 많지만 그런 억지스러운 노력이 있기 전에는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고 불리지도 못했다. 그냥 '병신들'이었을 뿐이다.

윤서인과 같은 저런 식의 '솔직함'은, 세상이 반 발자국 나아졌다는 것을 빌미삼아 자신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버린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반동적이고 부도덕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만화의 내용도 결국 그것 아닌가. 솔직하게 드러나버린 아저씨의 성욕. 아, 나도 소녀시대와 떡치고 싶구나. 그는 왜 자신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를 까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자신들이 왜 화를 내고 왜 까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약자에 대한 솔직함은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윤서인의 경우에는 본인이 강자에게 비굴하다 못해 강자에게 비굴하게 굴었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치닫고("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인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강자들의 무리에 끼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며("일본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짱'에게 노골적인 찬사를 바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삼성 최고에요"). 인간의 본래적인 도덕심은 이런 식의 비굴함을 보며 분노하고 짜증을 내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행태,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이런 모습이 과연 윤서인만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굳이 이 떡밥을 물어버린 이유는 디씨뉴스에 달려있는 리플들을 보고 우려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게 왜 안 되냐고? 그런 식의 솔직함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런 식이라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지칭해서, '검다'의 어근인 '검-'과 귀엽고 작은 누군가를 뜻할때 쓰는 어미인 '-둥이'를 합쳐서 '검둥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로니 콜먼에게 가서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툭 터놓고 전달할 용의가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자.

도덕은 위선이 아니다. 하지만 일체의 위선을 파괴하고 나면 도덕이 갈 곳이 없다. 우리는 약자에게 겸허하고 강자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함'이라는 칼날이 오직 만만한 자들만을 향하고, '겸허함'이라는 미덕이 오직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대인 것 같다. 윤서인을 비판할 때 스스로의 모습도 좀 돌아보자는 말이다. 나의 솔직함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덧) 갑자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The Importance of Being HonestEarnest가 생각나지만, 억지로 본문에 끼워넣자니 내용이 망가질 것 같고, 떠오른 것을 안 적자니 뭔가 서운한 듯하여 괜히 덧붙여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