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다리꼴 형태로 지어지고 있는 용산구청 신청사 옆을 지나다가 공사 현장 안내 문구를 읽었다. '이 공사는 뭐시기 저시기 이러쿵
저러쿵을 건설중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의 디자인 수도 서울의 공식 글꼴인 서울한강체로 쓰여진 그 문구를 이해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쨌건 비문이기 때문이다.
'이 공사는'으로 시작하는 이 문장은 당연히 명사형 어구로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공사의 성격을 설명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중입니다'는 주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무언가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지, 공사 그 자체가 다양한 건물들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공사는 ……를 짓는
공사입니다'라고 하거나,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저희는 ……를 건설중입니다'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게 대략 이런 식이다. 한국'어' 그 자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내셔널리티와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부각시킨 후 그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훌륭한 한글 글꼴을 만들어서 무상으로 배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글꼴에 담기는 문구가 비문이라는 것은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사람들은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혹은 그렇다고 즐겨 말하지만), 그 사랑은 몹시도 파편적이다. 한국어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질 만큼 사람들은 부지런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이 아니라 '화이트칼라'임을 명확히 해두자. 말하자면
용산구청 신축 공사장 현수막 문구를 쓴 바로 그 담당자 같은 사람 말이다. 인터넷 앞에 앉아 한국의 지식인들을 비아냥거리고
메신저로 바삐 수다를 주고 받으며 이명박은 싫지만 진보정당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을 나는 지금
염두에 두고 있다.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은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으면서 윤리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노력도 그다지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내셔널리즘의 확대와 함께 자국어에 대한 관심이 솟구치는 것은 한국, 혹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영국의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낸 용례들로 가득 차 있다. 조지 오웰이 산문을 쓰던 당시에는
앵글로-색슨 계열 어휘만 사용하자는 운동(요즘 식으로 치자면 '순우리말 운동')이 벌어져서 지식인들이 그 주제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우리가 아는 현대 영어는 그런 식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짧은 역사에 비해 제법 깊이를 갖춘 국어국문학 연구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4·19 세대 이후 한국인들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상실한 채, 파편적인 상징으로서의
'한글'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맞아요, 사람들은 한국어와 한글을 구별하지도 않는다니까요'라고 어깨를 으쓱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런 식의 편리한 이분법을 통해 스스로는 뭔가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치고
한국어에 대해 어휘 수준 이상의 고찰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한국어에 대한 크나큰 관심을,
동시에 그것을 무신경하게 다루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아마도, 아직 사지 않았다면,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쓰기』를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는 '…적(的)' 같은 표현은 일제의 잔재가 묻어 있는 것이라고 비판할
것이며, 최대한 '순수한 우리말'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국의 화이트칼라들, 즉
직업적으로 원고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중심 세력들은, 딱 여기까지만 나간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누리집'에서 올바른 '말글살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싯거리'며 '톺아보는'데, 이것은 오세훈 식의 '디자인 서울'의 일환으로 건설된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이 두르고 있는
가갸거겨 금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다. 언어로서의 한국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부분적인 대상, 즉
훈민정음 내지는 몇몇 고유어 어휘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그것을 패티쉬의 소재로 삼아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그것을 아낀다면, 이제는 '일본식 한자어 추방'이니 하는 철 지난 노래는 집어치우자. 이오덕 선생의 책 한 권
읽고 '올바른 우리말'을 논하는 대범함은 차라리 '우리말 오덕질'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입만 열면
영어 단어를 섞어 말하며, 그렇게 하지 않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몇몇 단어를 지키거나 교체하는 게
아니라 명료하고 단정하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용례'들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인 문건이나 표어에 비문이 등장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눈을 뜨고 다니기가 힘들 지경이다.
한국어에 대한 쇄말한
집착은 사람들의 취향마저도 크게 왜곡하는 것 같다. 가령 김훈을 보자. 일부러 툭툭 끊어치는 단문 및 이유 없이 등장하는 고유어와
고어들은 그가 도서 시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의 '한국어에 대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판타지의 바탕에는 '긴 문장은 나쁜 문장', '외국에서 온 어휘는 나쁜 어휘'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이 포진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잠시라도 그의 문장에 열광했다면 스스로의 취향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미의식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서 글을 맺도록 하자.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는가? 남들은 게으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실컷 비난했지만, 여기서는 가부간에 답을 내놓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언어를 쓰고 있을 때에만 나는 자유롭지만, 이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자유롭지 않다. 국어사랑 표어를 머리에 걸고 남이 쓴 글에 빨간펜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에 너무 쉽게 답을 내놓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은 정말이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나는 '진지하게' 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물론 이것은 소심한 대답이다. 하지만 "소심한 주장을 소심함의 주장으로 간주하지 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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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341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서울: 책세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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