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 파장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기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우려의 표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발생할라치면 즉각 중앙일간지나 경제신문들이 마치 한국 경제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대던 기존의 보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예전같았다면 '미국발 경제 위기, 한국호 침몰하는가!' 따위 타이틀이 적어도 두 주일 정도는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것이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이 대선의 주된 쟁점으로 떠올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식의 움직임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최용식이 경제 역적들아 들어라에서 내놓았던 진단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중동의 저주로 인해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조중동과 양대 경제신문들은 경기의 회복 여부에 대해 함부로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거나, 그것을 거창한 레토릭으로 포장하여 '아젠다'를 설정하거나 하지 못한다. 이것은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이다.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사람들이 은행에 저축을 하는 대신 증권사를 통해 국내 증시에 펀드를 통해 간접투자하는 시대가 열림에 따라, 주가로 표현되는 경기의 실제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함부로 경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식의 표현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층별 소득 격차는 한없이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소득층의 실제 구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위기'라고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한국 경제에 대해 말하자면 분명히 그렇다.
요컨대 펀드 시대는 경제 기사에 최소한의 냉철함과 이성을 가져다주었다. '조선일보는 반민족적인 친일 신문이다'라는 말보다, '조선일보 보고 투자하면 돈 잃는다'라는 속설이 그 신문의 경제면을 교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안티조선의 초창기에 그 운동의 지지자들은 조선일보를 '봉건적인 신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르크스가 옳다. 그들이 지적하던 조선일보의 어떤 속성은, 최근 급격하게 금융화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의 의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론운동이 특정한 정치 세력의 지지 운동으로 전락한 다음, 그것이 추구하던 최소한의 가치마저도 결국 '투자자'들의 수요로 인하여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시민적 영역과 역량이 극도로 미비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을 뿐이다. 안티조선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시민사회의 언론에 대한 개입이 이 지점에서 멈춰서지 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자본주의에 휩쓸려 성취되는 민주주의의 과실은 결코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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