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표현을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맥락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빵을 팔지 않는 사회보다는, 차라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유대인에게도 돈만 주면 빵을 파는 사회가 낫다고. 복거일의 말이었다. 이후 영어 공용화론 등으로 인해 복거일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그는 일종의 공적이 되고 말았지만, '시장을 통해 긍정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언제나 복거일의 그림자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복거일의 주장은 큰 맹점을 지니고 있다. 시장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재화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제도에 비하면 진입 장벽이 낮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는 노씨니까, 전주 이씨의
제삿상에 끼어들 수는 없다. 하지만 전주 이씨 문중의 누군가가 땅을 팔겠다고 내놓았다면, 충분한 돈이 있을 경우 나는 입찰할 수
있고 시장 원칙에 따라 가장 높은 값을 부른 후 낙찰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전적인 시장 질서를 전제하고
있을 때, 혹은 구시대의 다른 질서와 시장 질서를 견주어볼 때에나 성립할 수 있는 논리이다. 모든 것이 단일한 시장 질서하에
편입되어버린 현대(적어도 20세기 이후)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은 맞지 않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흑인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다른 버스 좌석에 앉아야 했다. 당신이 노숙자라면 5000원을 낸다 해도 강남역 인근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을 수
없다. 입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따라서 '수구적 가치'와
대립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시장 그 자체가 '구분짓기'의 요소를 충분히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늘 확인하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베블런이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시장 질서가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준다는 믿음에 결정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외의 타인들과는 구분짓고 싶어한다.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시장 질서를 이용하여 시장 질서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걸어가면 한남동이 나온다. 한남동에는 다들 알다시피 재벌가의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개별적인
저택들의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시장 가격'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정도 규모가 되는 저택들은 철저히 1:1로 매매된다. 따라서 '누가 집 내놓았다더라'는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것을 살 수 없다.
부촌은 그냥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품위'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은 로또파와 비 로또파로 나뉘어 반상회도 따로 갖는 것이고,
성북동에서는 갑자기 돈을 번 누군가가 저택을 구입하려 하자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하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문제의
주택을 공동으로 구입해버린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시장 질서는 다른 질서에 비하면 무차별적일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평평한 세계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또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인에게는
1등석을 팔지 않는다'는 차별, 혹은 '너같은 졸부는 우리 동네 주민이 될 자격이 없다'는 차별, 이런 차별에 대해 '나도 돈
있다'고 항변하는 것은 우습고 치졸한 일일 뿐이다.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가 바로 그런 소리를 했다가, 두들겨
맞고 아까 맞은 데 또 맞고 각성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하트마 간디로 거듭났다. 시장 원리는 무차별적일 수 있고, 그래서 돈
있는 내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장을 운영하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구별짓고 차별하고 멸시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 내에서, 혹은 시장 원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시장 원리
또한 사회적 질서의 일부분이다. 시장에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가격을 형성하고 매매하는 것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고 없는지, 또 그 규칙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등은 전부 시장에 내재된 법칙이 아니다. 그러한 규칙들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
'흑인은 같은 값을 지불하더라도 다른 칸에 앉아야 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일 뿐이라고, 즉 시장
원칙에 반하는 사례일 뿐 시장 원칙의 적용 그 자체는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가격에 다른 상품을
제시받는다 해도 거래가 꾸준히 성사되고 있는 이상, 그 경우에도 시장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시장 원리는 그 이상의 도덕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돈을
냈으니까 나도 같은 칸에 앉겠다'는 주장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경우 '시장 원리'에 따라 해법이 도출되었다면, 같은 값을
낸 흑인에게 같은 자리에 앉게 해주는 버스 회사가 등장하여, 그 버스 회사의 버스만 흑인들이 타고 다녀서, 차별적인 좌석제를
유지하는 버스 회사가 망해버리거나 정책을 변경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애초에 법적으로 흑인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벽이 무너진 것은 시장 원리 때문이
아니었다. 로자 팍스라는 꼬장꼬장한 여성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을 이끌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로자 팍스가 처음 내세운 것은 시장 원리에 따른 평등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이들의 가슴을 뒤흔든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평등이었다.
수구세력과의 대결을 위해서 '진정한 시장주의'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익숙하면서도 식상한 것이다. 그런 주장은 이미 재작년 말에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실컷 써먹은 레퍼토리를 변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명박은 '노무현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웠고, 지금 시장주의 타령하는 분들은 '이명박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상황은 몹시도 희극적이다. 두 정치 세력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을 뒤에 감춰둔 채 시장의 입을 빌려 말하려고 들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망치가 못을 박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듯, 시장 또한 재화를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도덕적 망치'를 기대할 수 없듯, '건전한 톱'을 바랄 수 없듯,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또한 형용모순일 뿐이다. 정치적인
문제, 도덕적인 딜레마, 사회적인 갈등은 그 자체의 논리 내에서 합의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글루스에는 '수구세력 vs. (진정한) 시장세력'의 대립구도를 상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한 주장의 근본 동기가 결국
'한미 FTA를 졸속 추진한 노무현 옹호'임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거짓 대결 구도는 그저 한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국산 망치가 도덕적일 수 없듯이, 미제 망치도 쿨할 수 없다. 한미 FTA의 동기는 '시장을 통한 수구 견제'라는 노짱의
심모원려가 아니다. 외교부의 특정 세력에게 포위된, 준비되지 않은 집권 세력의 휘둘림이 그 사태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미국산 시장주의를 도입하여 한국의 덜 된 시장질서를 교정한다는 발상은 우습고도 한심할 뿐이다. 이미 삼성은 한미 FTA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사장급인 글로벌 법무책임자로 영입한
상태이다. 한미 FTA를 통해 재벌을 어떻게 견제하겠다는 건가? 재벌 중의 재벌인 삼성은 이미 다 빠져가날 구멍을 만들어놓은
상태인데. 삼성이 하면 다들 한다. 다른 곳에서도 외교부 전직 직원들의 몸값을 한껏 올려놓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백 번
양보해서 '노짱의 심모원려'를 사실로 인정해준다 해도,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말자는 말이다.
시장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지하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각은, 순진할 뿐 아니라 이념적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발상이야말로 이념적이다. 어떤 이념도 택하지 않겠다는 이념,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낮게 보는 이념, 노동자가 제 몫을 찾는 것을
어떤 식으로건 폄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념,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시장 원리'를 드높여 강조하는 분들의 이면에 깔린 이념이다.
미국 경제 위기로 인해 '글로벌 스탠다드'가 바뀌고 있는 이 시점에, 아직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시장의 세계화가 아니라 사상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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