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3

위악적 솔직함 - 김훈의 경우

엮인글: "위악(僞惡)에 관해"(a quarantine station, 2010년 3월 2일)

sonnet 님은 '위악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악은 사전적으로 볼 때 '짐짓 악한 척 하는 행위'로 정의되므로, 그 경우 '왜 짐짓 악한 척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sonnet님은 그 질문의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내가 볼 때 그 질문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위악이라고 지칭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게 위악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냥 부르는 쪽이 임의로 딱지를 붙여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왜 누군가를 짐짓 악한 체 한다고 부르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바꾼 후 그는, 누군가를 위악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다른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 '위악적'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때에 따라서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위악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암묵적인 선의 기준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선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선의 기준이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이다.

'위악적 포즈'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 김훈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날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 김훈이 되었다. 이후 김훈은 지금까지 산문과 소설 등에서 줄곧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고 외치는 거대담론은 무의미하며, 인종 간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등.

최보은: 대학원 졸업한 딸을 두신 걸로 아는데 페미니즘 기질은 없나요?

김훈: 우리 딸?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들지 않았어요.

최보은: 어쩌다 김훈 선배는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드셨어요. 마초…. <시사저널>엔 여기자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세요? 페미니즘 같은 것에 물들지 말라?

김훈: 걔들은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최보은: 네? (웃음) 이런 말 기사화해도 상관없으세요?

김훈: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웃음)

김규항: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훈: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야. 여자를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고. (웃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다 책임지고. 그게 가부장의 자존심이거든.

김규항: 최 선배 열받네.

최보은: 지금 반어법이에요? 진심이에요?

김훈: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최보은: 그런 이야기하면 <시사저널> 부수 떨어져요.

김훈: 괜찮아. 이제 떨어질 것도 없어. (웃음)

김규항: 후천적인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요인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는 백인이 흑인보다, 독일인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인종차별하고 다를 게 없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는 게 근대적 사고방식의 기본 아닌가요?

김훈: 인종 사이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김규항: 혐오는 단지 서로간에 다르다는 건데. 이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치가 아리안족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는… 근데 선생님께서 여성에 대해 말씀하는 건 그거와 결국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김훈: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든.

김규항: 선생님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는 얘기가 가능하더라도 남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자도 있을 수 있고, 여자보다 못한 남자도 많고….

김훈: 그건 그렇지.

참고: http://blog.aladdin.co.kr/tomek/tag/%EA%B9%80%EA%B7%9C%ED%95%AD (원문을 찾지 못해 기사가 인용된 블로그를 링크함)


이 경우 김훈의 행동을 '짐짓 악한 척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위악'의 사전적 정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김훈은 분명히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간의 평등 문제나 인종간의 혐오 등 현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대체로 수긍하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이 경우에 '짐짓 그런 척' 한다고 말하는 것은 sonnet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김훈의 발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현을 넘어선다. 그는 이러한 '위악적' 표현을 통해 대략 두 가지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진보적 언론'이라는 것들이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헛소리만 하는 얼간이들이라고 선언하고 폭로한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상대방을 일종의 '위선자'나 '지사(지사정신 할 때의 그 지사)'로 몰아간다. 이 본문에 인용된 것 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기능이 중요하다. 김훈의 거침없는 '취존중 요구'로 인해, 한겨레나 시사저널 같은 당시의 진보적 매체들은 졸지에 남의 취향도 존중할 줄 모르고, 인종 사이의 자연스러운 혐오도 무시하며,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는 '현실'이라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상 대 현실', '거대담론 대 인간의 삶' 같은 공허한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갈 경우,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문제,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어느 정도 옳다고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치를 둘러싸고 '위악적'인 제스처는 힘을 발휘한다. 짐짓 악한 척까지 할 필요도 없다. 다들 당장은 불편하지만 옳기 때문에 참는 가치들에 대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버리면 그만이 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의 비효율 감수라던가(솔직히 다리가 안 좋으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웹사이트에 플래시 도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보기도 좋고, 개발 현실이라는 게 있지...), 등등. 우리는 비슷한 예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지만 아직 공고한 상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도덕적 명제들을 개인적 취향을 명목삼아 부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 '위악'의 행태이다. 일부러 싸가지 없는 척하는 신해철 같은 연예인,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할까봐 괜히 가래침 뱉는 대학교 2학년 오빠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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