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다보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십상이다. 특히 모종의 정치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의 경우, 그로 인한 갈등은 쉽게 커지고 종종 조직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그 집단이 어떤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단체라면, 게다가 내부에서 구성원을 통제할만한 적절한 권위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단체라면, 돌출 행동으로 인한 위험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레디앙에 기고된 목수정의 글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파장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돌출 행동'으로 설정해보자. 여기서는 글이 공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글을 보낸 목수정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레디앙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지 등 세부적인 '팩트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정명훈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목수정의 글이 레디앙을 통해 공개되면서, 레디앙 독자의견,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그리고 이글루스(외의 다른 블로고스피어에서 이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에서 목수정은 극심한 반대 여론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반대 의견들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목수정이 괜히 정명훈을 건드린 탓에 합창단원들의 복직이 더욱 힘들어졌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초점이 합창단에서 목수정으로 옮겨지면서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진보 블로거'들은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넘어가기로 작정한 듯하다. 목수정을 옹호하자니 여론에 휩쓸릴 것 같을 뿐더러 논거를 만들어주기도 쉽지 않고, 옹호하지 않자니 같은 당원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이런 입장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캡콜드님 같은 경우 목수정의 행동 원인을 '지사정신'으로 단정하고, 자신은 언제나 그것을 비판해 왔으며, 굳이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내용의 포스트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전략, 잠잠해질 때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전략은 과연 현명한 전략일까? 그 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미국 민권운동의 대부, 사울 알린스키가 바로 그 소수 중 한 사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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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소위 급진주의자들 중 다수가 보여주는 정치적 무감각과 기회상실의 한 예가 시카고 7인의 재판*중에 일어난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주말 동안 전국 각지로부터 온 150여 명의 변호사가 호프만 판사가 내린 변호사 4인에 대한 구속조치에 항의하는 연방정부 빌딩 앞의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시카고로 모여들었다. . . . (중략) . . . 10시경이 되자 성난 변호사들은 연방정부 건물 주변을 행진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는 수백 명의 급진주의적 학생들, 몇 명의 흑표범단원들 그리고 백여 명 이상의 푸른 헬멧을 쓴 시카고 경찰들이 모여들었다.
정오가 되기 직전에,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 중 40명 정도가 입구 옆의 유리벽 옆에 붙어 있던, 연방정부 건물 내에서의 그와 같은 시위를 금지하는 켐벨 판사의 서명이 들어간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피켓을 들고 연방정부 건물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변호사들이 진입하자마자, 검은 판사복을 입고 연방 보안관, 속기사, 법원 서기를 동행한 켐벨 판사가 로비로 내려왔다. 그들 자신이 한 무리의 경찰과 연방 보안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성난 변호사들에게 에워싸인 켐벨 판사는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재판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즉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욕죄로 고발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이번에는 그들의 모욕죄가 재판정에서 일어났으므로 즉결처분을 틀림없이 내릴 것이라 경고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마자,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쳤다.
잠시 동안의 긴장된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이어졌고, 경찰들은 눈에 띄게 어색해졌으며, 켐벨 판사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변호사들 역시 로비를 떠나서 보도에 있던 시위대에게 돌아갔다.
-제이슨 엡스타인, 《거대한 음모의 재판》The Great Conspiracy Trial, Random House, 1970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자기 손으로 버리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판사로 하여금 논쟁을 계속하도록 만들고 사건의 쟁점이 유지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친 후에 ①변호사들 중 한 명이 켐벨 판사에게로 걸어나가 그들은 개인에 대한 욕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②모든 변호사가 한목소리로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함께 외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 중 그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주도권이 그들에게서 판사에게로 넘어가도록 하였고, 변호사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pp. 43-45] 사울 D.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박순성 박지우 옮김 (서울: 아르케, 2008)
* [역주] '시카고 7인의 재판(The Chicago Seven Trial)'은 시카고 시 반전시위 주동자들과 관련된 재판을 가리킨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가 확산되자 상원이 1968년 4월 반폭동법(Anti-Riot Act)을 통과시킨 가운데,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추어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조직 전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곱 명(처음에는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제외됨)의 급진주의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1969년 9월에섯 1970년 2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다섯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1972년 11월 상소심 판결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http://www.law.umkc.edu/faculty/projects/ftrials/Chicago/chicago7.html 참조.
(위 원문자 번호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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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수정 사건과 '진보 블로거'들의 대응
이 사례와 현재 목수정 사건의 차이가 있다면,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야기된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있느냐 아니면 '군중의 야유'가 있느냐 뿐이다. 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법정에 진출했던 변호사들은 군중 속으로 돌아간 후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라고 외친 누군가를 찾아내 추궁하거나 훈계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진보 블로거'들은 목수정 끌끌끌, 목수정을 지금 왜 옹호하고 그러시나, 노정태님 실망이에요~ 이러고 있다.
여기서 도출된 교훈을 우리의 사례에 대입해보자. 레디앙에 실린 목수정의 기고문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파장이 커졌을 때, 목수정은 다시금 진보신당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울시향 음악감독 정명훈은 엿이나 먹어라!'라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나섰다.
알린스키에 따르면, 이렇듯 누군가 돌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며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주님, 저 팩트 골룸들에게 속히 신선도 높은 일용할 떡밥을 주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전략은 그 하이에나들에게 새로운 먹이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관련자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효율적인 것이 된다. 촛불시위 당시 청와대를 틀어막고 있으면서도 정부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명박의 입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적인 정당 내에서 그러한 행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온라인에 글을 쓰는 것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맞으면서 참는 모습은 결코 기존의 지지자들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왕 이명박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때의 경험을 좀 더 되살려보자. 현재 이명박의 지지율은 30%대로 나온다. 반면 촛불시위 당시에는 10% 이하로도 떨어졌다. 왜 그때에는 그렇게 지지율이 떨어졌을까? 이명박에 대한 지지율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진압과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촛불시위 당시 이탈했던 20%는,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이명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이 어떻게 잠재적 유권자를 조롱할 수가 있나'고 많은 이들이 내 지난 포스트를 보고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진보신당, 진보신당 당원이 당 이름까지 들먹였는데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따위 진보신당, 댁 같으면 찍어주고 싶겠는가? 완전 호구 집단으로밖에 안 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정당정치' 이전의 논리이다. 인간의 집단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국외자였다면,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도록 방치하는 이따위 정당에는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팩트 골룸들이 지칠 때까지, 실컷 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참고 버티겠다는 전략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매저키즘적이며, 결정적으로 진보신당의 지지자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목수정을 찍어내라, 진보신당 찍어주마'라고 외치는 자들을 지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여기서 '올바름'이란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의 문제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진보신당은 당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미시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비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돌출 행동의 발생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속한다.
따라서 인민재판을 즐기는 자들, 비정규직 문제의 기초도 모르면서 일단 맘에 안 드는 캐릭터가 나오면 까고 보는 '소비자'들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해가 되는 수가 있다. 견인합성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을 빌자면, '쉰 밥 먹고 체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둘째,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앞으로 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미안한 말이지만, 소수자 운동은 오래 하면 할 수록 '쿨'해질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소외된 자신을 끝없이 확인하면서, 자신이 억압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맨몸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 바로 소수자 운동이기 때문이다.
목수정이 이번에 보여준 '비매너'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출 행동'을 한 누군가를 당원들이 전혀 챙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듯 경험적으로 확인되면, 소수자들은 움추려들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모든 열린우리당 지지자 출신 진보신당 당원들을 폄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소수자 운동 당사자들이 돌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휘두르게 내버려둔다'는 전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학적인 행동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털릴 때까지 털리겠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이런 식의 대응은 당위적으로도 또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게다가 이번 사안의 경우, 진보정당의 운동을 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돌출 행동에 대한 '잘못된 이론화'까지 등장한 것이 큰 문제였다. 나 자신도 목수정의 문제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온라인 대중들이 젠더 혐오증에 걸려있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것을 교정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몸으로 겪어서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폭력적인 반감을 일종의 '귀찮은 부탁에 대한 거절 모델'로 치환시킨 sonnet님의 설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야만보다 더 나쁜 것은 오직 단 하나, 이성으로 포장된 야만 뿐이다. 사태가 이쯤 꼬였다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정치적'인 것과 '정치인적'인 것
'진보신당 표 떨어지는 소리 들리네요' 같은 익명의 리플, 그 대중적인 반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말을, 옳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과 '노빠 혐오자'들이 극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 글자가 빠졌다.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인적'인 행동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인식에 바탕하여 정치 행위를 펼쳐나갈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라는 최장집 교수의 견해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나 소나 다 정치가인 양, 정치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글러먹은 짓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흔히 말하는 '노빠'진영과 '노까'진영의 타협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블로거들이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에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 알린스키는 말한다. 침묵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며, 약한 개들은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다 같이 짖어야 한다고.
그게 사실 아닌가? 진보신당은 약한 개들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더욱 한 마리씩 짖다가 잡아먹혀서는 안 된다. 목수정의 기고에 문제가 있었건, 레디앙의 게재에 문제가 있었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 내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것이 전제가 되었을 때, 진보신당의 전체적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목수정 씨가 다소 무례하게 서명을 요구했다고 정명훈 씨가 받아들였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음악계의 문제에 정명훈 씨가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진보신당의 차원에서 같은 요구를 그에게 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반드시 당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발언의 포문을 열어젖히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블로거'들은 입을 닫았다. 입을 닫고 손을 씻고, 뒷짐을 지고 한참 이리 저리 걸어다니다가 '어어, 목수정 저러면 안 되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운동 하루 이틀 하나?' 같은 훈수를 찍찍 내갈기기 시작했다. 혹자는 '훈수를 두지 말자, 그리고 이러이러하게 하자'며 일종의 재귀적(再歸的) 훈수를 두기도 했다. 훈수 두는 거라면 노빠들이 빠질 수 있나. 젓가락 숟가락 들고 이 케이스에 덤벼들었다.
진보신당 당원들은 언제나 노빠들이 '집권하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훈수를 두는 행위에 치를 떨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신당 당원들이 서로 훈수를 두고 있다.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 꼴이다. 이 사안에 대해 진걱모, 즉 '진보신당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유독 극심하게 창궐한 이유는 딴 게 아니다. 입을 다물고 눈을 돌리고 비를 피하는 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미 저들은 물기 시작했고 피 맛을 봤다. 피 맛을 보게 냅두면 냅둘수록 하이에나를 쫓아내는 일은 더욱 힘들어진다. 멍청한 개들은 '쟤만 잡아먹고 물러가겠지, 우리는 살 수 있겠지'라고 말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인정하자. 그 전략은 틀렸다.
합창단을 위한 전면적인 홍보전을 펼칠 요량이었더라도 '참는 자가 이기는 자'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쇠는 뜨거울 때 때려야 하고 떡밥은 쉬기 전에 먹어야 한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고, 이제 온라인 대중들은 다른 떡밥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정말 합창단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홍보 행위를 하고 싶었다면, 목수정으로 인해 이목이 집중되었던 그 때, 목수정을 내버리지 않으면서 그 논의를 진행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정치적'인 행위이며, 빨갱이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천재성이 드러난 것도 바로 그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였다. 반면 '정치인적'으로 행위하는데 여념이 없는 '진보 블로거'들과 전직 노빠들은, 공교롭게도 이명박과 같은 생각을 한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
4. 엎질러진 물, 돌출 행동의 수습
돌출 행동이 벌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없던 일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숲에서 곰을 만났을 때, 먼 거리에서 쫓아내지 못한다면, 절대 도망가지 말고 싸우라는 내용이 미국의 국립공원 안내 표지판에 써있다고 한다. 곰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어떤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그 곰을 쫓아내거나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게 '대중적인 반감'으로 인해 반드시 실패하기만 하는 전략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목수정이 이른바 '뉴비 비호감'이라면, 비호감 중의 비호감, 비호감계의 모차르트, 강의석의 경우를 반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 국군의 날 강의석이 탱크 앞에 시원하게 벗고 곧휴를 드러내며 과자로 만든 총을 쏘고 '군대?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라는 퍼포먼스를 저질렀을 때, 진보신당 계열 블로거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의석의 사진을 올려놓으며 '나는 강의석의 퍼포먼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강의석 본인이 워낙 비호감일 뿐더러, 한국 남성들의 군대 문제에 대한 정서적 저항감도 매우 극심해서, 욕을 아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충분히 'damage control'이 되었다. 상대방이 살살 봐줘서가 아니라, 이쪽에서 확실히 세게 나갔기 때문이다.
'강의석의 저러한 행동은 평화 운동에 도움이 안 되고...'같은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혔고, 강의석은 살아났다. 50000쯤 먹을 욕을 24380 정도만 먹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강의석같은 역사와 전통의 비호감이 저지른 극도의 비호감질도 이토록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할진대, 어찌 목수정같은 극히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람의 입장에 대한 옹호가 불가능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강의석을 옹호하던 사람들 모두 강의석을 결코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텐데?
돌출 행동이 저질러지면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 한다. 혹자는 목수정을 고문관에 비유하기도 하더라만, 어차피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고 고문관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목수정을 옹호하면서도 합창단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넘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 또한 이 사태에 개입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 우리는 모두 틀렸다. 나는 이 말을 함으로써, 알량하게도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잠을 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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