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3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철학'이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아무나 내키는대로 만들어서 인생사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입하는 세계관 철학. 말하자면 개똥철학. 둘째, 이미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연구. 이럴 경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거나 특정 철학자의 텍스트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셋째, 그 누구도 다다른 적 없는 진정한 '철학'.

유독 철학에 대해서만큼은 두 번째 층위, 즉 전문적인 연구의 성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에도 엉터리 과학이 있으며 과학적 연구를 통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지식이 궁극적 목표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엉터리 과학 그 자체를 자신의 신조나 인생관으로 삼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개똥과학'의 문제는 비교적 손쉽게 반박될 수 있는 편이다.

철학의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가령 누군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기원전 300년부터 제기되었고 반박되고 있는 회의주의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하면 '너는 훈고학, 나는 진정한 철학, 너는 상아탑의 노예, 나는 거리의 철학자~ I say 철, you say 학~'같은 병맛나는 대응의 퍼포먼스가 즉각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같은 원시적인 명제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적당히 대충 쓰는 블로그 게시물 따위를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적'으로 다져진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인생관의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개똥철학이 가지는 이중적인 태도에 있다. 그들은 강단철학의 성과와 가치를 무시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 권의 책을 체계 없이 읽고 대강 두들겨 만든 엉성한 사고의 구조물이 인류적 가치를 지니는 텍스트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자기 주변의 전공자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 가령 칸트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그 칸트의 텍스트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본 누군가가 해석상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을 제시하면 '철학이라는 것에 정답이 있는 걸까' 같은 싸구려 회의주의로 도피하는 모습을 나는 최근에 모처에서 보았다. 그런데 만약 철학적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칸트는 ...하게 생각했다'는 식의 서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관 철학자들은 그런 초보적인 내적 모순 따위에 결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crank'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 수준은 대단히 미비하다. 그러나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개똥철학에서 곧장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 또한, 과학처럼 엄격한 수준은 아니어도, 역사상 앞서 나간 누군가에 대한 연구와 반박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는 어구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국내의 연구 수준은 개별적인 학자의 종아리나 허벅지까지 기어오르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우리도 거인의 어깨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등장은 독일 강단철학의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을 예로 들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대한 독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매일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접점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아직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철학의 거장이다. 하이데거의 현란한 그리스어 분석과 해석은 독일어권에서 행해진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의 성과가 없다면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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