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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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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