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05

'흑싸리 총리' 정운찬

[판] '흑싸리 총리' 정운찬

한국을 대표하는 케인시언 경제학자 정운찬 교수. 총리가 되기 위해 청문회장에 앉았다. “감세의 70%가 서민의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 경제학자는, 여론의 반발과 야당 의원들의 투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무사히’ 총리가 되었다. 이른바 ‘식물 총리’가 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식물이 되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 내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은 훨씬 절망적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차례를 지내고 서로 안부를 묻고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 추석을 맞이하여 용산참사 유가족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운찬 총리는 흑싸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흑싸리껍다구’라는 관용어구 그대로, 마땅히 내놓을 패가 없을 때 버리는 그런 패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 중 최초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은 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고, 수사자료 공개 문제는 검찰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오긴 왔습니다’라며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갔다. 원론적으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지만, 서울시에서 무리하게 뉴타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택 정책 자체가 신규 주택 건설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자료 공개는 검찰 소관이지만 예로부터 검찰은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아왔고,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각료회의의 일원이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재판은 정부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증인석에 선 경찰특공대 제1대대 대장은 “망루 내부를 파악하고 작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찰특공대는 당시 망루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시너가 몇 통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루가 건설되기도 전에 진압작전을 시작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정부 측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총리가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는 서민경제를 표방하며 서민들의 주거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안하무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르쇠 할 수가 없다. 차례가 돌아왔으니 뭐라도 내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에라, 흑싸리껍다구나 하나 버리지 뭐.

흑싸리라는 이름의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흑싸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등나무인데, 화투에 그려진 모양이 비슷하여 싸리와 혼동하게 된 것이다. 등나무는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심는 경우가 많으며 학명은 Wisteria floribunda이다. 정운찬 총리가 흑싸리가 아닌 등나무가 되어 지친 서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정부는 그를 흑싸리껍다구로 내놓았고, 낙장은 불입이다. 정 총리의 관운을 빈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5일


편집 과정에서 빠진 문구를 첨가하여 올립니다. 하긴 신문 지면에 대놓고 '고스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불만을 리플로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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