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1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

"루저"(김규항, 한겨레)의 한 구절.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대단히 교묘하게 여성주의를 엿먹이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여성주의가 '개념 없는' 소리를 '사회적 도발'인 것처럼 찍찍 해대는 짓거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의문스럽다. 마돈나는 여성이 성적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을 퍼포먼스로 즐겨 보여줬을 뿐이다. 언제 마돈나가 전 남편 숀 펜의 키가 작다고 루저라고 한 적 있었나? 마돈나가 여성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신이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터넷의 확대 재생산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발언'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발언'이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마돈나의 '발언'에는 '서명'이 존재한다. 반면 '루저녀'라고 불리며 마녀사냥을 당한 홍익대 학생은 그 발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말하자면 그 학생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몇 가지의 그릇된 통념을 되는대로 주워섬겼다가 된서리를 맞았을 뿐이다. 김규항은 두 가지를 혼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주의를 '개념 없는 소리'와 등치시킨다. '그 계급주의',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스럽다. 결국 자신에게 불편한 무언가에 여성주의의 딱지를 붙이는 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오직 자신과 같은 남성들, 혹은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계급'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런 식이라면 '씨발 나라고 정주영처럼 계집질 못할 게 뭐야, 부자들은 다 뒤져야 돼'라고 궁시렁거리는 시정잡배의 르상티망과 계급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의 사회적 재분배에 대한 지성적 요청을 구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면 김규항은 시정잡배의 날강도와 같은 사유재산 부정 발언 또한 현재의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불온'한 B급 좌파의 속내를 누가 알겠나.

이 칼럼은 참으로 독특한 텍스트이다. 남자들이 발끈하게 된 상황을 그럭저럭 적절하게 묘사하다가, 그 남성들을 발끈하게 만든 발언을 여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치환하고, 갑자기 이명박을 까는 너희들이 과연 뭐가 다르냐는 식으로 말을 돌리더니, 결국 고래가 그랬어 정기구독을 하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마무리를 짓는다. 모든 주제를 건드리는 것 같지만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진실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이 촌평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2009-11-20

오바마·이명박 공동기자회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미디어스] 한미 FTA, 자동차 재협상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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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아무도 이 지점을 문제삼지 않는 것 같아 짜증이 나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리 입으로는 부인해도, 국정의 많은 부분을 결국 조중동이 주장하는 바로 그 프레임에 따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참여당은 '친노 이익은 얻고 싶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식이고, 민주당은 재보선 세 석 얻고 좋다고 정신 놓고 있는 판입니다. 민주노동당은 북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들지, 진보신당은 NL이 싫다고 대북정책을 아예 포기해버렸지. 어휴... 한숨만 나오는군요. 이러니까 한나라당이 헤게모니를 좌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 ⓒ청와대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2009-11-16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경향신문]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세종시 문제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13일, 정부는 세종시의 성격을 ‘행정도시’에서 ‘기업도시’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시에 행정기관이 들어서지 않는 것부터가 난센스라는 것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 또 하나의 기업도시를 짓는 것은 극단적으로 반 환경적인 선택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경제적 이유를 접어두더라도 행정도시는 건설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수도를 옮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울이라는 리바이어던의 스프롤(sprawl)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현재 암세포처럼 커져가고 있다. 이름을 다 기억하기조차 힘들 만큼 수많은 베드타운이 서울 인근에 건설됐고, 그도 모자란다는 듯 정부는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 추가적으로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대도시가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현상을 ‘스프롤’이라고 하며, 이것은 인간이 환경에 끼칠 수 있는 해악 중 가장 심각한 것에 속한다.

서울 주변 신도시에 살면서 하루에 한 시간 반씩 자동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은 증가하고 지구는 병들어간다. 출퇴근 시간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나 강남 일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통 지체를 감수해야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서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며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주변 도시를 잇는 거대한 도로는 이미 그 자체로 해당 지역에 사는 생물들에게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대체로 동물들은 널찍한 영역을 갖게 마련이며, 십중팔구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그 영역을 가로지르게 된다. 야생동물을 치어 죽인 운전자들은 대체 왜 동물이 차도 위에서 얼쩡거리느냐고 분통을 터뜨리지만, 사람이 길을 놓기 전부터 동물들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이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서울 주변의 신도시들은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생활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널찍한 도로가 닦여 있고, 넉넉한 주차장이 딸린 아파트가 건설된다.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도시 자체가 보행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간단한 먹을거리라도 구입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끌고 마트에 가야만 한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프롤 현상이 단독주택들로 구성된 주택지역의 무분별한 확장과 관련되어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난립하는 신도시가 스프롤 현상의 주범인 것이다.

게다가 기업도시라니. 이미 2005년부터 지역마다 기업도시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제대로 완공돼 자립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에서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다. 조선 왕조 500년, 일제 강점 36년을 거쳐 해방 후 지금까지 6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중앙집권 체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자원이 600년간 ‘관습헌법적으로’ 수도였던 서울로만 집중되어 왔다. 한국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은 최대한 ‘중앙’과 밀착해 정부 주도의 온갖 사업을 낙찰받아 수익을 챙기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기업도시’를 개발한다 한들 기업들이 자진해서 그곳으로 가야 할 ‘경제적’ 이유가 전무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아예 수도를 옮겨야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를 변경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 전부가 서울에서 떠나는 ‘사건’이 벌어져야 이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환경을 위해서도 그러한 변화가 절실하다. 서울 주변의 난개발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실패한 기업도시는 결국 골프장 부지로 재활용되며 인근의 환경 부담을 가중시킨다. 정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기업들은 절대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정경유착 해소 및 한반도 생태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권한다.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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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지난주 월요일자에 칼럼이 올라왔어야 하는데, 부득이한 지면 사정으로 두 번 연기되었습니다. 다시 쓰고 또 다시 써서 만든 글인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군요. 저는 영화 친구의 대사를 인용해서 '니가 가라, 세종시'라고 했는데 여론독자부는 그것을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전문을 다시 읽어보니 경향의 판단이 옳은 것 같군요. 그 외에는 제가 쓴 내용 그대로입니다.

스프롤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이 이루어져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수도 변경이 있어야 한다는 제 주장은, 당연히 그로 인해 한국이 1극 중심 체제의 국가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실증적인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지는 못했으므로, 다른 자료를 접하신 분이 계시다면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11-11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내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균선에서 머물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여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농담은 절반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양심적으로 말하건대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luser'다).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 평가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할만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더 크거나 작을 수 없다. 나는 나보다 눈이 더 크거나 작을 수 없고, 코가 더 높거나 낮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잘생겼거나, 적어도 평균은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다.

남자들이 이런 식의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잘생겼다'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의 미를 논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이미 차고 넘친다. CD 한 장으로 다 가려지는 조그만 얼굴, 34-24-34, 패션 모델들은 그런 외적 기준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이기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마치 소나 돼지의 고기 부위를 평가하듯 여성의 신체의 일부만을 떼어내어 '꿀벅지'라고 부른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으로 살아가도록 강제당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가 '예쁘다'는 말을 이제 우리는 얼굴이 작다느니, 가슴이 크다느니, 콧날이 오똑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개별화·파편화하여 어떤 수직선 위에 올려놓고 언술한다. 대체 얼굴이 작은 것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가슴이 큰 여자는 무조건 미인인가? 하나씩 떼어서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얼굴이 조막만하다, 열라 예쁘다'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남자들의 외모가 전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처한 상황과는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에 넘쳐나는 외모에 대한 객관적, 수치적 평가 기준을 여자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고, 그래서 거울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괜히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500그램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정밀한 기준이 개발되지 않았다. 남자들끼리 서로 호빗이니 오크니 찧고 까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아까 꿀벅지가 언급되었으니 그걸 예로 들어보자. 많은 남자들은 '너희들은 초콜릿 복근 어쩌고 하더니'라고 난리를 쳤는데, 애초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와 남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는 사용되는 방식이 다르다. 여자들은 꿀벅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들이 나를 핥는 듯이 쳐다볼까봐 신경이 쓰이고, 동시에 예쁘지 않은 내 다리가 너무 싫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반면 남자들은 초콜릿 복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헬스 두 달 해서 배에 王자 새긴 다음 해변에서 여자 존나 꼬시는 상상을 하다가, 귀찮아서 운동 안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웹서핑이나 하면 그만이다. 아니라고 하지 말자. 남자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느끼는 최악의 자괴감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일상 속에서 늘 느끼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모른다. 어차피 외모는 주관적인 거고,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 드넓은 지구 어딘가에는 나를 나 자신으로 사랑해줄 천사같은 소녀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능... 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는 문화 컨텐츠 또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남들이 내게 못생겼다고 해도, 어차피 지들도 장동건처럼 안 생긴 주제에 그런 소리 한다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얼굴 큰 남자는 루저'라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파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180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가 나와버렸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숫자가 180인데, 이건 뭐 거울을 아무리 쳐다보면서 화이팅을 외쳐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보다 키가 크면 대체로 나보다 싸움도 잘 할 것 같고, 여러 모로 꿀리는 기분이 든다.

모든 남자의 키는 180보다 크거나 작다. 그 기준은 다른 기준과 달리 그 어떤 심미적인 판단을 통한 유도리 있는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모든 남자가 1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평가를 당하면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두 배 세 배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오공감에는 자기 어머니가 방송을 보다가 울었다는 실화인지 소설인지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은 설령 픽션이라고 해도 진실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 만큼이나 '숫자'로 표현되는 진실이다. 그 앞에서 남자들의 열등감은 비로소 진정으로 드러난다.

평가를 당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평가를 여자들은 언제나 당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의 외모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눈이 크다는 둥 가슴이 작다는 둥 양화(量化)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드디어 그 칼날이 남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평가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글을 끝내면 '그래서 지금 막나가자는 거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정 그렇게 폭력적인 평가가 싫다면, '나에 대한 폭력적인 평가'에만 반대하지 말고, 애초에 인간의 외모를 사물처럼 만들어서 함부로 논하는 이 한국 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대해서까지 문제의식을 느껴보라는 말이다. 꿀벅지가 어쩌고 슴가 사이즈가 저쩌고 얼굴 존나 큰 돼쌍년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던 자들이 난리를 치면 정말 'luser'밖에 더 되나. 당신에게 들이대진 그 잣대가 가혹하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평가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경제야'가 문제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문제야, 바보야!


[당비의생각] 2009/11/11 12:26

노정태 | 칼럼니스트

정의되지 않은 정의(正義)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강자와 약자 모두 동의하고 승복할 수 있는 공통의 규칙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의란 한낱 강자의 횡포를 치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말하는 ‘정의사회구현’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표방하는 ‘정의’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비단 정의뿐만이 아니다. 모든 ‘좋은 개념’들은 그것이 갖는 영향력만큼이나 위험성을 지닌다. 특히 최근에는 모든 이념들을 밀쳐내고 이데올로기의 왕좌에 군림하게 된 ‘경제’가 문제가 된다.

47세의 젊은 대통령 후보, 아칸소 출신 촌놈이지만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폭발적인 대중 친화력을 지녔던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터뜨렸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어 90%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던 아버지 부시(H. W. Bush)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문제는 이 ‘경제’가 대체 어떤 경제냐 하는 것이다. 당시 클린턴 후보 측 선거 전략가였던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은 미국 경제가 불경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측이 경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아군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카빌은 리틀록에 위치한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에 세 가지 사항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1. 변화 vs.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2.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3. 의료보험을 잊지 말자

이것은 엄연히 ‘내부용’ 구호였지만, 어느새 선거운동본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빌 클린턴을 미합중국의 42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3번 구호에 주목해야 한다. 오바마 또한 의료보험 문제를 놓고 정치적 자산을 건 큰 싸움을 진행 중이다. 단지 불황에서 벗어나는 것, 경기 부양책을 써서 실업률을 낮추고 GDP를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명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와 함께 리틀록의 선거운동 본부에 내걸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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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당대비평에 기고한 글입니다. 당대비평의 지면이기 때문에 이렇게 담론적인 논의를 할 수 있었던 것 같군요. 이 게시물에 리플을 달아주셔도 되고, 링크된 온라인 당대비평에 소감을 남겨주셔도 괜찮습니다.

2009-11-04

윤계상, 박재범,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

윤계상의 '좌파' 발언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수그러들었다. 변영주 감독 등 진짜 '좌파'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주었기 때문이 기도 하고, 본인이 모종의 울분의 표현으로 그 단어를 꺼내들었을 뿐 애초에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계상의 그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영화판은 원래 좌파다. 그래서 나는 소외당하고 있다'는 말을 본 사람들이 '좌파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만 말할 뿐, 그 언어의 화용이 대단히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는 '말 많으면 빨갱이'로 간주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좌파는 곧 먹물이요, 유식하다는 먹물놈들은 무식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이 아는 좌파의 개념은 잠시 접어두고 윤계상의 발언을 살펴보자. 그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표현이다. 나보다 많이 배운 먹물은 다 좌파고, 좌파는 재수없는 엘리트고, 그래서 다 싫다는 그런 수준의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변영주 감독이 인터넷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지 이 사건은 또 '윤계상 발언'으로만 다루어지고 있었다. GQ는 원래부터 인터뷰를 잘 하기로 유명한 매체였고, GQ 인터뷰가 다른 매체에 의해 재보도된 것도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터넷 언론들이 끼어들었고, 역시나 '네티즌 술렁거려' 같은 표현을 들먹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GQ를 보고 흥분한 사람은 별로 없다. 포털 사이트 대문에 떠 있는 '네티즌들이 흥분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제를 발견하여 군중에 가담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종합해보면 윤계상의 발언을 둘러싼 촌극은 결국 박재범 사건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재범이 한 말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한국인은 입만 열면 '빌어먹을 이 나라, 빨랑 돈 벌고 튀어야지'라고 궁시렁거린다. 모든 남자 고등학생들은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를 '따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박재범은 그것을 친구와 이야기했을 뿐이다. 윤계상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겪어본 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유식한 존재라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특히 어설프게 배웠거나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식이 죄냐?'라고 물을 때 이미 그는 무식한 자신에 대한 죄의식의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뻔한 소리를 한 청년들이 왜 갑자기 공공의 적이 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인터넷 언론, 혹은 그냥 언론의 문제가 등장한다. 대중들은 이른바 공인, 그 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연예인들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 연예인과 자신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를, 그래서 그도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같은 새끼일 리는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기도 한다. 내가 쇼프로를 보면서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사람 냄새'를 풍겨야 하지만, 대중들은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면 가루가 되도록 깔 준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연예인은 대중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고, 다르면서도 같아야 한다. 그 미묘한 줄타기가 무너질 때 대중들의 공격적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섹시 컨셉의 아이비가 섹스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해 무너진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대중들의 성향은 그렇고 연예인들은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스타가 구설수에 휩싸이는 것은 그 자체가 보는 이에게 재미 혹은 묘한 쾌감을 안겨주고, 어쨌건 신문 판매 부수 내지는 클릭수 증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존 매체 혹은 새로 판에 뛰어든 인터넷 매체들은 바로 그런 '껀수'를 찾아내고자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 매체들은 더 이상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 대신 네티즌들의 몇몇 반응을 기사화하여 보도를 사건한다. '보도를 사건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풀어서 설명하자면, 별 것 아닌 일을 터뜨려서 사건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박재범은 고삐리였고, 윤계상은 평범한 한국 남자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윤계상은 박재범보다 좀 더 문제적이긴 한 것 같지만, 그거야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혈기만 넘치는 나이여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보도가 그렇게 나가기 시작한 이상, 별 거 아닌 일이었던 것이 바로 대형 사건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기자들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을까?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렇다. 인터넷이 사생활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연예인에 대한 온갖 '소스'가 인터넷으로 모이게 되었고, 현장 취재 다니느라 바쁜 기자들보다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이들이 그런 요소들을 더 잘 찾아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네티즌들이 찾아낸 연예인의 사생활을 기자가 새삼스럽게 '폭로'해서 기사 하나를 날로 먹는다. 그러면서 '네티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보고 시시덕거리던 것이 포털 사이트 뉴스를 타고 모든 이에게 중요한 사안처럼 돌변해버린다.

윤계상 사건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잡지 에디터가 인터뷰를 한 경우지만, 그 외의 기본적인 형식은 동일하다. 어딘가에서 발견해낸 평범한 사실을 '네티즌 술렁' 같은 표현을 덧붙여 인터넷 매체에서 재가공하면, 비로소 그게 진짜 사건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박재범 사건의 경우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삼지선다형으로 풀어보자. 단, 복수정답은 허용하지 않는다.

① 엄한 거 까발려서 젊은이 인생 망친 디씨 코갤. ② 그걸 뉴스랍시고 보도해서 일을 부풀린 언론, 특히 동아일보. ③ 이유야 어찌 되었건 광기의 춤사위에 끼어들어서 함께 모닥불에 땔감을 넣고 북치고 장구치며 빙빙 돌고 춤을 춘 '네티즌' 전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②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디씨의 잉여들이나 이른바 '네티즌'들은 원래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고 반드시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어떤 당위적 의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대중들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거나 그에 대해 나름의 탐색을 하는 것 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연예인이라는 집단 자체가 사실상 그러한 욕망 위에 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광기어린 집착과 멸시, 동시에 쏟아지는 동경 따위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중들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언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 한국의 주류언론은 원래 저질이었고 지금도 저질이며, 거기에 인터넷 매체들까지 끼어드니 완전히 개판이 되어버렸지만, 언론은 대중과 달리 공공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가 왔다고 한들 '공론장'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공식화된 언론 매체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시민사회는 공론장에 대한 장악력을 꾸준히 잃어갔고, 대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체계'들이 의회 민주주의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공론장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18세기에는 부르주아들이 살롱이나 커피숍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소식지를 만들어서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그런 영역은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금은 사적인 공간에서의 토론이 공적인 의사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신 '체계'는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 언론들이 '네티즌 반응'을 채집하여 보도를 사건하는 현상을 나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씨인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캐내 시덥잖게 시시덕거리다가 흥미를 잃으면 내팽개치는 현상은 개가 땅에 묻힌 뼈다귀를 캐낸 후 씹다가 내뱉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잡지 에디터가 심도 깊은 질문을 해서 의외의 답변을 얻어내는 것 역시, 바로 그러라고 잡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굳이 보도함으로써 공론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언론들이 있다는 것이다.

GQ 인터뷰 전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윤계상의 발언 중 골때리던 것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인터뷰의 분위기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은 오직 그 '좌파 발언'에만 집중해서 '네티즌 술렁' 기사를 만들어냈다. 요컨대 '네티즌 술렁'은 인터넷이라는 '생활세계'로부터 '체계'가 지속적으로 약탈해가는 상아나 금, 노예같은 것이다.

물론 대중들은 잔인하다. 너무도 잔인한 나머지 그 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사생활을 파해치고 잔인하게 조롱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인류가 구석기시대부터,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를 근절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절도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소유권이 있는 한 도둑질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생활이 있는 한 폭로가 있고, 진실이 있는 한 루머가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말 그대로 근대에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유지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공론장 또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그 각각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주체 및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형성되며 또한 그로 인해 단단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생활을 까발리는 저열한 네티즌'이라는 식의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건, 바로 그런 대중들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대중사회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것을 개입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터넷질을 하다가 남의 사생활을 깠다고 해서 그게 공론장을 더럽히는 행동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행위는 개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공론장과는 무관하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토론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론장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나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오공감의 떡밥을 물어서 끼어든다면, 이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아니다. 이글루스 사용자들, 혹은 '네티즌'이라 할 수 있는 일부만을 염두에 두고 그 글을 쓴다면 분명히 그렇다. 반면 보편적인 사회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매체에 기고를 한다면 그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될 수 있다. 구경꾼의 숫자가 아니라, 발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경꾼의 속성이 핵심이다.

숫자만 많다고 해서 그 청중들이 공론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가 적어도 공적인 사안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면 공론장이 된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인사청문회를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선덕여왕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지만 전자는 공론장에서의 토론이고 후자는 그냥 문화적인 컨텐츠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비슷한 차원에서 나누어볼 수 있다. '신상 까기'는 야만적이기는 해도 공론장의 기능 내지는 속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요소를 뒤섞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태는 정 반대로, 공론장을 구성하는 체계가 대중들의 '사적 폭로'를 공적인 사안으로 무리하게 격상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익명의 네티즌들은 누군가의 실명과 인적사항 따위를 폭로하면 '복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현상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질문을 해보자. 왜 그게 복수가 될까? 가면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가상무도회에서 쫓겨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을 가진 개인으로 격하되는 것, 인터넷 마을에서 쫓겨나는 것 등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털린 자'들은 버로우를 타고 네티즌들은 그것으로 응징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박재범의 사례에서도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마이스페이스를 뒤져서 지난 이야기를 찾아내고 폭로하는 것은 디씨에서 누군가의 신상을 털때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 이름이나 전화번호, 학교 등을 통해 일단 싸이 주소부터 알아내고 거기서 사진첩을 샅샅이 뒤지는 게 신상 털기의 일반적인 행태라고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문제는 개인들의 이러한 사적인 난장판에, 공공의 것으로 기능해야 할 언론이 클릭수 장사를 하기 위해 빨대를 꽂아넣고 있다는 것이다(그로 인해 이제 인터넷의 개인들은 언론이 바로 그렇게 보도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추적하기도 한다. 박재범 사건에서도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 같다).

전자와 후자 모두 비판의 대상이지만 전자를 비판할 경우 '내 탓이오, 우리 모두의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사실 없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네이버 메인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내 매체들의 기사 수준은 정말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공론장이 엉망인 이유로 네티즌들을 꼽는 것은 손쉬운 답변이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언론이 원래 저질이었고,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저질이 되고 있을 뿐이다.

언론 산업의 구조를 도외시한 채 네티즌만을 비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본말전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윤리적' 잣대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함으로써 공론장을 현재의 수준으로 고착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지금 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자.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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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미디어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급하게 써서 논의 전개가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유로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손을 떼고, 그로 인해 더 큰 맥락에서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적어도 정치적 개입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 순간마다 판단의 기준이 모호하다면 그게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읽어주신 분들의 소감과 지적을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