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라 우리는, Furman V. Georgia 사건에서 보았듯이, 사형 행정에서 자의성과 불평등성을 없애고자 하는 헌법적 노력이, 근본적인 평등의 필수적 구성 요소의 함축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행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Lockett v. Ohio, 438 U.S. 586 (1978)판결을 보라.”
“형사소송법과 실질적 규제의 조합으로는 사형 처벌을 헌법적 결핍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체제가 정확하고 신뢰할만하게 어떤 피고가 ‘죽을만 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기 어렵다.”
“공공 여론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헌법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벌로서의 사형은 당연히 사형제 자체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집행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집행되지 말아야 한다. (강조는 저자)”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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