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4

시바스 리갈과 비키니

MBC의 부장급 여성 직원께서 52년만의 맹추위를 무릅쓰고 벗어주신 덕분에 이 논란의 본질이 또렷해졌다. 사안의 본질은 섹스 혹은 젠더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인간 혹은 생물의 본능적 욕망인 섹스 그 자체와, 그 위에 덧입혀진 군사독재 시절 혹은 ‘유교 꼰대’적 문화의 갈등이 이 사안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개방적인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섹스 위에는 문화적 레이어가 존재한다. 상호 합의된 자유로운 성욕이라는 최소한의 개념에도 역시 근대적 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좀 덜 개방적인 문화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 ‘가문간의 결합’, ‘인구학적 지속 가능성’ 따위가 섹스의 직접적인 노출을 막는 차단막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기제가 단지 문화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권력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경우이다. 가령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은 젊은 여자를 끼고 놀고 싶다는 욕망을 ‘조국 발전에 힘쓰시는 각하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일로 승화시켰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는, 그만큼 성폭력에 대해서도 둔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치, 거스를 수 없는 대의를 타고 누군가의 욕망이 흘러넘칠 경우,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들이 그것을 거스르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는 성욕 억제제를 먹고 있으니 안심하고 비키니 사진을 보내라’고 김용민은 말했다. 육 여사를 잃고 나라 근심에 지친 각하를 달래드리는 거지, 결코 네놈들이 생각하는 그런 천박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박정희의 채홍사들은 둘러댔을 터이다. 나는 두 발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권력’을 단지 국가나 젠더 사이의 위계적 차이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풍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다. 대체 MBC의 그분은 왜 벗었는가? ‘이건 단지 찧고 까부는 건데 너무 진지하게 비판한다’는 항변의 뉘앙스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애들 장난인데 왜 그래?’라고 말하고 싶고, 그러므로 ‘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무색하게 하기 위해 ‘언니’로서, ‘선배’로서, 혹은 ‘형님’으로서 총대를 매는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보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이제 문제의 ‘비키니녀’들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나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은 다만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탐스러운 육체를 많은 이들에게 과시하고픈 욕망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벗을 수 있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레진 블로그에 축전을 보내고 공개되고 서로 좋아라 하는 그 행위에는, 지금의 이것과 같은 이중의 음습함이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와 가카를 깔 수 있는 자유 등등, 절대적 까방권이 될 수밖에 없는 선량한 대의가 마치 입안에 감도는 미원의 맛처럼 뒤덮혀있다는 것이다. 수신자 정봉주와 엿보게 되는 수많은 남자들을 흥분시키려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그와 같이 고상한 목적으로 사탕발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꼼수에서 둘러대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섹스에 대한 권력적 포장을 완성시킨다.

‘나는 자발적으로 벗었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데, 정작 그 자발적인 육체의 섹슈얼한 맥락은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가운데(혹은 “찧고 까부는” 일이라는 식으로 모에빔 처리되어), 국가와 민족과 민주주의의 성전에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비키니 사진을 보내는 이들을 슬럿워크와 비교하는 것은 그래서 결코 온당하지 않다. 슬럿워크는 추상적인 여성의 자유를 ‘홍보’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게 아니라, 걸레처럼 싸보이게 입고 다니는 것 자체가 여성의 자유의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꼼수를 듣고 지지하고 응원의 사진을 보낸 여성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꼼수를 ‘초월’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과 이후의 어정쩡한 해명을 통해 김용민과 나꼼수 제작진이 만들어낸 ‘섹스를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변태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적인 맥락 작용을 추인해버린 것이다.

정봉주의 발기를 기대하고 벗었다면 왜 본인의 진실을 말하지 못할까? 벗긴 벗되 그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바라고 비키니를 입은 채 가슴을 모아올렸나? 비키니 응원녀들의 두 개의 진심은 모두 순수하고 진정성 넘치는 것이기에, 서로 충돌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재미를 보는 건 결국 꼭데기에서 그 구조를 만들고 조정하는 자들 뿐이다. 박정희의 섹스가 국가와 민족의 과제로 승화되던 그 변태성이, 역시나 이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에서 나는 ‘마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꺼내서 과시하지도 못하는, 자칭 민주투사들이 서로 민망하게 노는 모습이 유출되었을 뿐이다. 정봉주가 옥중에서 투약한다는 성욕감퇴제가 대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 남자들이나 그 여자들이나 결국 태극기 망또를 두르고 민중가요 부르며 팬티를 벗어재끼는 변태들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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