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1

실수, 기록, 실험실

이처럼 실수의 수를 늘림으로써 힘을 얻는 기술적 장치로 실험실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과 과학자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들간의 차이는 인식적 기반이나 사회적 기반에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인은 탐욕스럽고, 자기 이해관계로 가득차 있으며, 근시안적이고, 혼란에 빠져 있으며, 항상 협상할 태세가 되어 있고,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고들 하는 반면, 과학자는 사욕이 없고, 멀리 내다보며, 정직 내지는 최소한 엄격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며, 확실성을 추구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많은 차이들은 모두 하나의 간단한 물질적 차이를 인위적으로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인즉, 정치인은 실험실을 갖고 있지 않고 과학자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실물 규모에서 한 번에 한 건씩 작업하며, 지속적으로 세상의 이목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이런 일들을 그럭저럭 해내며 “저 바깥에서” 성공을 거둘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반면 과학자는 축소 모형을 가지고 작업하며, 자신의 실험실 내에서 실수의 수를 늘리면서도 대중의 눈으로부터는 감추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고, 모든 실수를 해봄으로써 “확실성”을 얻기 전까지는 실험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중 한쪽은 잘 “모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잘 “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는 “지식”에 있지 않다. 만약 우연히 이들의 위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면, 이제 실험실에 있게 된 바로 그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이던 정치인은 정확한 과학적 사실들을 뽑아낼 것이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실물 규모의 정치구조의 키를 잡게 된 정직하고 사욕이 없으며 엄격하던 과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지고 불확실하며 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과학의 특수성은 인식적, 사회적, 혹은 심리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규모를 역전시켜 대상을 읽을 수 있게 만들고 시험을 더 자주 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실수를 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실험실의 특수한 구성에 있다.

나에게 실험실을 달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들어올리리라(브루노 라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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