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6

[2030 콘서트] 내가 보수논객이다

지금보다 열살가량 어렸던 시절, 한창 혈기 넘치던 나는 지워버린 블로그에 이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이 박힌 젊은이는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안보를 걱정하는 좌파로 살 것인가, 분배를 근심하는 우파로 살 것인가.”

이런 식의 ‘자기 인용’이 대단히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보니 저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의 사설을 검토해보자. 이른바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쪽이건 그 반대편이건, ‘유능한 재외동포가 국내에 들어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우리가 박탈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국민국가 체계 속에 살고 있다. 국민국가 시스템의 핵심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며, 국민은 국가의 일원으로 그 ‘공적 폭력’의 일부가 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국민 중 군복무에 지장을 주는 장애를 갖지 않은 남성은 징집 대상이 되며, 그 외 국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그 깃발 아래 적국의 국민을 죽이거나 그 일에 협력한다는 뜻이다. 미 해군에서 군복무를 한 김종훈 전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 해군의 수병들과 함께 ‘Sailor’s Creed’를 수도 없이 복창했을 것이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충성 맹세(Oath of Allegiance)”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전투 및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그 선언문 속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참조: http://deulpul.net/3932189).

이것이 국민국가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다른 국민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고, 그에 대비하는 무력집단이 바로 국가다. 그리고 국적은 어떤 사람이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여부를 지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신분상의 지표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혈맹’이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며 특히 국제정치는 더욱 그렇다. 지금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의 그것과 자주 충돌한다. 외국인에게 외교, 안보, 국방과 관련한 고급정보가 수도 없이 오가는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는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스스로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이 사안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른바 진보진영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반대로, 가령 본명이 로버트 할리인 귀화 한국인 하일씨가, 심지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미국에서 장관 후보로 지명되는 모습을 진지하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한국 국적조차 없었던 누군가를 장관으로 뽑으려다 실패하는 것은 왜 ‘안타까운 일’로 간주되는가?

미국인으로서 충성 맹세를 하고 30여년을 산 사람이, 단지 한국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적도 없는 상태에서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어떤 한국인이 이른바 ‘코시안’ 혹은 ‘다문화’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미국인이 단지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장관 후보가 되는 것은 인종적 편견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한쪽에는 불이익을, 다른 쪽에는 특혜를 주고 있지만, 둘 다 인종차별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관을 미국인 중에서 뽑는다. 상식선에서 반대하면 충분한데, 그걸 지적하는 이석기 의원은 무책임하게 ‘CIA 스파이설’을 퍼뜨렸고 진보언론이 편승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스파이가 아니어도 한국의 장관 후보로 부적절했다. 한국계 미국인은 국적상으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국가관이 이 모양인데, 국가정보원 직원은 유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보수논객 변모씨는 그 국정원에서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이 ‘넓은 의미에서’ 북한 추종자라고 강연한다. 촛불시위에 꼬박꼬박 나갔던 진보논객이 나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스무살의 고민은 서른살이 되어도 여전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보수논객 해야겠다.


입력 : 2013.03.06 21:31:56 수정 : 2013.03.06 23:29:4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62131565&code=990100&s_code=ao051#csidxc053004a959f015a2ad9f881c450edd

워즈니악이 제주 여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상이 되는 글은 여기. "美 컴퓨터 고수, 제주 女고생에 e메일로 ‘격려 답장’"

워즈니악 본인이 말을 꼬아서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이 한 번역에 이러저러하게 토를 다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데 오해의 여지가 있어 첨언한다.

어플리케이션들은 마치 가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틀을 만들지 않는 이상 무한한 종류의 가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미래에 커다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위에 링크된 기사의 마지막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저것은,

Apps are like furniture. There are infinite variations until we have a few standards that change little. So this is a huge opportunity in the future.

의 번역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우리가 그다지 바꿀 게 없는 몇몇 표준형을 갖게 될 때까지, 무한히 많은 변종들이 있(었ㅅ)읍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문장도 말이 된다.

우리의 삶이 '앱', 혹은 컴퓨터과 맺는 관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가구로 뭘 할지 이제 대충 다 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의자에 앉고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등등. 우리는 '책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상'이라는 단일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저기서 말하는 "standard"일 것이다.

반면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지금도 계속 새로운 소프트웨어, 혹은 서비스의 범주가 창출되고, 또 사라진다. 사람이 컴퓨터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표준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 혼란과 부정형성이 아직 '열린 기회'의 역할을 한다고, 그러니 앞질러 좌절하지 말라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그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컴퓨터 혁명이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하고 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음을 뜻한다. '당신이 잡스랑 같이 애플을 만든 워즈죠? 그럼 저는 당신같은 슈퍼스타가 될 수 없겠네요?'라는 가상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소리.

그러니까 이렇게 착하게, 시제도 묘하게 어긋난 문장을 써가며 제주도의 한 고등학생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편지를 읽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선량한 사고와 친절한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을 어느정도 역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