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포유동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새끼가 어미의 젖을 먹고 크는 동물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리너구리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포유류는 그렇다. 그리하여 포유류는 배꼽을 가지고 있다. 어미의 자궁 속에서 산소와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하기 위한 생명줄이 탯줄이며, 탯줄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배꼽이다.
포유동물의 아기들은 종종 태어나는 과정에서 탯줄이 목에 감겨 죽곤 한다. 여태까지는 생명선 노릇을 했던 탯줄 때문에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한 번 끊어진 탯줄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다. 태어나는 것은 곧 이별이다. 탯줄을 제때 끊지 못하면, 그것이 목에 감기기라도 하면,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없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나눌 때, ‘걔는 탯줄을 잘 잡아서’ 같은 표현을 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탯줄을 잘 잡았다니, 무슨 말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누리고 부족함 없는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소리다.
궁지에 몰린 자신에게, 마치 동화 ‘햇님 달님’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청년 세대는 철저히 체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탯줄을 잘못 잡으면 떨어지고, 탯줄을 잘 잡으면 올라간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탯줄 결정론’이라고 명명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호응을 얻는,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혹은 지구 전체의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해왔던 관념일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양반과 상놈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기타 등등.
탯줄 결정론을 극복하기 위해 박혁거세는 본인이 포유류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했다. 포유동물이 아니라 난생동물이라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탄생 설화를 퍼뜨린 것은, 그의 부계 혈통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똑같이 나라를 세웠어도 백제의 비류와 온조는 부여의 왕족임을 천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탯줄을 잘 잡은 비류와 온조는 탯줄을 과시했지만, 탯줄을 잘못 잡았던 박혁거세는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포장해야 했을 터이다.
그 후로는 탯줄 달고 태어나는 포유동물의 역사였다. 비로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고, 남쪽은 미국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핵우산을 포함한 군사적 안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값싼 공산품을 생산하여 주기를 원했다. 북한과 맞서기 위해 경제와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박정희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고도성장이 시작되었고,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것만 같았다.
2014년은 단기로 4347년이다. 4347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대다수의 인구 구성원들이 탯줄 결정론을 부정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팔자’가 달라진다고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문제는 그 예외적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요구해야 할, 당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일 테지만,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 너는 탯줄을 잘 잡았구나, 너희 집이 원래 부자라서 그런가보구나, 비아냥거리고 냉소하는 젊은 세대의 태도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로, 그들의 목에 감긴 탯줄로 인해 질식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튼튼하고 좋은 탯줄을 잡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승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예정된 그런 포유동물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탯줄에 목이 졸려 죽어갈 때, 다른 이는 좋은 탯줄을 잡고 그들만의 천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4000년의 부조리와 불공정한 질서가 돌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이여, 탯줄을 끊어라.
입력 : 2014-03-30 20:38:35ㅣ수정 : 2014-03-30 20: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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