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진보면전에 내다꽂은 ‘도덕 이론’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1만3000원
지식인의 임무는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지성을 이용하여 그 어떤 감정적 반응을 내놓기에 앞서, 대상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실용적인 책이다. 진보 정당들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까지를 포함해 넓은 의미의 ‘진보’라 부르는 강준만은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200쪽)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는 판단한다.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진보가 ‘싸가지’를 상실하고 있는 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전체 유권자를 대략 보수 40%, 진보 40%, 중도파 20%로 나눈다면, 그 중 중도파 20%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이 책의 부제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이라고 강준만은 주장한다. 그가 조너선 하이트, 조지 레이코프 같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논의 전개와 결론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는 분위기나 경제적 유인에 좌우되는 ‘중도층’이 아니라 자신들의 확고한 윤리 체계를 가진 사람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40%의 콘크리트 보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강준만은 이 책에서 보수가 아닌 진보의 ‘싸가지 없음’을 분석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싸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그런 의미에서 ‘도덕 이론’을 한국에 적용했다기보다 한국의 진보세력의 면전에 ‘도덕 이론’을 내다 꽂은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지난 8월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워낙 제목이 강렬해서인지, 아니면 강준만이라는 ‘원조 논객’의 영향력이 살아 있어서인지, 즉각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진보의 문제는 싸가지가 아니라 콘텐츠가 없다는 것’이라는 반박을,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수사법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들이 정치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는 촌평을,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진보는 공감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문제’라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남겼다.
기사를 유심히 읽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그 누구도 저 각각의 코멘트를 내놓을 시점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읽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 명의 논객들은 각각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제목만을 두고 각자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던 논의를 하나씩 꺼내어 늘어놓았을 뿐이다. 결국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 대한 토론은 온데간데 없고,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세 마디 어구에 대한 가벼운 설왕설래가 벌어진 후 사람들은 이내 관심을 잃어버린 듯하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이 보여주는 진보의 현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미국의 도덕 이론을 원용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유권자에 대한 심층 분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책을 읽지도 않은 다른 지식인들은 그저 제목만을 놓고 입씨름을 벌인다. 특히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면, 한국의 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문제인 것 같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 번역가>
2014.09.30ㅣ주간경향 109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9231101121&code=116&s_code=nm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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