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3000원
숙종 30년, 서기로는 1704년이 되던 그해, 기계 유씨 가문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유정기는 예조에 문서를 올렸다. 자신이 이미 14년 전 쫓아내어 따로 살고 있는 부인 신태영과 완전히 법적으로 결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은 이 희한한 소송에 대한 책이다.
양 부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혼인 관계를 청산하는 법적 절차가 조선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조선이라고 이혼이 없었던 나라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이혼 사례가 <실록>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즉 “<경국대전>의 이혼이라 함은 중혼(重婚)에 관한 처벌이며, 또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경우”(28쪽)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혼은 여성에 대한 처벌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유정기는 이미 14년 동안 쫓아내고 있었던 부인 신태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즉 성적으로 일탈하였다고, 그리고 시부모에게 험한 말을 하고 제사용 그릇에 오물을 섞었다고 고발했다.
유정기의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널리 퍼진 인맥의 힘으로 처음에는 임금인 숙종에게서 이혼 허락을 받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민진후가 반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장기화된다. 유정기가 내놓은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거나, 조작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신태영 본인, 신태영의 몸종 등 ‘양반 남자’인 유정기에 비해 낮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을 받아주면 ‘아랫것’이 ‘윗분’을 고발하는 셈이니 신분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편의 주장만 듣고 법에도 없는 이혼을 허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제목이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태영이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근본주의 국가였다. 신태영은 죄인, 혹은 피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채 ‘이혼 소송’을 겪어야 했다. 남편 유정기에게는 사회적 신분, 가문의 권세, 심지어 아내를 내쫓은 후 함께 살고 있는 첩까지 있었다. 반면 신태영은 유정기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큰아들의 집에 머물다가 옥에 갇혀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신태영이 한글로 쓰고 누군가 한문으로 옮긴 항변서, 즉 공초만이 남아 그의 영민함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기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차별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든 제도를 중국에서 베껴왔지만 여성과 노비를 차별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재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이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혼한 부인의 아들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그 남자 양반들 역시 어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의 출세길을 막는 꼴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목을 조르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성차별의 역사가 유구하게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호주제는 2008년에 와서야 폐지됐다. 신태영‘들’의 이혼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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