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이 보이던 태도는 기존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버리고 여성 활동가들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 활동가들에게 넘어온 것은 발언의 권리가 아니라 발언의 의무였다. 이런 구도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 것은 남성 활동가들의 정치적 수동성과 무지를 변명해주는 편리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20여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되어 온 무지한 남성"에게 여성주의적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은 여성 활동가들이 져야 했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겸허함을 칭찬하고, '배우려고 질문하는 자세를' 기특해 하고,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실수를 용서해 주고, 계속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피는 것은 이 구도 속에 있던 여성 활동가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버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은 동일한 성별 구도의 양면이다.[각주]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 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 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주] 질문하는 권력과 대답해야 하는 고통은 다양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수없이 실천되는 권력관계의 한 양상이다. 내가 만난 여성 활동가들 중 특히 남성 중심적 조직 안에서 별다른 여성 연대나 지지 집단 없이 활동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로 "찍히"거나 "커밍아웃"을 한 뒤 끝없는 질문에 끝없이 대답해야만 했던 고통을 토로했다. 여고은은 주변의 "맑스주의자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시비를 걸어" 왔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은 절대 얘기 안 하"면서 "당신은 페미니즘 진영의 대표로서 대답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의 태도를 고발하기도 했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내가 물으니 너는 당연히 설명해줘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공분을 샀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233쪽. 강조는 인용자.
2016-08-25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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