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여장시키는 행사를 요즘에도 여기저기서 하는 모양이다.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적용할 때 불편한 일이다.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여자같이 꾸민 모습'을 품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비하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답지 않게 꾸민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니만큼 동성애, 크로스드레싱, 트랜스젠더에 대해 적대적인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젠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반해, 하위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치에 남자들을 억지로 구겨넣은 후 남자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행사다. '여자다운 꾸밈'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며 그의 인격적 존엄은 짐짓 무시된다. 즉, 여성성을 조롱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장을 한 남자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 결과,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인 이성애자 남자들을 '여자'로 만드는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종종 역설적으로 해방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다움'이 비하와 멸시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맥락에서는 어떨까? '여장남자 대회' 역시 품위를 획득한다. 미국의 유명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에서 '남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성'을 어떻게 현시하는가, 즉 '드래그'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리얼리티 쇼다. 그곳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는 미적 도전 과제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상식에 기반해 9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학자 전우용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위에서 설명한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가 여장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남자인 친구들이 당황하고 벌벌 떠는 모습과, 그런 꼴을 보고 웃어대는 여학생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전우용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전우용은 태세를 전환하여 '메갈리아'와 '미러링'을 두고 근엄한 태도로 훈계를 하는 것이다.
아주 원론적인 차원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아들마저 설득하지 못했다는 그의 경험담은 여성차별에 대한 전우용의 식견이 매우 얄팍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도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문 지면에 해당 주제에 글을 쓴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전우용의 막내아드님, 혹은 그와 유사한 분노를 느끼는 남자들에게, 내가 대신 대답해 주겠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열리고,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이 여자들에게 놀림감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 자체를 천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구조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이 '여장'을 할 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전략적 발화로서의 '미러링'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미러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는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춰보이는가? '용모 단정'한 여직원을 뽑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지하철에서 분가루 날리며 화장하는 여자'라는 상상 속의 마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여성 차별이 보이지 않는가?
'여자처럼 꾸미되 꾸밈을 드러내지 말라'는 모순된 사회적 요구에 여성들은 짓눌려 있다. 그러나 '거울도 안 보는 남자'들의 눈에는 이런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거울 좀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입력 : 2016.09.25 21:02:04 수정 : 2016.09.26 09:59: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52102045&code=990100&s_code=ao122#csidxcac882c268f09ea9f7f21300ee443a2
2016-09-25
2016-09-23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
트위터에서 몇 차례 지적을 했더니, 역사학자 전우용(@histopian) 씨는 내 계정을 블락하였다. 그런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해 왜곡된 의견을 내놓는 그의 행태가 비판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쓴다.
전우용은 경향신문에 "혐오의 상승작용"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링크) 여성 대 남성의 성비가 3:1인 고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막내아들이 겪었던 '고초'를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남학생들에게 '원치 않는 여장'을 강요하고 여학생들이 투표하게 하는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다행히 자기는 강제 출전당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지만, 강제로 ‘여장’당하며 민망해하는 친구들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 고등학생이 느낄법한 뻔한 '분노'인데, 전우용은 그런 시시껄렁한 사건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녀석이 살아온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계와 달랐다. 집에서 아들이라고 대우받은 적도 없고 학교에서는 언제나 여자 선생님들에게 순종했으며, 여자아이들에게 종종 ‘타자화’ 대상이 되었으니,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게다."
전우용의 작은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역사학자'님이, 아직 세상의 쓴맛을 보지도 않은, 게다가 자기 아들이므로 혈육에 의한 끌림과 가중치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편향적 경험에 대해, 대단히 큰 의의를 부여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것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고 전우용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줄기차게 비판당한 바와 동일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그것도 남들 기분 나쁘게 하는 점잖치 못한 소리인데, 그런 걸로 여성혐오를 극복하려 해봐야 도리어 반감만 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대목에서 전우용은 '여장 시켜놓고 깔깔거리고 쳐웃는 저 기집애들 줘패고 싶은 남자 고등학생'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여학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거나, 못하거나,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고 외모 품평을 하는 것, 그것을 전우용은 "미러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은 무엇을 비춰보이고 있는 것인가? 여성적으로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건 없건, '여자니까 여자답게 꾸며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외모 품평에 나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전우용은 이미 '억울한 남자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미러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거울에 비춰 보이는 모습이 왜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키는지 되짚어볼만한 냉철함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막내아들을 달래려다가 도리어 '남자로서의 분노'를 공유해버린, 어른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자아를 고스란히 폭로해놓고는, 그걸 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된 양 신문 지면에까지 칼럼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전우용이 '너희 남자애들은 그렇게 1년에 딱 하루 외모 품평을 당하지만, 잘 생각해보렴, 여자애들은 지금도 계속 외모 지적을 당하고 품평 당하고 있잖니. 너와 네 남자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지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면, 아마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하지만 전우용은 '여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가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장남자 가장무도회라는 '미러링'을 겪은 아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이런 협소한 남성중심적 시각과 협소한 세계관, 그리고 SNS에서 욕먹은 사실을 굳이 앙갚음하기 위해 신문 지면까지 동원하는 '선택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진보 진영에서 주요 필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 진영의 인적 쇄신 및 젠더 감수성 회복이 절실하다.
전우용은 경향신문에 "혐오의 상승작용"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링크) 여성 대 남성의 성비가 3:1인 고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막내아들이 겪었던 '고초'를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남학생들에게 '원치 않는 여장'을 강요하고 여학생들이 투표하게 하는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다행히 자기는 강제 출전당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지만, 강제로 ‘여장’당하며 민망해하는 친구들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 고등학생이 느낄법한 뻔한 '분노'인데, 전우용은 그런 시시껄렁한 사건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녀석이 살아온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계와 달랐다. 집에서 아들이라고 대우받은 적도 없고 학교에서는 언제나 여자 선생님들에게 순종했으며, 여자아이들에게 종종 ‘타자화’ 대상이 되었으니,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게다."
전우용의 작은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역사학자'님이, 아직 세상의 쓴맛을 보지도 않은, 게다가 자기 아들이므로 혈육에 의한 끌림과 가중치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편향적 경험에 대해, 대단히 큰 의의를 부여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것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고 전우용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줄기차게 비판당한 바와 동일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그것도 남들 기분 나쁘게 하는 점잖치 못한 소리인데, 그런 걸로 여성혐오를 극복하려 해봐야 도리어 반감만 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 고등학교의 ‘교육 프로그램’도 미러링에 해당하지만, 역효과가 더 컸다. 질 나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쓰는 온갖 추잡한 말들을 그대로 복제해서 남자 일반에게 돌려주면, 남자들이 회개할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여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남성성’을 내면화하게 하여 여성주의가 그토록 혐오하는 ‘폭력성’의 저변을 확대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전우용은 '여장 시켜놓고 깔깔거리고 쳐웃는 저 기집애들 줘패고 싶은 남자 고등학생'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여학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거나, 못하거나,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고 외모 품평을 하는 것, 그것을 전우용은 "미러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은 무엇을 비춰보이고 있는 것인가? 여성적으로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건 없건, '여자니까 여자답게 꾸며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외모 품평에 나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전우용은 이미 '억울한 남자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미러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거울에 비춰 보이는 모습이 왜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키는지 되짚어볼만한 냉철함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막내아들을 달래려다가 도리어 '남자로서의 분노'를 공유해버린, 어른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자아를 고스란히 폭로해놓고는, 그걸 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된 양 신문 지면에까지 칼럼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전우용이 '너희 남자애들은 그렇게 1년에 딱 하루 외모 품평을 당하지만, 잘 생각해보렴, 여자애들은 지금도 계속 외모 지적을 당하고 품평 당하고 있잖니. 너와 네 남자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지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면, 아마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하지만 전우용은 '여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가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장남자 가장무도회라는 '미러링'을 겪은 아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이런 협소한 남성중심적 시각과 협소한 세계관, 그리고 SNS에서 욕먹은 사실을 굳이 앙갚음하기 위해 신문 지면까지 동원하는 '선택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진보 진영에서 주요 필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 진영의 인적 쇄신 및 젠더 감수성 회복이 절실하다.
2016-09-19
『탄탈로스의 신화』가 출간되었습니다
책에 적혀 있는 발행일은 2016년 9월 1일, 실제 발행일은 9월 8일. 아무튼 책이 나왔습니다. (구입: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잡지 도미노에 실렸던 원고들을 중심으로, DT3에 수록된 "스테일메이트"를 많이 고쳐 쓰고, 도미노에 싣지 않았던 "진리와 동굴"을 추가한 후, 순서를 정렬하고 업데이트하여 만들어낸 책입니다.
그러나 책은 책으로서 별개의 맥락을 지니는 법. 이미 도미노를 읽어온 독자라 하더라도, 『탄탈로스의 신화』를 통해 사뭇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글을 썼던 나 스스로도, 도미노 동인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그 때와는 다른 독서의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는, 비유하자면 저의 첫 번째 개인전과도 같습니다. 그럼 『논객시대』는 무엇이었느냐, 역시 비유하자면 졸업 전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 논객'으로서, 아무튼 '그때 그 논객'들의 영향권 하에서 지적으로 성장해왔던 개인사적 맥락을 당대의 분위기와 엮어, 한 편당 충분한 지면을 활용하는 본격 서평의 형태로 뽑아낸 것이니만큼 '졸업'의 느낌이 강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탄탈로스의 신화』는 전례가 없는 책입니다. 적어도 내가 한국어로 읽어온 텍스트 중에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결과물은 없었습니다. 저자의 말에 써놓은 것처럼 나는 에세이스트이고자 했으며, 에세이스트가 아닌 그 무엇도 되고자 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셈입니다.
앞으로도 같은 종류의 작업만을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세이스트의 글쓰기는, 다른 그 어떤 요소와도 뒤섞일 수 있지만, 대량생산은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금년 중으로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가제)이 출간될 예정이며,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체와 방법론으로 여성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룹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계약된 번역서가 있고, 모 출판사와 논의중인 단행본도 있는데, 그것은 대선 국면이 불타오르기 전에 세상에 나와야 합니다.
『탄탈로스의 신화』는 도미노 총서의 첫 번째 책입니다. 도미노에 실렸던 원고들을 개고하거나, 아예 도미노 필진이 처음부터 글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도미노 총서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 권이 나왔고, 올해 11월 언리미티드 에디션 이전에 세 권을 더 출간할 계획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적 풍경을 만들고 또 지배해왔던 문학계의 주요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새로운' 잡지를 펴내고, '신선한'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를 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만, '정말 그게 새로운 것인가,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낡음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제가 『탄탈로스의 신화』를 써냈다는 것, 도미노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것, 도미노 총서의 발행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 그 모든 요소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와 제 동료들의 작업은 '낡은 새로움'을 윤색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 무언가와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와 도미노 총서가 새로운 시대의 전범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미래로 향하는 추진력을 얻고자 시도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남들이 해내지 못했던 무언가를 해냈습니다. 다른 필자들 역시 각자의 성취를 거두었고, 나름의 자부심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야 할 시점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 그리고 도미노 총서의 출간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자 여러분들의 독서 경험 속에서 개별적으로 피어나겠지만 아마도 거의 동일한 곳을 향할 것입니다. 그 방향에,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이어폭스가 PDF 파일을 자체 리더로 읽지 않을 때
수년간 나를 괴롭혀온 버그. 나는 파이어폭스에 내장된 자체 PDF 리더를 선호하는데, 문제는 파이어폭스가 종종 "Portable Document File"과 "PDF file"을 별개의 항목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전자에는 "Preview in Firefox" 설정이 먹히는데 후자에는 다운로드하거나 뭐 할지 물어보거나 둘밖에 없음.
후자의 이상한 옵션이 생기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파폭 전체를 리셋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렇게 하면 "PDF file" 선택지가 사라지고, PDF를 파이어폭스에서 직접 읽으면서 zotero에 저장하고 노트를 첨부할 수 있음.
후자의 이상한 옵션이 생기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파폭 전체를 리셋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Troubleshooting Information -> Profile Directory -> Show Folder 클릭 -> mimeTypes.rdf 찾아서 삭제.
이렇게 하면 "PDF file" 선택지가 사라지고, PDF를 파이어폭스에서 직접 읽으면서 zotero에 저장하고 노트를 첨부할 수 있음.
2016-09-13
[북리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성 지배
피에르 부르디외, 동문선, 1만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피에르 부르디외는 알제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전공은 사회학이었지만, 알제리대학교에서는 알제리의 카빌 지역 내 전통 사회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했던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바로 <남성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남성 지배'라는 현상에 대해 민속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남성 지배',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그 현상은 이른바 "공론(公論)의 모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잘못된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로 인한 억압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남성 지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강요되고 강요받는 방법 속에서 그러한 모순된 순종의 예를 줄곧 보아 왔다."(7쪽)
우리는 이 책의 논의 대상인 알제리의 카빌 지방, 그곳에 살던 베르베르족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성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동원했던 논리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카빌 사회에서처럼 성의 질서와 성의 차별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우주를 주관하는 대립의 총체 속에 잠겨 있는 세계에서, 속성들과 성행위들은 인류학적이고 우주론적인 결정들로 짓눌려 있다."(16쪽) 길고 현학적인 문장을 쉽게 옮겨보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과 같은 비유로 꽉 차 있다는 뜻이다.
남자는 바깥이고 높음이며 밝음, 즉 양(陽)이다. 반대로 여자는 안쪽이며 낮음이고 어두움, 즉 음(陰)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명예로운 일, 여자는 그 남자를 수발하는 일. 이렇듯, 자연계의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 대입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의 남성 지배, 혹은 여성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작지만 단단한 책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통찰 하에 남성 지배의 '인류학적' 특성을 조목조목 고찰한다. 전통사회의 문화와 철학 속에 베어들어 있는 온갖 이분법적 사고를 검토한 후, 그는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남성 지배의 변화 혹은 유지 과정을 대가의 솜씨로 개괄한다. 그 결과 도달하는 중간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78쪽)
이것은 결코 개별 문화권만의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류 사회가 공유하고 있다.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은 그만큼 보편적인 전근대적 사고 체계에 기반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의 젊은 부르디외와 마찬가지로, 2016년의 우리는, 그것의 극복을 사회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6.09.13ㅣ주간경향 1193호
피에르 부르디외, 동문선, 1만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피에르 부르디외는 알제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전공은 사회학이었지만, 알제리대학교에서는 알제리의 카빌 지역 내 전통 사회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했던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바로 <남성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남성 지배'라는 현상에 대해 민속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남성 지배',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그 현상은 이른바 "공론(公論)의 모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잘못된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로 인한 억압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남성 지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강요되고 강요받는 방법 속에서 그러한 모순된 순종의 예를 줄곧 보아 왔다."(7쪽)
우리는 이 책의 논의 대상인 알제리의 카빌 지방, 그곳에 살던 베르베르족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성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동원했던 논리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카빌 사회에서처럼 성의 질서와 성의 차별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우주를 주관하는 대립의 총체 속에 잠겨 있는 세계에서, 속성들과 성행위들은 인류학적이고 우주론적인 결정들로 짓눌려 있다."(16쪽) 길고 현학적인 문장을 쉽게 옮겨보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과 같은 비유로 꽉 차 있다는 뜻이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대립에 따른 사물들과 행위들(성적이건 아니건간에)의 분리는 고립된 상태에서는 자의적이지만 높고 낮음, 위와 아래, 앞과 뒤, 오른편과 왼편, 곧음과 구부러짐(그리고 삐뚤어짐), 건조함과 축축함, 단단함과 물렁거림, 간간한 것과 무미건조함, 밝음과 어둠, 바깥(공적인 것)과 안(사적인 것) 등의 동질적 대립 체계 안에 끼워넣어짐으로써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필요성을 부여받는데, 그 중 몇몇 대립은 위와 아래, 올라감과 내려옴, 밖과 안, 나감과 들어옴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에 상응한다.(17쪽)
남자는 바깥이고 높음이며 밝음, 즉 양(陽)이다. 반대로 여자는 안쪽이며 낮음이고 어두움, 즉 음(陰)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명예로운 일, 여자는 그 남자를 수발하는 일. 이렇듯, 자연계의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 대입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의 남성 지배, 혹은 여성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작지만 단단한 책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통찰 하에 남성 지배의 '인류학적' 특성을 조목조목 고찰한다. 전통사회의 문화와 철학 속에 베어들어 있는 온갖 이분법적 사고를 검토한 후, 그는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남성 지배의 변화 혹은 유지 과정을 대가의 솜씨로 개괄한다. 그 결과 도달하는 중간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78쪽)
이것은 결코 개별 문화권만의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류 사회가 공유하고 있다.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은 그만큼 보편적인 전근대적 사고 체계에 기반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의 젊은 부르디외와 마찬가지로, 2016년의 우리는, 그것의 극복을 사회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6.09.13ㅣ주간경향 1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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