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㉛]대깨문의 적반하장과 민주당 잔혹史
●‘초선 의원의 亂’과 문자 폭탄
●한층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의 길
●黨心 추종이 민주주의에 反한다?
●당원도 결과에 따른 책임지는 것
●한국 정당은 ‘구경하는 정치’ 조장
●극성 친문이 쏘아올린 퇴행 신호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9대 대통령선거가 한창이던 2017년 4월 21일. 인천 부평구 부평역 광장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집중유세가 열렸다. [동아DB] |
4월 9일 민주당의 초선 의원 다섯 명은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내고 ‘조국 사태’ 때 조국 전 법무장관을 감싼 것을 반성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사흘 뒤 ‘민주당 권리당원 일동’ 명의의 권리당원 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서는 초선 의원들의 입장 발표를 ‘초선 의원의 난(亂)’이라 표현하며, “초선의원들은 4·7 보궐선거 패배 이유를 청와대와 조국 전 장관의 탓으로 돌리는 왜곡과 오류로 점철된 쓰레기 성명서를 내며 배은망덕한 행태를 보였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내놨다.
극성 친문은 단지 성명서를 발표한 데 멈추지 않았다. 김정란 상지대 명예교수 등 유명 극성 친문 지지자들이 앞장서서 초선 의원 다섯 명의 연락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번호로 온갖 폭언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그것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인증하는 모습을 지난 4월 9일 이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4월 20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광주, 전남, 제주 당대표, 최고위원 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홍영표, 송영길, 우원식 당대표 후보들(왼쪽부터)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동아DB] |
민주당에서 당비를 내는 당원을 권리당원이라고 한다. 모든 민주당 권리당원이 극성 친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성 친문이라면 99% 이상의 확률로 권리당원일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극성 친문은 막강한 조직표로 작동하고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 규정상 일반 권리당원은 40%, 국민 일반의 투표가 10%, 일반당원이 5%의 투표권을 갖는다. 권리당원의 지지를 받으면 무난히 이길 수 있다. 지난 4월 16일 선출된 윤호중 원내대표 역시 친문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이 한층 더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 향할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단 오해의 여지가 없는 내용부터 이야기해보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SNS에서 특정인의 연락처를 공유하며 욕설과 폭언 등을 퍼붓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SNS를 통해 악플 폭격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상식적인 시민 사회의 양식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 위법성이 있을 때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 특히 정당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극성 친문 지지자들의 행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소수가 다수의 의사를 왜곡하는 현상’이라고 비판한다. ‘민심’과 ‘당심’이 괴리되었을 때, 마땅히 ‘민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론처럼 들린다. 소수의 열성적 지지층이 활동하여 일부 의원들을 움직이고, 그 일부 의원들이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면서 당이 바뀌고, 정당이 국가 전체의 국정을 좌우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원의 투표로 정당의 행보가 결정되는 것 자체를 ‘민주주의에 반(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다. 당원의 뜻에 따라 정당이 움직이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중 상당수가 실은 국민보다는 집권 여당의 당원들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맨 오른쪽)과 이소영, 오영환, 장경태, 장철민 의원(오른쪽에서 세번째 부터)이 4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
보리스 존슨은 보수당 내 경선을 통해 영국 총리가 됐다. 그 투표권은 오직 보수당원만이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당원은 노년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소득 수준을 놓고 봐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마디로 부자 노인들의 정당이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총리가 오직 부자 노인들만의 투표로 결정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일까?
브렉시트의 경제적 여파를 정확히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제 상식에 비추어보면, 브렉시트는 무역 및 국가 간 노동력의 이동을 저해한다. 이는 전반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영국의 주요 언론들이 새삼스럽게 ‘온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보수당의 당내 경선으로 새 총리를 뽑는 상황’을 문제 삼았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디언’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진보 성향 언론은 유럽연합 및 국경의 개방성 등 진보 의제를 놓고 존슨 총리의 취임에 반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보수 성향의 경제지들은 브렉시트가 미칠 경제적 여파와 혼란을 우려하며 존슨을 반대했다.
하지만 보수당은 예정대로 당대표 경선을 강행했고 존슨이 승리했다. 이후 정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2019년 12월, 아직 코로나19가 중국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던 그 무렵, 존슨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렀다. 선출의석 650석 가운데 365석을 차지하여 단독으로 과반을 넘기는 압승이었다.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문화는 정당보다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지 않은 후발주자로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정당은 그저 ‘대통령당’일 뿐이었다. 자체적인 정치 의제를 토론하고 형성하는 기능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법을 만드는 거수기 집단에 더 가까웠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가 건재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분명 그렇다. 김영삼·김대중은 당대표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정치, 정책, 가치관 등을 표상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당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어차피 본질은 ‘김영삼 당’, ‘김대중 당’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던 고도 성장기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집중된 리더십의 필요성은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1987년의 직선제 개헌, 그 이후의 역동성 있는 정치 변화 등은 정당보다는 사람, 특히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합 집산하는 한국 정치의 기본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론과는 다르다. 정당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의회 정치의 중요성이 누락돼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형 정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누군가의 개인적 의지나 열정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합의된 이상과 이념에 따라 움직인다. 이를 원한다면 정당의 역할은 더욱 커져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비밀을 풀 열쇠는 자원봉사에 있다. “영국의 선거운동은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점심식사를 자비로 챙겨오고 교통비도 자기 돈을 쓴다. 말 그대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주영 대사관 홍보실에서 제공한 자료라고 하니 믿어도 좋을 듯하다.
왜 영국의 정치 고관여층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봉사를 하는 걸까. 정치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과 사랑이 유별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치에 대해 관심 많기로 따지면 한국인을 능가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당에서 자원봉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 중 일부는 인터넷에서 악플을 달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이 차이는 대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영국에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은 퍽 많은 함의가 있다. 당대표를 뽑는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물론 정당마다 규정이 다르긴 하겠으나) 대부분 여론조사와는 무관하게 당원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다. 평소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테레사 메이가 사임하고 보리스 존슨 등 다양한 후보가 당대표 경선에 나서는 상황이라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나의 한 표가 지금 당장 누군가를 영국 총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다른 ‘민주주의 선진국’ 역시 정당을 운영하는 데 자원봉사에 크게 의존한다. 대신 당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그만한 정신적 보상을 제공한다. 그 중 핵심은 당내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이다. 설령 ‘민심’과 ‘당심’이 다르다 해도 ‘당심’을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이념이나 정책에 집중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진다.
극단적인 두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만든 영국 보수당의 ‘당심’은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반면 제레미 코빈을 열렬히 지지하던 노동당의 진보 블록, 소위 ‘코빈마니아’(Corbynmania)들은 그렇지 못했다. 노동당은 2019년 12월의 총선에서 처참히 패했다. 코빈의 오랜 정치 경력 역시 그 시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존슨 지지자들이 옳고 코빈 지지자들은 틀렸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당심’은 ‘민심’과 가까웠거나 민심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다른 ‘당심’은 그러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코빈 지지자들은 당내 경선 및 총선 과정의 자원 봉사를 통해 뜨겁게 정치에 참여했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들의 지나친 사회주의 성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정당에 들어간다. 혹은 스스로 정당을 만든다. 민주적으로 그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이념과 정책을 정직하게 밝히고, 대중을 설득하여, 그에 따른 정치적 결과도 온전히 스스로 책임진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의 작동 방식과 매우 가깝다. 결국 당원들이 정당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정당민주주의가 관건인 셈이다.
정당은 정치 결사체다. 당원 스스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지도부를 구성하며,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더욱 가깝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변화는 당원으로부터, 즉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형태여야 한다.
지금처럼 두 거대 정당이 일관된 방향도 이념도 정책도 없이 여론조사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정치 풍조는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을 떨어뜨린다. 정치를 ‘참여하는’ 것이 아닌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당에 뛰어들어 시간과 돈을 써가며 내 의사를 드러낼 이유를 빼앗는다. 물론 곧장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이상을 잊지 말아야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극성 친문, 소위 ‘대깨문’처럼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는 것은 몇 번을 비판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는 보스 정치보다 못한 팬덤 정치로의 퇴행일 뿐이다. 진정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정당 민주주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극성 지지층의 행태는 제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좀 더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시민 참여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첫걸음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