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죽음 선택한 22명의 자영업자
1958년, 서독 노이슈탄트. 15세의 소년 미하엘은 사랑에 빠졌다. 36세의 한나와 묘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육체 관계로 시작했지만 한나는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연상의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배우며 <오디세이아>, <에밀리아 갈로티>, <전쟁과 평화> 등 온갖 문학의 고전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던 뜨거운 여름. 그러던 중 한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첫사랑은 끝났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뀐 후 미하엘은 대학에 진학하여 법대생이 되었다. 그는 재판 견학을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첫사랑 한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한나는 강제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한 나치 전범이었다. 한나는 수감자가 죽을 걸 알면서도 매달 60명씩 선별해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이 수용소에는 매달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오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간수들도 그렇게 했다’. 한나의 항변이 법정에 울려퍼졌다. 독일의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책 읽어주는 남자>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영화 <더 리더>의 원작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의 이름이 ‘미하엘’에서 ‘마이클’로 바뀌었지만 주제 의식은 동일하다. 판사가 한나에게 질문한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을 곳으로 보냅니까?’ 한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던진 바로 그 질문, ‘악의 평범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1963년 <뉴요커>의 의뢰를 받았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1963년 2월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하에 연재되었고, 훗날 책으로 묶여 나왔다.
아렌트는 일단 재판의 광경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에 집중했다. 교수대에 선 아이히만은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하고 그 절반을 마셨다. 성경을 읽어주겠다는 목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검은색 두건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재판받고 처형당하는 입장이면서도 마치 남의 장례식에서 애도 연설을 하는 양 행세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아이히만은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너무도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다. 아렌트가 볼 때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 ‘평범성’, 혹은 ‘진부함’이나 ‘일상성’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복종하는 교양 있는 고급 장교로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태도로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 학살을 진행했다. 자신이 따르는 명령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어떤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이라서, 시키는 대로 충직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더 리더>의 한나 역시 마찬가지다. 직접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단지 수용소에 사람이 너무 많으니 간수 한 사람당 열 명씩 제소자를 골라내어 아우슈비츠로 보냈을 뿐이다. ‘합리적’인 행위다. 미군의 폭격으로 수용소에 불이 났을 때 한나는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니에요? 간수는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갇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한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 모습을 보며 미하엘은 한나의 중요한 비밀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달 25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브리핑에서 2주가량 사적 모임을 미루거나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재는 2500명 내외의 (확진자) 발생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있지만, 확진자가 증가하게 되면 (중증 환자 규모도) 뒤따라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하루 신규 확진자 3000명 이하에 대해 1~2주가량 대응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역 4단계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나? 이미 4단계를 몇 주째 연장하고 있지 않은가? 확진자 수 관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국민에게 모임 자제를 ‘요청’할 게 아니라, 자영업자에게 영업 정지를 ‘명령’하고 그에 따른 손해를 공식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건 아닐까?
정부는 국민, 특히 자영업자에게 방역의 짐을 떠넘기고 있다. 최저임금 폭등으로 한계에 치달은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이후 생사의 기로에 섰다. 코로나19 대응 전국 자영업자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최소 22명의 자영업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 ‘자영업자 학살극’이 과연 방역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악의 평범성’은 아우슈비츠 같은 극악한 반인륜 범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영업자들이 굶건 죽건 확진자 숫자 놀음에 정신이 팔린 무신경하고 잔인한 K방역 또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영업자 분향소에 조문은커녕 근조 화환조차 보내지 않았다. 경찰은 분향소 설치를 방해하다가 마지못해 허락해놓고도 시민들을 감시했다. 나는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더 리더>의 한나가 내놓는 변명이 떠오른다. 현실 속의 아이히만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지루하고 상투적인 ‘악의 평범성’에 갇혀 있는 것이다.
10월 말부터 시행할 수 있다는 ‘위드 코로나’는 방역 단계를 낮춘다는 말과 같다. 단기적으로나마 확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은경 청장의 노고를 보면서도 의문을 표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확진자가 5000명, 1만 명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 ‘위드 코로나’ 하면서 동시에 방역 4단계를 연장할 셈인가. 청와대의 방침에 따라 끝없이 희망고문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더 리더>는 배움과 참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하엘은 감옥에 갇힌 한나에게 책을 녹음하여 테이프를 보내준다. 한나는 반성하고 생각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더 리더>와 달리 우리의 이야기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영업자를 비롯한 국민 모두에게 정직한 태도로 인격적 예우를 드러내는, 그런 방역과 정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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