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내부고발자다. 천관율 전 '시사IN'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아마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성공한 내부고발자"다.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지 않다. 판사 이탄희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을 고발한 후 변호사로 아주 잠시 일하다가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캠프가 출범한 미래정치기획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대선 결과에 따라 그의 관운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탄희의 성공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현재 정치권에 입성한 법조인 출신 젊은 의원 중, 역시 이재명계로 분류되는 박주민 의원과 더불어 가장 전도유망한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탄희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개인적 영달에 그친다.내부고발로 얻은 국회의원 뱃지
내부고발자는 자신이 몸담아온 조직에서 순식간에 인사이더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전락한다. 우리 편에서 배신자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이걸 알면서도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웹툰 '송곳'의 명대사마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굳이
아닌 건 아니라고 한마디 하고야 마는, 주머니에서 삐져나오는 송곳 같은 사람들이 있다. 대체 왜일까.
내부고발은 조직에
속한 이가 감행하는 실존적 결단이다. 조직의 논리보다 사회적 상식을, 윗사람의 심기보다 나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부고발의 성공과 실패는 내부고발자가 이후 출세를 했냐 못 했냐 같은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내부고발자라는 험한
길을 택하면서 스스로 제시했던 기준과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누가 보더라도 떳떳한 양심적 주체가 될 때 비로소
내부고발자의 인생은 성공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이탄희를 보자. 그는 이른바 '사법 농단'의 내부고발자였다. 2017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그러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부가 막 들어설 무렵 판사 이탄희는 과거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표를 냈다. 첫 번째 사표는 반려되었지만 이미 그는 법원
가족의 일원으로 남아 있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두 번째 사표는 받아들여졌는데, 그때는 새로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이 요청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었다. 판사를 검사가 수사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전개되었다.
이때 밝혀진 사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양승태 대법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재임 중 상고법원 설치를 얻어내기 위해 청와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로비를 했다.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에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 판결, 통상임금 판결, KTX 여승무원 판결,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대법원이 이런 사례를 들어 청와대와 코드가 맞다고 강조한 후 청와대의 마음을 얻어 상고법원 설치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게 알려진 재판거래의 전부다.
사법농단 실체는 무엇인가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양승태 대법원이 정말 법원행정처의 힘을 이용해
판사들을 회유·협박하여 개별적 재판 결과를 만들어낸 것일까? 혹시 정치적 의도는 없었지만, 상고법원 설치 로비를 위해 대법원이
마치 청와대를 위해 그런 판결을 일부러 내린 양 부풀린 건 아일까?
전자라면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헌정 질서
파괴다. 하지만 후자라면 재판거래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의 '오버 액션'일 뿐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기소하기 전까지만 해도 문재인 정권의 믿음직한 칼이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되어 처리한 첫 사건이
바로 이 재판거래 사건이었다. 그런 윤석열이 총괄한 수사였지만 대법원이 재판 결과를 조작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대법원은 청와대와의 협상 카드를 위해 일찍부터 박근혜 정부와 코드가 맞는 판결을 내렸던 걸까. 검찰
수사라는 극약처방에도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내부고발자로서 목청을 높이던 이탄희의 어조는 2020년
국회의원이 된 후 크게 달라졌다. 자신이 고발한 것은 '범죄'가 아니라 '직업윤리'의 문제였다고 말이다.
지금 대장동
게이트로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워낙 큰 사건이고 다양한 논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탄희를 떠올렸다. 권순일 전
대법관이 대장동 게이트 중심에 있는 화천대유에 취직해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그 시점이었다. 정치권에 떠도는 이른바
'50억 리스트'에 권순일의 이름이 또 등장한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내부고발자 이탄희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이재명 경기지사의 정치적 생명을 건져낸 장본인이 권순일 아닌가.
이 사안에 '이재명-권순일 재판거래', 아니 논의의 편의상 '이권 거래'라고 이름 붙여보자. 권순일은 캐스팅보트를 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허위사실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적극 표명한 것이란 사정이 없는 한 후보자 (거짓) 토론회 발언을 처벌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그 시점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법리를 새로 만들어서 이재명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무죄로 판결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 이재명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후, 이재명이 설계한 대장동 개발 사업에서 금전적 이득을 얻었다. 이런 명백한 이권 거래를 보며 이탄희가 말한 재판거래를 떠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이재명-권순일의 수상한 행보하지만 이번 이권 거래는 이탄희가 내부고발했던 양승태 대법원의 박근혜 재판거래처럼, 실제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권순일은 우연히 이재명의 정치적 생명을 구해내는 판결을 했을 뿐이고, 퇴임 후 변호사 등록도 안 한 채 화천대유에 취직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시간차 뇌물 수수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래를 계약서 써가며 하지는 않을 테니 범죄 사실을 포착해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재명-권순일의 이권 거래가 실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설령 그런 거래가
있었다 한들 사실을 밝혀내고 법으로 처벌하는 건 매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2017년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칼을 빼
들었지만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이탄희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문제를 내부고발한 게 전적으로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권 거래도 같은 방향에서 바라봐야 한다. 사실 여부나 법적 처벌 가능성 유무와 무관하게 이 사안은
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우리 국민의 법에 대한 존경심을 짓밟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에 분노한 사람이라면 권순일 대법관의
이권거래 의혹에 대해서도 당연히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분노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법원의 내부고발자 이탄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의혹의 당사자인 이재명 캠프에서 미래정책기획위원장으로 젊은 지지자와 전문가를 규합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지난 정권의 재판거래를 고발하며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 현 정권 들어 가장 심각한 재판거래 의혹이 있는 누군가의 밑에서,
재판거래의 수혜자일 수도 있는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그 한 문장을 지키기 위해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판사로서의 경력을 내던졌던 내부고발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대신 같은 육체를 지닌, 유력 정치인에 줄 대는 어떤 흔해빠진 정치 초년생이 있을 뿐이다. 굳이 '나는
저격한다'에서 저격할만한 인물조차 못 된다. 다만 법관의 직업윤리가 정치 논리와 개인적 출세욕 등으로 얼룩지는 것을 참지 못했던 한
젊은 법조인이 출세욕을 좇아 사라졌다는 점은 애석하게 여긴다. 나는 정치인 이탄희를 저격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죽어버린
내부고발자 이탄희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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