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60] BTS·오징어게임 외에 또 세계 1위 무엇?
● 삶의 의미에서 1순위는 ‘물질적 풍요’
● 전 세계 응답자 38% 가족 꼽았는데…
● 초점 어긋난 SNS ‘재야 고수’의 품평
● 세계를 당황케 만든 ‘돈’ 외치는 나라
● 수험생마냥 설문에 응한 韓日 응답자
● 대단히 치열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삶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몇 년 새 세상이 달라졌다. BT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오징어 게임'에 이어 '지옥'이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드라마로 이름을 올린다. 익숙한 분야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영역에서도 한국이 1위를 기록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하지만 지난 11월 18일 미국 퓨리서치센터에서 발표한 결과는 우리 국민을 큰 혼란과 충격에 빠뜨렸다. 전 세계 성인 1만7000명을 대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대한민국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분야에서 1등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인들은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았다.
‘물질적 풍요', 즉 '돈'을 1순위로 꼽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그 결과에 대해 많은 이가 적잖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마치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밝히는 사람들'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1등이 좋다고 해도 그런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 희한한 결과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물질적 풍요 19%, 건강 17%, 가족 16%
조사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조사 대상국은 총 17개국이다. 한국, 미국, 일본, 대만,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들이다. 국민들이 '삶의 의미'를 고민할 여유가 된다고 볼 수 있는, 경제적 풍요를 어느 정도 이룬 나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인 것이다.전 세계적으로 보면 삶의 의미를 주는 제1의 가치는 '가족'이다. 전체 응답자 중 38%가 '가족'을 꼽았다. 이어 '직업'(25%), '물질적 풍요'(19%) 순으로 이어진다. 17개국 중 14개국에서 가족은 1위에 올랐는데, '삶의 의미'라는 말을 놓고 보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결과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는 가족을 최우선으로 꼽는 답변이 50%를 넘겼다.
반면 한국인들은 삶의 의미에서 1순위로 '물질적 풍요'를 꼽았다(19%). 그 다음은 건강이었고(17%), 가족은 3위에 지나지 않았다(16%). 비록 근소한 차이이긴 하나 물질적 풍요가 1위를 차지했다는 것 자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을 제외하면 다른 그 어떤 나라도 이와 같은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흔히 한국을 유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대표되는 가족 중심의 가치관을 지닌 도덕·윤리 체계다. 정작 한국인들은 가족이 아니라 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니, 상식과 심각히 배치되는 결과 아닌가?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언론에서 보도하기 전부터 '재야 고수'들이 달려들어 다방면으로 결과를 검토하고 품평했다. 과연 이 조사를 믿어도 되는 것이냐, 조사 문항이 잘못 짜인 것은 아니냐, 국내 여론조사 업체와의 협력 과정에서 번역이 잘못됐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연이어 제기됐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여론조사는 없다. 하지만 '재야 고수'들의 비판은 초점이 어긋나 있다. 퓨리서치센터는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초당파적 싱크탱크다. 주로 설문조사에 근거해 미국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종종 다른 나라 여론조사 기관과 협력해 국제적 비교 조사를 수행하기도 한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쓰인 연구 결과를 인터넷으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편이다. 설문조사 문항 및 조사 방법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보고서 말미에 부록을 통해 충실히 전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싱크탱크라는 그 명성에 손색이 없는 행보다.
퓨리서치센터는 한국에서 직접 여론조사를 진행할 수 없어 국내 업체와 협업을 했다. 한국갤럽이 2021년 3월 15일~4월 29일 사이 1006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가중치를 뒀고 오차범위는 ±3.5%포인트. 갤럽은 국내 여론조사업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업체 중 하나다. 해외 연구기관과의 협업 경험도 풍부하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서, 조사 결과를 단순 번역 오류 따위로 치부해버리면 생산적 논의를 가로막는 일이 되고 만다.
한국인을 위한 어떤 변명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할 때 '돈'을 외치는 나라. '코리아 미스터리'. 이 결과를 두고 당황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조사를 발표하기 전 퓨리서치센터 내부에서도 진지한 고민과 해석의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총 14페이지로 이루어진 온라인 발표문 중 첫 번째 페이지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왜 이 보고서는 응답의 비율 뿐 아니라 순위에 집중하였는가(Why this report focuses on topic rankings in addition to percentages)"라는 별도의 항목이 등장한다.애초에 이 설문조사는 여러 선택지 중 오직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식으로 구성돼 있지 않았다. 복수 응답을 하고 피조사자가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가족도 중요하고, 건강해야 할 것 같고, 경제적 여유도 빼놓을 수 없지요'라고 대답하면, 퓨리서치센터는 그것들을 항목별로 모두 합산한 후 전체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조사했다는 뜻이다.
스페인의 응답자 중 42%가 물질적 풍요를 인생의 중요 요소로 꼽았지만, 스페인에서 물질적 풍요는 1위가 아닌 2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다. 스페인 사람들 중 1위인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이들은 무려 48%나 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1위인 물질적 풍요가 19%, 2위인 건강은 17%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한 걸까?
다른 나라 응답자들과 달리 한국과 일본의 응답자들은 복수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문조사에 응한 한국인과 일본인 중 많은 이들은 질문지를 유심히 살펴본 후 신중하게 고민해 정말 딱 하나의 답만 골랐다. 편안하게 떠오르는 대로 대답해주기를 바라고 만들어진 설문조사 앞에서, 마치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수험생마냥 최선을 다해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설문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주로 근거로 삼는 대목도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인생에 의미를 주는 요소를 이것저것 두루 택하지 않았다. 빡빡하게 딱 하나만 골랐고, 그러니 근소한 차이로 물질적 풍요가 1위를 차지한 이례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돈 좋아하기는 마찬가지고, 한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돈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한국인을 위한 변명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경향 거스르는 '아웃라이어'…이게 사는 건가?
국가 단위로 가치관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연구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1980년대 초반에 시작돼 지금까지 5년 주기로 이어지고 있는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있다. 다수의 국가를 상대로 장시간에 걸쳐 이어지고 있기에, 퓨리서치센터가 이번에 수행한 단발성 여론조사보다 훨씬 더 신뢰할만한 자료로 꼽힌다.세계가치관 조사는 가치관을 두 개의 차원으로 구분한다. '전통·종교 중시' 대 '세속·이성 중시'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생존 중시' 대 '자기 표현 중시'가 또 다른 축을 이룬다. 대체로 많은 국가들은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전통과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과 이성의 세계로 넘어가며, 동시에 생존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잦아들고, 자기표현과 관용, 자선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상식에 부합하는 보편적 트렌드다.
문제는 또 대한민국이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생존을 중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2000달러이던 시절이나 2만 달러이던 시절이나 한국인들은 여전히 자기 표현 대신 생존을 택한다. 전통과 종교가 아닌 세속과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 또한 여전하다. 세계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세속적이고 잇속을 따지며 생존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세계가치관 조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통계적 경향성을 거스르고 있는, 통계학의 용어를 빌자면 '아웃라이어'(outlier)인 셈이다.
퓨리서치센터의 이번 설문조사가 잘못됐다, 혹은 결과가 왜곡돼 있다는 주장에 대해 심정적으로 납득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의 배금주의적, 생존주의적, 물질주의적 경향은 다른 연구와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듯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대단히 치열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분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를 좀 더 꼼꼼히 훑어보면 한국인의 각박한 삶이 드러난다. 외국인들은 직업, 친구관계, 교육과 배움, 자연을 즐기는 삶 등을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응답지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주요 종교의 등록 신자를 합치면 대한민국 전체 인구보다 클 정도로 제도권 종교가 성행하는 나라지만, 한국인 중 삶의 의미의 원천으로 종교를 꼽은 사람은 1% 뿐이다. 교회 성당 절을 열심히 다니긴 해도 설문조사 용지를 받아들고 나면, 예수님·부처님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응답한다는 소리다. 이게 사는 건가?
‘기적은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영국의 시사·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기자 다니엘 튜더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에 푹 빠졌다. 그는 이 나라를 다방면으로 조사하고 연구한 후 '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다름 아닌 필자에 의해 번역됐고, 출판사의 판단에 따라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번에 발표된 퓨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기적을 이루었지만 기쁨을 잃은 나라에 살고 있다.#퓨리서치센터 #물질주의 #세계가치관조사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