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7

우크라이나 전쟁: 젊깨문과 늙깨문

목수정을 비롯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발언. 이들은 러시아 선전선동을 거의 그대로 주워섬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 더 나아가 미국이 유인, 조장, 방조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가 '군사행위'를 하는 건 맞지만 '적대행위'는 미국과 젤렌스키 내지는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세력이 먼저 했다는 논리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듣고 많은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특히, 유시민이 쓴 이러저러한 책들을 무슨 대단한 지혜의 교과서인 양 달달 외우고 큰,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 중 상대적으로 젊은 30대 말-40대 초반 세대가 그렇다.

편의상 그 세대를 '젊깨문', 그보다 나이 많은 40대 중반-50대까지를 '늙깨문'이라고 해보자. 젊깨문들은 나름 서구적 가치에 친숙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는 젊고 쿨하지만 저들은 늙고 촌스럽다'는 전제를 깔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을 비토한다.

젊깨문들은 늙깨문(목수정을 비롯 대놓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욕하는 바로 그 세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는 않다. 후진국 세대인 늙깨문과 달리 나름 중진국 세대이기도 하고, 그들이 금과옥조로 섬기는 정치적 올바름과 글로벌한 가치 등을 놓고 볼 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현재 자아분열에 빠진 상태다. 늙깨문들이 속속들이 친러주의, 친푸틴, 침략전쟁 옹호 발언을 이 시점에,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관과 기존의 인식을 통합해야 하는 난관에 처해 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젊깨문들 역시 깨문버스 특유의 '선한 우리편과 악한 저들의 대결' 같은 원시적 대립 구도를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여도, 젊깨문들은 그 러시아를 옹호하는 늙깨문을 '우리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의 온갖 망언을 못 본 척 하고 지나가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바로 그 젊깨문 세대의 일원으로서 깊은 탄식을 담아서 하는 소리다.

젊깨문은 '머리'로는 늙깨문에게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가슴'으로는 그들을 따라가고 만다. 최근 돋보이는 한 사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2019년 2월, 나는 이런 글을 썼었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에 낯익은 얼굴이 한 분 보인다. 안희정의 부인 민주원 씨가 '내 남편은 미투가 아니다 불륜이다'라고 하자 그것을 열심히 SNS로 옹호하시던 최민희 전 의원. 현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현). http://pcpp.go.kr/info/informati

저 최민희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최민희다. <황금빛 똥을 싸는 아이>의 저자인, 말하자면 출세한 안아키. '극문 똥파리' 빼면 다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한 이재명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구한말 무능부패한 왕과 조정이 일제침략을 못막았듯 준비안된 우크라이나대통령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최민희.

젊깨문들은 이럴 때 혼란에 빠진다. 최민희가 입으로 황금빛 똥을 싸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최민희는 이재명 캠프에 있고, 이재명은 젊깨문들의 머릿속에 '절대 타도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국민의힘과 그 후보인 윤석열과 맞서고 있다. 일종의 시스템 오류다.

그래서 젊깨문들은 어떻게 할까? 몇 가지 현실도피 기제가 있다. 갑자기 뭐 먹는 사진이나 음악 감상문 같은 걸 올린다거나, 다짜고자 맥락없이 #PrayForUkraina 같은 해시태그를 띡 붙인다거나, 김어준 따위가 생산해 퍼뜨리는 윤석열 관련 흑색선전들을 열심히 퍼다나르며 '그래도 민주당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자기세뇌를 강화한다거나...

그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며 따른다는 가치를 민주당이 모두 배신하고 있지만, 젊깨문들은 늙깨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가스라이팅의 희생자여서일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에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탁하고, 알량한 소비 문화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세대의 일원이며,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2022-02-26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1976년 시작된 ‘페트로달러’ 시스템
● 중동 산유국 보호 美 군사력이 기반
●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이거늘


2월 21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하며 ‘기축통화 논쟁’이 불거졌다. [채널A 화면 캡처]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21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한 말이다. 국가 채무를 더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의 견해에 맞서는 본인의 논거로서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학자이기도 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역대급 똥볼”이라고 질타한 것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재명은 2월 23일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얼마 전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에 편입될 근거’를 언급했고 본인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소리다. 애석하게도 이재명의 인용은 전경련의 본의와는 차이가 있다.

‘기축통화국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발언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탓도 없지 않다. 이재명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기축통화는 아니지만 한국 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한국 돈을 냈다, 호텔에서 팁으로 한국 돈을 주고 나왔는데 좋아하더라, 같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우리 돈의 힘이 세진 것이 맞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도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LNG선으로 대표되는 몇 개의 독보적 수출 품목이 있고, 자동차, 유조선, 기타 공업생산품 역시 준수한 대외경쟁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확장된 경제력과 인터넷의 힘을 타고 한국의 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없다. 왜일까?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 오늘날의 미국 달러가 이에 해당한다. [동아DB]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개념에 따르면, 외환 시장에서 B라는 나라의 화폐와 C라는 나라의 화폐를 거래할 때 기준이 되는 A라는 화폐, 그것이 기축통화다. 우리가 한국의 원화를 일본의 엔화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환율표에는 한국 돈 얼마로 일본 돈 얼마를 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는 원화 대 달러, 엔화 대 달러의 교환비율이 먼저 존재한다. 달러를 매개로 원화의 가치, 엔화의 가치를 평가한 후, 비로소 원화 대 엔화의 환율이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를 때 한국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뜻으로 기축통화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 정의를 따르더라도 원화는 기축통화로 인정될 수 없다.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은 우리의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 규모보다 작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액 비중을 보면 그렇다. 1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 유로가 36.56%로 2위다. 1위와 2위 이후로는 격차가 한없이 벌어진다. 영국의 파운드는 3위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고작 6.3%에 지나지 않는다. 원화는 이 순위표에서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앞으로도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학’의 눈으로 바라본 설명에 불과하다. 노골적인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제국의 화폐는 그 영향권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 저장 및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부터 오늘날의 미국 달러까지 변치 않는 냉정한 현실이다.

게다가 달러는 다른 제국의 기축통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가치를 귀금속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로마의 디나르는 기본적으로 은화였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는 디나르의 은 함량이 높고 정품성을 보장받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바깥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로마의 힘이 기울어지면서 점점 은 함유도가 떨어지고 로마의 해외 구매력 역시 꺾이는 악순환이 펼쳐졌다. 달러 역시 연방준비제도와 포트 녹스에 쌓여 있는 금괴를 통해 가치를 최종적으로 담보했으나 베트남 전쟁 비용 및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1971년 금태환을 중단했다.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군사력
그렇다면 대체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1970년대, 세상에는 금보다 더 소중한 재화가 하나 있었다. 플라스틱의 원료이며, 자동차, 배, 비행기 등 거의 모든 교통수단의 연료인데다가, 심지어 비료를 생산할 때도 필요한 ‘검은 황금’. 석유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를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다. 그 위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석유의 지배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976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왕가와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하며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속한 나라들도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니라 원유로 태환되는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몇몇 나라들은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나라들의 말로는 썩 좋지 않았다. 2000년 9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산 원유 결제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디나르 금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원유를 거래하자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뒤집히고 카다피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전쟁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음모론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는 페트로달러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미국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묶어놓을 수 있는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이 갖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힘이란 미국 달러로만 살 수 있는 석유의 힘,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대가로 유지하다
이재명의 ‘기축통화국’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그래서다. 재정 적자를 늘려 당장 복지 예산으로 뿌리자는 취지로 기축통화국 발언을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과 그가 주창했던 기본소득 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기축통화를 그저 ‘맘 놓고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돈’, 일종의 ‘재정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에게 기축통화국이란 ‘공짜로 돈 찍어내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축통화란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다. 패권국이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을 모두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린 6‧25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베트남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퍼부으면서도 굴욕적 퇴각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고, 여러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대내외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달러 패권은 그런 면에서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군대에서 젊음을 바치며 때로는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는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것을 대가로 얻어냈고 지금껏 유지하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한국 돈의 대외적 신뢰도가 높아지니 마치 ‘공짜 돈’이 생긴 것처럼 재정 부채 비율을 10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재명의 주장은 너무도 가벼운 소리다. 패권국의 화폐, 기축통화는 그런 게 아니다. 패권을 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적대국 혹은 제3국의 피해 역시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입만 열면 반미 자주를 외치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달러에 대한 세계의 신뢰는 결국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신뢰다. 석유를 틀어쥔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 협의의 산물이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온 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진보적 가치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썩 달가운 미래도 아닐 것이다.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
이 글의 목적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게 패권국이 된 미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점령했으면서도 ‘사용료’를 받는 대신 각국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이것은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패권과 질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결백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같은 나라였지만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권으로 편입된 북한의 엇갈린 운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 그 시점에 주어진 다른 선택지에 비하면 분명히 낫다.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왼쪽부터 박범계 법무부 장관, 문재인 대통령, 홍현익 국립외교원장. 그래픽=김영옥 기자
 
"러 침공 예측 못 하고 위기 키운 '아마추어 대통령'". 국내 한 언론이 지난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외신을 종합한 짧은 기사에 단 헤드라인이다.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현 법무부 장관인 여당 소속 박범계 의원이 트위터에 이 기사를 포스팅한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공인이, 침략당한 외국 대통령을 조롱하는 모양새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 불참을 말하다 뒤늦게 제재 동참으로 선회해 인심만 잃었다.
외교원장이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
러시아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조롱한 건 박 장관뿐만이 아니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도 SNS 댓글로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주요인이고, 그다음 미국과 러시아의 국익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정치적 계산의 합작품…. "이라고 평했다. 이 정부나 더불어민주당에 속해 있거나 정권 친화적인 인사들이 이와 비슷한 과격한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직 코미디언이었다는 점을 특히 조롱거리로 삼는다. 가령 역사학자라며 노골적인 어용 행보를 일삼는 전우용은 트위터에 "무식하고 무능한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지가 안타깝다"다며 "국민이 무식한 통치자를 선택하면, 무식한 통치자는 대개 '재앙'으로 보답한다"는 극단적인 비하 발언을 내뱉었다.
박범계 SNS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이 단 댓글. [페이스북 캡처]
 
개전 직후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크라이나를 보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잠깐 검색한 후 현 대통령 젤렌스키가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희극 배우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웃음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혹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나 지식인이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만 묘사해서는 안 된다.
개도국 멸시하는 '꼰대 의식' 투영
그런데 왜 재야 지식인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들 이런 행태를 보이는 걸까. 나는 586 세대, 더 나아가 진보 진영 일각에 팽배한 예능인 혐오와 개발도상국 멸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거라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붕괴로 탄생한 나라다. 건국 30년을 갓 넘긴 신생국이다.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이 제자리를 잡을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숱한 대내외적 풍파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의 현황은 비참하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부패가 심각한 나라다. 짐작할 수 있듯이 1등은 러시아다. 하지만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석유 및 천연가스를 가진 나라지만, 우크라이나는 다르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긴 어렵다. 정치적으론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로 나누어져 혼란스럽다. 한편 우크라이나 경제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재벌, 즉 올리가리히에 의해 지배된다.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 역시 올리가리히 중 한 사람으로, 동유럽 최대의 초콜릿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기업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 하여 그 나라가 반드시 부패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랬다. 친서방파가 집권하든 친러파가 집권하든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으니 국민들은 염증을 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휘둘려왔으나,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 후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자 러시아는 2014년 군사력을 동원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동쪽 돈바스 지역에서는 반정부세력을 조직, 포섭, 지원하는 방식으로 비정규전쟁을 벌여왔다. 2022년 2월 현재 전면전이 벌어졌으나 사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8년째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코미디언 대통령 당선은 부패 반작용
젤린스키의 대통령 당선은 이런 맥락에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배우 출신으로, 2015년부터 '인민의 일꾼'(Servant of People)에 출연해 큰 인기를 누려왔다. '인민의 일꾼'은 시골학교 선생님이 SNS에 올린 정치 비판 영상을 통해 국민적 인기를 얻어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정치 풍자 시트콤이다. 답답하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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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지하철역 안에 시민들이 대피해 있다. 이날 새벽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선언하면서 침공이 시작됐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렇다고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개그와 다큐를 구분하지 못하나? 박범계 장관과 전우용을 비롯한 대다수 586들이 이런 경멸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간 얽히고설킨 정경유착을 해결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

2019년 대선 당시 젤렌스키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 2차 결선 투표에서 73.19%의 득표율로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24.48%)를 압도적 표차로 눌렀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시트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바보 멍청이여서가 아니다. 처음 정치에 뛰어든 신인을 지지하여 단번에 정치적 구도를 뒤흔들지 않으면 고질적인 정경유착을 끊을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젤렌스키가 법학 석사 엘리트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욱 그렇다. '코미디'라는 키워드를 빼고 본다면, 우크라이나의 2019년 선거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일은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투자회사 출신 엘리트 마크롱이 전광석화처럼 나타나 대통령이 되고 본인의 지지 정당을 원내 제1당으로 만들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한 현상이다. 기존 정치권에 통째로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열망이 뭉쳐,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몹시 열악하다. 2013년, 우크라이나의 이웃 폴란드에는 약 22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2019년 현재 120만여 명으로 늘었다. 유출 인구 상당수는 고학력, 고소득, 고급 인력이다. 이 추세가 지속할수록 친서방파는 선거에 이기기도, 설령 이긴다 해도 우크라이나를 개혁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도 어렵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5일 새벽 연설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인스타그램 캡처]
 
물론 젤렌스키 정권은 여러 약점을 드러냈다. 특히 인재풀이 부족한 탓에 젤렌스키와 가까운 방송 관계자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는 젤렌스키의 무능 이미지에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젤렌스키를 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그가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뽑지 않았나. 실제로 젤렌스키는 이전 정권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강력한 올리가리히 규제 법안을 연이어 내놓았다. 유효성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원하던 방향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정치 전체를 뒤집어버릴 '아웃사이더'를 원했는데, 우리가 과연 그 선택을 비합리적이거나 어리석다고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선거용 견강부회, 혐오 발언
해방 직후 영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발언은 수많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았다.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자마자 북한의 침략을 겪고 황무지가 된 국토 위에 두 주먹만 가지고 서 있는 것도 서러운데, 그런 비참한 처지의 대한민국을 이런 식으로 조롱했던 말을, 우리는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박범계, 전우용, 그 외 민주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내뱉는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근엄한 유교적 사농공상 세계관을 깔고는 무려 한 국가의 대통령을 예능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광대''천민'으로 취급하는 혐오를 내비친다. 더 나쁜 건 우크라이나의 사정과 역사적 맥락을 알지도 못하면서,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통째로 멸시하는 태도다.

입으로는 온갖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와 멸시를 드러내는 사람들 아닌가. 침략당한 외국을 두고 선거용 견강부회를 위해 그런 혐오 발언을 하는 걸 보면 너무 끔찍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 않다는 걸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2022-02-22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2020년 2월 19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나온 대구 남구 신천지예수교회 다대오지성전 앞을 대구 남구청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김동환 기자
 
“신천지 비호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대선 기간 우리 국민 모두가 내걸 수 있는 현수막 문구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해온 표현들이다. 이런 걸 ‘게시 가능’이라 판단한 선관위도 문제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당에 있다. 특정 종교나 신앙 및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을 향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을 공론장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당의 당원을 향해서도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이 지난 18일 유튜브 ‘다스뵈이다’를 통해 한 말을 되짚어보자. 그는 지난해 10월 민주당 대선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성분 분석이 안 되는 10만 표가 나왔다며, 그때 머릿속에 세 글자 ‘신천지’가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패널로 나온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여론조사업체 윈지코리아컨설팅 박시영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사회 상식의 하한선이 어디인지 의심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신천지나 무속 등을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신천지 특유의 포교 방식으로 인해 포섭된 이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금전적 피해를 입으며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과 수사 및 처벌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인에 의한 사기·협박·폭력·갈취 등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피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악질 범죄로 반드시 엄단해야 한다.

이런 견해는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종교를 믿을지, 더 나아가 어떤 종교를 창시할지도 개인의 자유에 포함된다. 단, 그 종교 활동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설령 그런 경우라 해도 종교 자체를 비하·폄훼·매도하거나 누군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집권 민주당에서는 통용되지 않은 것일까?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문재인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재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하고 퍼져나가던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청와대는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막으라는 의료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외국인 혐오’ ‘제노포비아’라며 묵살하고 있었다. 그러다 막상 국내에 전파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자 희생양 찾기에 나섰다.

마침 대구에서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었고 그중에도 신천지를 통해 퍼졌다는 사실이 역학조사를 통해 드러나자,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 같은 현대 국가의 상식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질병관리청은 짐짓 중립적인 태도로 신천지를 지목하고, 여당 지지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대구 코로나’ ‘신천지 코로나’ 같은 혐오 표현을 만들고 퍼다 날랐으며, 그 모든 과정을 청와대는 묵인하거나 부추겼다. 국민 상당수가 그런 비인격적 혐오 몰이에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문제야’라는 식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며 공동생활하는 소수 종교와 종파일수록 감염병에 취약하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뉴욕에서는 보수적인 유대교 종파가, 유럽에서는 이주민들의 무슬림 사원이 초기 코로나 폭발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 어떤 문명국가도 정부가 앞장서 특정 집단을 향해 ‘너희가 문제야’라는 시그널을 보내지는 않았다. 병을 퍼뜨린 이들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번 혐오의 씨앗이 뿌려지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반려동물로부터 지지 선언을 받네 마네 하는 ‘인권 감수성’을 뽐내다가도, 민주당은 신천지와 무속인을 만나면 오히려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마치 흑인은 총에 맞아도 개는 총에 맞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지 않는 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모든 담론은 허구다.

2022-02-19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행정학 석사 李’를 들여다보다

● 주제, ‘지방정치 부정부패 극복방안’
● 백기완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 “지방정치에 주민 직접참여 활성화”
● 자칫 ‘지역 영주’ 부채질하는 주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학위 논문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 표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 학위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검증은 대선 후로 미뤄졌다. 지난해 말 가천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조사 계획에 따르면 그렇다. 가천대는 4월 7일까지 조사위원회의 검증을 마치고 4월 17일까지 연구윤리위원회 승인 등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논문 재조사 결과 발표도 대선 이후인 3월 31일로 미뤄졌다.

두 사람의 논문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인 반면 김건희는 후보의 부인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건희의 논문과 학위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에서 학력 부족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득했다는 인상을 준다.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만한 일이지만 비슷한 목적으로 학위를 딴 수많은 이들과 비교해야 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
이재명의 논문은 다르다. 이재명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이재명은 201611월 4일 부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라서 “어디 이름도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 극복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야간 특수대학원을 갔고,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굳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다만 인용문의 따옴표를 못 친 게 있어서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재명은 지난해 1229MBC 라디오에 나와서는 “(학교 측에) 필요 없다, 제발 취소해달라, 그러고 있는 중”이라며 “제가 인정한다. 제대로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몇몇 구절을 가져다 놓고 비교하거나 ‘카피킬러’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지수를 산출해볼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4월 17일 이후에나 내려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재명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 또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쓴 석사논문의 표절 여부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읽고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512월 경원대(현 가천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를 펼쳐보자. 일각에서는 이 논문의 영어 부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엽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은 이 논문을 쓰고 2006년 2월 행정학 석사가 됐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5·31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지자체장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지자체 부정부패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오는 대신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학의 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심화·확장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 지적 정직성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초선 성남시장 때인 201310월 2일 한 행사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동아DB]
2006년 낙선한 이재명은 2010년에 결국 성남시장이 됐다. 그렇다면 그가 쓴 부정부패에 대한 논문이 시 행정의 현장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0년 성남시장 이재명’과 ‘2006년 행정학 석사 이재명’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모로 곱씹어볼만한 일이다. 정치적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재명의 학구열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학생 이재명의 타 저작 인용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위에서 말한 ‘따옴표를 빼먹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오류가 논문에서 눈에 띈다. 가령 13쪽, 이재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부패는 세무, 경찰, 위생, 환경, 건설 등의 분야에서 관행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백기완 외, 2000: 85-87).”

호기심을 참지 못해 논문을 읽다 말고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기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목록은 저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행본의 경우는 ‘김판석’에서 ‘백린’으로, 논문의 경우는 ‘김해동’에서 ‘박홍식’을 지나 ‘서울행정학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간에 들어가야 할 백기완의 이름과 그가 공저한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명이 직접 고르고 인용한 참고문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퍽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시 논문 제출 직전에 백기완이 행정학 석사 논문에 인용할만한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참고문헌 목록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인용문을 지웠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지적 정직성과 스칼라십(Scholarship)의 문제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쓴 논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은 지금껏 퍽 말초적인 수준에서 이뤄져 왔다.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재명의 경우처럼 논문에서 펼친 주장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경우라면 표절 여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내용’을 논박해야 한다. 내용을 논해야 설령 해당 논문이 표절로 판명된다 해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공적 담론이 남는다.

‘상향식 공천’ 듣기에는 좋은 말
그러한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지방정치 부정·부패 유형과 실태분석’을 다룬 3장을 펼쳐보자. 2005년 논문을 쓸 당시 이재명은 전국 정당이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하는 과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상향식 공천과 같은 공천결과의 합리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하향식 공천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공천과정과 관련된 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다”(20쪽)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과 좌절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재명은 다소 평정을 잃는 듯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일각에서 기초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자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정당에 의한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논의가 많았고, 특히 집권여당은 공천배제를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선거법협상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21-22쪽)

요컨대 이재명은 지방선거에 있어서 최대한 전국정당의 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하향식’ 공천 대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향식’ 공천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중앙정부와 전국정당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지방 단위에서 무한대의 경쟁과 돈 선거가 벌어지며,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재명 스스로도 이 난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논문의 서론에서 한 문단을 인용해보자.

“지방정치과정에서의 부패는 중앙정치와는 달리 극복방안이 마땅치 않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략) ①지방의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에는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견제수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②재정자립도가 높은 지방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에 의한 간섭적 정치적 통제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③이 때문에 지방정치에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조직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2쪽, 원문자는 인용자)

사정이 이러한데 지방의회 등에서 상향식 공천이 과연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까? ①에서 이재명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시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무방한 지자체장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영향력을 발휘해 지방의회까지 손에 쥐고 ‘지역 영주’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②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가령 IT(정보기술) 대기업이 몰려 있고 재정자립도가 높은 성남시 같은 곳의 지자체장은 더욱 감시와 견제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에서 제안하고 있는 주민 직접 참여를 위한 주민의 정치적 조직화라는 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장의 재선을 위해, 혹은 시장의 ‘더 큰 꿈’을 위해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제언을 따르면, ‘성남시장’ 이재명의 권력은 줄어들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16일 서울 지하철 잠실새내역 7번 출구 앞에서 집중유세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라는 명분
부정부패, 특히 지방정치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연구실보다는 현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재명의 논문은 그런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선거로 뽑히고 임기를 보장받은 부유한 지자체의 수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키워나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 아닐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당장 현업에서 쓰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건, 모든 공부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유명인의 공부와 논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 마치 조선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자로 쓰인 중국 책의 현실성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걸 누가 더 잘 외웠느냐를 놓고 겨루던 것을 연상케 한다. 누가 무슨 공부를 했고 그 내용이 논문에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진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대신,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눈으로 ‘성남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검토하고 비판했더라면 더 유익한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바보야, 문제는 ‘알이백’이 아니라 ‘원자력 컴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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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
무탄소를 위한 탈원전 철폐

일러스트=유현호

지금부터 약 8만년 전, 불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스스로 피워낼 줄은 모르던 원시 부족이 있었다. 우람족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힘이 센 다른 유인원 종족에게 습격당하고, 피신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불씨를 꺼뜨리고 만다. 불을 잃어버린 우람족은 음식을 익힐 수도, 추위를 피할 수도, 창끝을 뾰족하고 단단하게 다듬을 수도 없다. 부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 족장은 건강한 세 청년 나오, 아무카르, 고우에게 특명을 내린다. 불을 찾아오라고.

검치호에게 쫓기고 물에 빠져가며 고생하던 세 용사는 식인종에게 잡혀왔지만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이카를 구해준다. 이카는 우람족보다 기술과 문화가 발전한 다른 부족의 원시인이다. 이카는 힘세고 리더십이 있는 나오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나오에게 남녀 관계란 번식을 위한 짝짓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생존에만 급급한 우람족은 유머와 웃음을 알지 못한다. 이카는 실망하여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 버린다. 상실감이 든 나오는 불을 찾겠다는 본래 목적도 잊은 채 이카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1년 작 <불을 찾아서>의 내용이다.

어린 시절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의아했다. 불을 사용할 줄 알지만 스스로 피우지는 못한다니 이건 작위적 설정 아닐까?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화로의 신이자 가정의 신인 헤스티아가 있다. 우리의 고대 신화에도 부뚜막의 신,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는 조왕신이 존재한다. 원시시대를 넘어선 후에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원하는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한 최초의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에너지 전환은 GE에 고용되었던 이탈리아의 핵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티가 주창한 개념이다. 마르체티가 볼 때 인류 역사는 에너지의 발전사와 동일했다. 나무로 불을 지피던 시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이던 시기, 석유가 핵심 에너지원이자 전략 자산이던 시대, 그리고 원자력이라는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 오늘날로 나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나무나 풀을 소화할 수 없다. 대신 불을 붙인다. 나무는 활활 타오르면서 인간에게 따스함을 전해준다. 나무를 ‘먹지’ 않고도 그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인류는 불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에너지 생산·소비 시스템을 확보했다. 불을 이용해 손쉽게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요리를 함으로써 영양분을 남김없이 섭취할 수도 있게 되었다. 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인류는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인류 문명은 그 후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은 <불을 찾아서>의 고인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일이다. 석탄과 증기기관의 힘으로 작은 섬나라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넓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의 힘으로 미국이 영국 자리를 빼앗았고,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또 다른 에너지 시대를 열어젖힌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탈원전은 에너지 전환일까?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를 지나 천연가스로 이행한 과정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연료에 포함된 탄소(C)는 줄어들고 수소(H)가 늘어난 것이다. 그을음은 덜 생기면서 효율 높은 화력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최종적으로 발견한 고밀도 에너지 원자력은 심지어 에너지 생성 과정에서 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원자력을 버리고 태양광과 풍력을 늘리는 것을 ‘전환’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마르체티가 말한 에너지 전환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멈추면 작동하지 않는 비효율적 발전에 의존하는 것은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에너지 퇴행’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원자력으로 에너지를 전환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인류 발전 궤적을 놓고 봐도 그렇거니와, 기후변화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오늘날 상황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인류는 저탄소 에너지를 넘어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대폭 늘려야 한다. 지난 10일 ‘원자력 르네상스’를 선언하며 원전을 추가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방향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도 결국 그 행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떨까? 임기를 석 달도 남기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탈원전 인사를 임명한 것부터 그렇다. 애견협회 회장 자리에 보신탕 집 사장을 앉혀놓은 꼴이다. 탈원전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녹록지 않자 이재명 후보는 ‘탈원전이 아니라 감원전’이라고 양두구육(羊頭狗肉)하더니, 대선 후보 토론에서는 ‘RE100′ 같은 전문용어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핵심은 RE100(재생에너지 100%)이 아니라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것이며, 그러자면 탈원전을 철폐하고 원자력을 더 활용하며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든 호도하고자 한 것이다.

<불을 찾아서>의 마지막 장면. 나오는 이카와 함께 불씨를 들고 우람족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힘겹게 얻은 불씨를 누군가 실수로 또 꺼뜨리고 만다. 하지만 좌절은 금물. 이제는 불을 피울 줄 아는 이카가 있다. 이카는 능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붙인다. 나오와 우람족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그 전까지 몰랐던 사랑과 웃음까지 깨닫게 된다. 에너지 전환이 가져다 준 해피엔딩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시절부터 원자력에 고급 두뇌와 예산을 투자한 나라다. 이카가 속한 선진 부족의 길을 일찌감치 걷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렇게 손에 넣고 키워온 소중한 과학의 불씨를 꺼뜨리려는 자들이 있다. 실수라고 보자니 너무도 초지일관하여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를 식인종의 먹잇감으로 만들 셈인가?

2022-02-15

갑질사회, 캅질사회

일행이 통으로 전세 내어 쓰는 기차에서 앞자리에 발 올린 게 그렇게까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인가? 시트가 좀 더러워졌다 한들 적당히 털고 가면 될 일 아닌가?

또 마찬가지로, 어떤 술집을 전세 내듯이 해서 온 단체 손님들이, 술 마시다가 담배를 피운 게 그렇게까지 욕 먹을 일인가? 그것도 불판에 고기 굽는 집이라면 어차피 계속 환기해야 하는데 담배연기가 그렇게 대수인가?

물론 현행법상 실내 흡연은 과태로 부과 대상이다. 하지만 그게 검사를 사칭하고, 음주운전하고, 자신의 친족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고, 시장 권한으로 특정 업체에 아파트 개발 이익을 몰아준 것과 같은 급은 아니지 않은가?

윤석열이 기차에 발 올린 사진을 보자마자 '빨리 사과하고 털고 지나가자'고 하는 것은 타당한 판단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냐 권위의식 쩐다'는 식으로까지 나가는 것은 좀 이상해보인다. 좁은 기찻간에서, 주변인들이 익스큐즈 한다면, 그 정도 발 뻗는 것도 안 되는 일인가.

나는 만성 비염 환자다. 가급적이면 마스크를 안 쓰는 게 내 건강에 유익하다. 그래서 나는 실외에서 근처에 사람이 없으면, 특히 밤이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밤 산책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이건 코로나 예방이라는 목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세하게나마 본인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다.

사람들이 왜들 이러는 걸까? 윤석열의 기찻간 발 올리기 논란, 그에 맞불이라고 제시된 이재명 담배 짤방 등을 놓고 보니, 이해가 간다.

한국에 만연한 것은 '갑(甲)질'만이 아닌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감시하는 '캅(cop)질'도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범죄, 특히 권력 가진 자의 권력형 범죄는 '우리편'이라고 잘도 봐주면서, 막상 기껏해야 경범죄에 지나지 않을 무언가는 아주 죽어라고 잡아 족치는 이상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기찻간에 발 올린 적 없다. 고속버스에서도 그런 짓 하지 않는다. 의자도 뒤로 젖히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가는 성격이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도 않는다. 그런 짓을 옹호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이 글을 이재명 쉴드 치는 것으로 읽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오독하고 화내는 리플을 솔직히 보고 싶지 않고, 지겹다. 지우던가 가리던가 해버릴 예정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가 진정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원한다면, 중범죄와 경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중범죄는 확실히 잡고, 경범죄는 시민들끼리 서로 가볍게 훈계 계도하거나 그냥 봐주기도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갑질'과 '캅질'이 횡횡해서야 '사람 사는 세상'은 커녕 '법치국가'도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2022-02-12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소수민족 정책 탈 쓴 패권 전략

● 장이머우 연출 개막식 논란
● 쑨원, ‘오족공화’ 고안 이유
● 다민족주의, 약육강식 시대 유산
● 차별 않는다는 자치권, 양날의 칼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오성홍기를 든 소수민족 중 하나로 표현돼 논란을 빚었다. [뉴스1]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개막식의 한 장면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기 위해 나르는 사람들 중,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댕기머리를 한 여성이 한국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의 것인 양 포장하는 ‘동북공정’이라며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2월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연달아 실격 처리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은 한층 더 나빠졌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두 선수가 예선에서 탈락한 후, 폴란드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음에도 또 한 차례 비디오 판독을 거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폴란드 선수를 실격 처리하자 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중국만을 위한 잔치가 돼버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인터넷을 넘어 정치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주한중국대사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
그러자 2월 8일 주한중국대사관은 대변인 명의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의 중국 조선족 의상 관련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쇼트트랙 판정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개막식의 조선족 의상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중국이 ‘문화공정’과 ‘문화약탈’을 하고 있다며 억측과 비난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반발했다.

중국대사관의 입장은 이렇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므로, “중국의 각 민족 대표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한반도의 문화는 조선족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므로, 조선족이 조선족의 옷을 입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다 해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실 이런 입장은 중국대사관이 나서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 성향을 지니는 식자층과,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혐오 분위기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진작부터 해왔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일부다. 그런 조선족이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재현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필자는 최근 수년 사이 늘어난 조선족 혐오 분위기에 반대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해 조선족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일종의 예비 범죄자 집단인 양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보편적 인권 차원을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해서는 곤란하다. 저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혹은 소수민족 정책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확장과 지배 프로세스를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한 사람
중국은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말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4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56개의 민족을 나열하고 규정했다. 198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소수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어떠한 민족의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민족단결을 파괴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한 헌법적 기초에 근거해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民族區域自治法)을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구만 보면 좋은 말처럼 보인다.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분열 조장도 하지 않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하다. 모든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그 진의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중화민국을 수립했던 무렵,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고민이 깊었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일부 몽고족이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베이징을 차지하며 중원 전체를 정복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은 근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생 공화국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이 된 나라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족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할 것이며, 반대로 만주족과 몽고족은 정복자에서 피정복자로 굴러 떨어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중화민국을 파괴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쑨원은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회족), 한족, 티베트족이라는 다섯 개의 민족을 명시하고 이들 모두가 중화민국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이 오족공화의 개념은 이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한 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됐다. 일본인을 뜻하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몽골족, 한족, 만주족이 서로 협력하며 잘 살아가는 나라, 근대적인 국가 만주국을 이루겠다는 소리다.

노골적 차별과 지배 담론
이것은 분명 청나라 시절보다는 나아진 것이다. 만주족이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민족을 명시하고, 나열한 후 ‘민족 간 차별을 금지한다’고 선포하는 발상은 21세기는 고사하고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국이나 서구의 식자층이 떠올릴법한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다. 노골적인 차별과 지배 담론일 뿐이다.

오족공화, 오족협화, 그 뒤를 잇는 중국의 56개 민족 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뮈의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총독을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로 간주하고 행정체계 내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알제리는 치열한 전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얻어냈다.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 프랑스는 헌법을 개정한다. 마치 중국처럼 ‘프랑스는 프랑크인, 켈트인,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부르군트인, 골족, 바이킹, 유대인, 베르베르인 등 10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규정했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참고로 베르베르인이란 알제리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쏴 죽인 현지인 또한 베르베르인이다.

어떤가. 중국이 말하는 ‘다민족주의’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가. 특히 1950년을 전후해 무력으로 병합한 티베트과 위구르를 ‘수많은 중국의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하고 억압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해 서구 민주주의 문명권을 이루는 나라의 식자층이 생각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없다. 문화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점령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될 타민족을 억지로 한 나라의 범주에 포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등한 법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19세기-20세기 잔여물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구시대의 유산이다. 강자가 약자를 복속시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횡하던 시절에나 통용됐을 논리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중국식 다민족주의는 현대적인 다문화주의는 고사하고, 21세기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 앞의 평등’과 ‘공화주의’ 같은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민주국가의 이념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호적(戶口: 후커우)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주를 막는 것이 목적인데, 결과적으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소수민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각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주어지는 ‘자치권’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법을 적용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용납한다. 그것은 ‘민족’의 입장에서는 존중되겠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적 사각지대에 산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위구르와 티베트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조선족 역시 문화적 말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한국어) 수업을 하지 않고 중국어로만 시험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19세기와 20세기의 잔여물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로의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인구와 산업 구조의 변화,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요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는 이들과 그 자녀들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지닌, 말하자면 ‘한국계 한국인’과 가까운 과거에 한국으로 온 ‘외국계 한국인’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국민으로 취급하고 단일한 국민으로 동화해나가야 한다. 문화, 종교, 민족 같은 요소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05

선제타격이 전쟁도발? ‘총 든 자’가 ‘땅 파는 자’ 이기는 건 당연 [노정태의 시사철]

영화 ‘석양의 무법자’와
노이만의 ‘상호확증파괴’ 전략

일러스트=유현호
남북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미국의 서부. 세 명의 총잡이가 있다. 블론디(클린트 이스트우드), 엔젤 아이즈(리 벤클리프), 그리고 투코(일라이 월릭). 모두 금이 묻혀 있는 어떤 묘지를 쫓고 있던 중이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블론디와 투코는 나름대로 미운 정이 든 사이지만 덥석 믿을 수는 없다. 엔젤 아이즈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 냉혈한 현상금 사냥꾼. 본인에게 방해가 된다면 주저없이 쏴버리는 성격이다. 주인공인 블론디는 누굴 쏘아서 쓰러뜨려야 할까?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1966년작 <석양의 무법자>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국내에서도 1969년 첫 개봉 이래 TV를 통해 여러 차례 방송된 작품이므로 거리낌 없이 결말을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블론디는 엔젤 아이즈를 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투코 몰래 투코의 총에서 총알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투코도 엔젤 아이즈를 쐈지만 불발이었고, 엔젤 아이즈는 블론디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알이 담긴 총을 든 블론디는 투코에게 총을 겨누고, 자신이 아는 진짜 보물의 위치를 파라고 지시한다. “이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지, 친구. 하나는 장전된 총을 가진 자, 그리고 땅을 파는 자. 자네는 파는 쪽일세.”

긴장감 넘치다가도 유쾌하게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이 장면은 다른 차원에서도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국제정치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 전략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총을 쏘면 나는 죽는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총을 들고 너를 겨누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 날아오는 총알을 내 총으로 막을 수야 없지만, 너를 죽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지킬 힘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상호확증파괴는 헝가리 출신의 천재 미국 수학자 겸 물리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 제안한 개념이다. 그는 게임이론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사람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미국의 핵 정책을 입안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략가이기도 했다. 상호확증파괴는 게임이론에 입각한 전략 분석의 일종이다.

폰 노이만이 볼 때 여러 나라가 핵으로 무장하는 것은 황야의 총잡이들이 서로를 겨누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술로도 발사된 미사일의 탄두를 저격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50년대의 기술 수준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가 쏜 핵폭탄을 막을 길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 이쪽에서도 핵으로 무장하여, 상대가 핵을 쏠 때 마주 쏜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핵무장을 해야 하느냐다. 잔인한 계산을 해보자. 우리 쪽의 도시 열 개가 파괴될 때 상대방은 도시 하나를 잃을 뿐이라면, 상대는 기회가 주어질 때 핵을 쏠 것이다. 도시 하나를 1점이라고 하면 10점을 얻고 1점을 잃어 9점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 핵무장을 할 거면 어중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모든 도시를 한 번에 다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핵을 가져야 한다.

물론 상대방도 우리의 모든 도시를 파괴할 만한 핵무기를 갖출 것이다. 대단히 끔찍하게 들리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퍽 안정된 상황이다. 이제는 핵전쟁을 시작하면 서로 잃을 게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핵을 쐈을 때 ‘너 죽고 나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서부극과 달리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핵공격을 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파괴할 것이 너무도 분명해져야 비로소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이 역설적 결과를 묘사하고자, 헝가리에서 온 천재는 그 전략의 머리글자를 따 ‘MAD’라는 별명을 붙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상호확증파괴는 그 무서운 명칭과 달리 냉전 시기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했다. 막대한 양의 핵무기로 서로를 겨누고 있다 보니 미국과 소련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여러 차례 다가왔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평화는 말로만 외칠 때가 아니라 전쟁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서로에게 강요할 때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는 역설을 우리는 20세기 내내 확인한 셈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에게는 핵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북한이 미사일을 쏘기 전에, 준비 단계의 핵미사일 발사대를 선제적으로 ‘반격’하는 것뿐이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가 지난 1월 12일 “킬체인이라고 하는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 것은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순명료한 진리를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와 송영길 대표가 그렇다. 이재명은 윤석열에 대해 “위험한 전쟁 도발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송영길은 한 발 더 나아가 “아베 신조 등 일본 극우세력의 적(敵) 기지 공격 능력을 갖추자는 논리와 유사하다”며 친일 딱지까지 붙이려 들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려는 것일까?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인가, 아니면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의 심기인가?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는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The Good, The Bad, The Ugly)’이다. 블론디는 좋은 놈, 엔젤 아이즈는 나쁜 놈, 투코는 추한 놈에 해당한다. 우리는 블론디가 좋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투코를 속이고 금을 캐게 한 후 골탕을 먹이다가 살려주는 결말을 즐겁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권총에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투코가 할 수 있는 것은 블론디의 선의에 기대는 것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블론디는 장전한 총을 가지고 있는 반면 투코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체적인 핵무장은 고사하고 대북 킬체인이나 사드(THAAD) 추가 배치에도 반대하는 더불어민주당. ‘나쁜 놈’이 되지 말자는 원론적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결국 우리를 ‘추한 놈’이 되도록 주저앉히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필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찬성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세상이 ‘장전된 총을 든 자’와 ‘땅을 파는 자’로 나뉠 때, ‘땅을 파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치를 허락해도 되는 걸까. 대선을 한 달 앞둔 지금 온 국민이 함께 고민해볼 일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윤석열은 박정희 의료보험에서 얼마나 나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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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되려는 자, 보수·진보 줄타기 두려워마라

● 태초의 자본주의는 혁신적 이념
● 공화당 트럼프의 反세계화 기치
●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
● 존 듀이는 복지에 ‘파시즘’ 우려
● ‘진보’ 등에 칼 꽂은 여성주의


2021년 7월 2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마포구 박정희 기념재단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윤석열 캠프 제공]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

지난해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꺼낸 말이다. 이날 윤석열은 “인류 역사를 봐도 자유가 보장된 도시는 번영을 이루고 강했다”며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국가 헌법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 다수결이면 다 된다는 철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보수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흔히 기대할 답변도 이와 같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하는 가치로 놓고 자유에 더 큰 비중을 둔다거나, 시장 경제와 사회 복지 중 전자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국가여서 북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도 하다.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북한과 대화를, 보수 진영은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해 평화를 누리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자유시장과 경쟁, 군사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선호한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성(性)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가치를 옹호한다. 반면 진보 세력은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군비 축소를 주장하며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렇게만 바라보는 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다. 사회복지 역시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와 사유재산권, 제국주의,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진보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보수의 무기로 작동하기도 했다.

2021년 6월 29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선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그는 국민의힘 입당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고 답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몽테스키외의 낙관
자본주의는 진보 이념일까 보수 이념일까. 20세기 중후반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이들이라면 ‘보수의 이념’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란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기업들이 무제한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유럽, 그 중에서도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는 절대 왕정 시대였다. 임금의 변덕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경제 정책이 달라졌고 혼란이 발생했다. 다른 유럽 국가 사정도 비슷했다. 왕이나 군주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전쟁을 벌이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의적 세금을 걷고 무절제하며 방탕한 사치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핵심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개념은 당대의 식자층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주가 경제적 이해관계의 제약을 받아 충동적, 자의적, 돌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자제한다면 국가 구성원 전체가 예측 가능한 삶을 살며 더 큰 풍요와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퍼져나갔다.

당대를 풍미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낙관적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한 문장에 잘 축약돼 있다.

“정념이 사람들에게 악인이 될 생각을 불어넣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익인 상황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몽테스키외, 그와 동시대인이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 등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우리를 혼돈과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진 셈이다. 요컨대 태초의 자본주의는 ‘진보적 이념’이다.

자본주의를 진보 이념으로 여기는 관점은 뒷 세대인 애덤 스미스의 시대부터 비판과 회의에 직면했다. 19세기에 이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뒤바뀐 처지에 놓이게 된다(더 자세한 논의를 원하는 독자는 엘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정념과 이해관계’(후마니타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특히 국경 없는 자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각해보자.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인 세계화에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은 국경을 넘어 상품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오가게 함으로써 기업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현재 지배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보수’가 반대하고 ‘진보’가 찬성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브렉시트나 트럼프에 대해 찬반 논의를 벌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자본주의는 보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진보 같은 식의 단편적 사고방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경직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한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밝은 정치적 미래는 오지 않는다.

복지 강화로 이어진 박정희의 결단
그 어떤 이념도 그 자체만으로는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보성과 보수성을 이념의 속성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 따라 어떠한 이념이 진보적으로 혹은 보수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와 같은 역설을 ‘복지국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 복지는 진보의 이념인가, 보수의 이념인가. 이 주제에 해박한 독자라면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노동자의 양로금이나 건강, 의료 보험제도 같은 복지 제도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그는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진보적 인물이 아니다. 독일 제국의 영광을 꿈꾸었고, 민주주의에 반대했으며, 통일된 독일의 군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오히려 그런 비스마르크였기에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갔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강한 군인들’이 필요하며, 튼튼한 군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라난 아이들과 의료 체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가 오히려 시장질서가 아닌 국가 주도의 복지 체계를 강화하는 역설은 우리도 경험한 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마련된 현행 의료보험 체계가 그렇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국가가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 체계를 운영할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의료를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주의적’으로 바꿔버렸다. 온 국민을 국가가 운영하는 단일한 의료보험에 가입시킨 후, 병원은 일부 비보험 항목을 제외하면 오직 그 의료보험을 통해서만 돈을 받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논란이 있는 주제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폭넓게 확보하는 동시에 의사들에게도 일정하게 치료 대상과 항목에 있어 자유를 보장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서도 병원에 대해 온전히 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지는 않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참고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성공 사례가 돼 있다. 즉 사회복지와 의료보험 같은 주제에서 보수와 진보는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변증법적으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움직인다.

국가 주도 복지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날 선 비판을 한 철학자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보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존 듀이다. 듀이가 볼 때 국가 중심의 복지 체계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국가가 국민을 복지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필요를 파악해 그것을 다시 국가가 나눠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국가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은 듀이가 볼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듀이 스스로는 사회 진보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국가가 복지를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셈이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한국의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 같은 보수주의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과 사회 복지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반면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철학자 듀이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식의 복지를 ‘국가 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 부르며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당대에 손꼽히는 ‘남성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가 복지를 이유로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한쪽의 전유물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썼다. [현실문화 제공]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각을 적용해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물론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그 출발부터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적 의제로서 영역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당시 여당은 자유당이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었다. 제1야당은 보수당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당연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자유당은 언제나 말로는 여성 참정권을 옹호한다고 하지만, 언제 투표권을 줄 것이냐고 물어보면 늘 ‘나중에’라는 답만 했기 때문이다.

팽크허스트가 볼 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약속을 어기는 자유당을 심판하지 않고 ‘비판적지지’만 하고 있는 한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자유당으로서는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느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에너지만 쏙 빨아먹은 후 야당인 보수당 핑계를 대며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테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며 비난했다.”

마침 보궐선거로 의석 하나가 기로에 놓였고, 그 의석을 자유당이 보수당에 빼앗기면 여야가 바뀔 상황이었다. 그런 중요한 선거에서 팽크허스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보수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정치적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라고 여긴 셈이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 운동은 교양 있는 중산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자유당 지지자였기에 팽크허스트의 방향 전환은 내부에서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다.

팽크허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프라제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자유당은 선거에서 졌고 보수당이 집권했지만 세상은 자유당의 협박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정치적 파괴력이 입증됐기에, 오히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뷰파인더 칼럼(윤석열과 보수여, ‘이대남 다 걸기’ 초강수 아닌 惡手)에서 말했던 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다. 페미니즘을 ‘진보의 전유물’로 보는 발상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특정 진영과 정치적 입장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의 등에 칼을 꽂고 ‘보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적 의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과 자유시장주의
‘주당 52시간 노동제를 철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품질이 떨어지는 식품을 사서 먹을 수도 있게 해야 한다.’ 정치 초년생 윤석열을 곤란하게 했던 문제의 발언들이다. 언론에서 축소, 과장, 왜곡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각각의 발언을 관통하는 맥락을 더듬어볼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 사회, 정치철학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이 위와 같은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한 것은 그의 내면에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대선후보로서 윤석열이 적합한 인물인지 근심하던 기존 지지층에는 퍽 안심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도층의 눈에는 그렇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유시장’이라는 공식에 함몰돼 현재 우리가 겪는 시장의 실패와 부작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그러한 우려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무상급식 조례안에 반대하며 주민투표를 시행했다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자진사퇴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세련된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시 행정을 처리해나가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밥 주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며 주민투표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러자 상당수의 서울시민은 냉소를 넘어 분노했다. 심지어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지지층마저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평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 투표소에 갈 만큼 한가한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수주의=복지 반대’라는 단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교조적 태도를 보인 오세훈의 정치적 악수(惡手)는 ‘안철수 현상’과 맞물려 서울시장 박원순을 낳았고, 이후 서울시를 기반으로 민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요, 사회복지는 사회복지다. 진보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보수의 페미니즘도 있다. 진보의 철학, 보수의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선거는 어떤 결과가 나오건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을 위해 유익한 대안을 내놓는 정치 세력과 이념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