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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문제적 개념 - 의회 불신의 난감한 산물…외부 여론이 방향타돼야

여야간의 합의로 ‘사회적 논의기구’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기술해내지 못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여야는 서로 합의하지 않은 채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었다.’

3월 13일 오전 2시 현재까지 ‘사회적 논의기구’에 대해 합의된 것은 세 가지 뿐이다. 첫째,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인다. 둘째, 한나라당에서 10명, 민주당에서 8명, 선진과창조의모임에서 2명을 추천한다. 셋째, 100일 후에 없애버린다. 첫째와 둘째 조항만을 놓고 보면 이게 ‘사회적 논의기구’인지 친목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조항이 더해지면서, 게다가 그 친목회는 시한부 친목회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 친목회의 어깨에 언론관련법 등 쟁점법안의 미래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김우룡, 강상현 위원장이을 비롯한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위원장, 나경원 한나라당 간사, 전병헌 민주당 간사, 이용경 선진과창조모임 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민주당이 잠시 ‘야성’을 되찾았다가 ‘이성’을 회복한 후, 2월로 넘어온 국회에서 언론관련법 등의 처리에 대해 내놓은 해법이 다름 아니라 이것이다.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서 공론을 모은 후, 100일 후에 표결처리한다. 민주당은 ‘공론을 모은다’에 방점을 찍었겠지만, 한나라당은 ‘표결처리’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 기구의 성격과 지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합의되지 않은 ‘논의기구’만이 덩그러니 튀어나와 버렸다.

이 논의기구의 성격을 둘러싸고 한겨레와 조선일보는 극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의 경우 ‘사회적 논의기구’의 역할이 자문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조선일보는 주호영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의 기고문을 통해 그 성격을 ‘자문기구’로 한정한다는 입장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 스스로는 여야의 합의를 ‘거대여당의 자승자박’이라는 식으로 한층 더 낮게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일보가 싫어한다고 해서 정당성을 역으로 추출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당 또한 자승자박을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 논의기구’가 그저 자문기구에 머무를 뿐이라면, 그 협의 내용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한나라당은 무시하고 표결에 임하면 그만이다. 반면 ‘사회적 논의기구’의 결정 내용에 국회의원들이 따라야 하는 강제성이 부가된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을 통한 국민의 의사결정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되므로 위헌 소지가 매우 높아진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고흥길 위원장이 위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정치적인 계산을 뒤로 접어두고,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만 본다면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고작 20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 의해, 국회의원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 법안에 동의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좌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았다’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국회의원의 표결권이 침해되는 것은 곧장 국민주권이 침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설령 그것이 미디어법 관련 악법에 대한 것이어도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사회적 논의기구’ 결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기구가 국회의원의 결정권을 좌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내 초헌법적 기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해서 고작 100일간 시간을 끄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은 일종의 음모론을 채택하는 것이다. 어차피 합의는 결렬되게 되어 있으므로, ‘왜 너희들은 사회적 협의기구의 견해도 존중하지 않느냐’며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그 ‘전략’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같은 음모론적 입장에서 따져보자. 홍준표 원내대표를 포함한 한나라당의 소속 의원들은 진작부터 ‘사회적 논의기구는 자문기구일 뿐’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어차피 결렬될 협상’에 대한 고려는 이쪽 뿐 아니라 저쪽에서도 하고 있다. 상대를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현재 구성된 ‘사회적 논의기구’의 면면보다는,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사회적 논의기구’는, 정치인에 대한 혐오, 정치적 합의 과정에 대한 폄하, 정치적인 것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우리 시대의 경향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미 국회 자체가 ‘사회적 논의’를 위해 구성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또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고, 그 구성원에서는 정치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능 마비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토론도 다른 사람이 하고, 합의도 다른 사람이 하고, (민주당에서 암시하는대로) 표결권도 다른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면, 대체 국회의원은 뭐하러 뽑는단 말인가? 격투기 보려고 4년에 한 번씩 투표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이렇게 파행적으로 운행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인의 참여를 막고, 이른바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보니, 변모씨 같은 인물이 그 20인의 원로원에 한 다리 끼어들게 되는 비극적인, 아니 희극적인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지 않은가. 뉴라이트 국회의원 신지호는 그나마 ‘싱크탱크’를 운영해오기라도 했지, 변희재는 대체 뭘 했다고 국회에서 이 중요한 논의를 하게 된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고? 한나라당에서 변희재를 ‘사회적 논의기구’의 패널로 추천했다, 이런 말이다. 만약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 권한의 20분의 1은 변희재가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예로부터 민중들은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라고 말해왔다.

우리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를 비난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응원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난감함을 우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에 따라 여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지금 시민사회가 내놓을 수 있는 정치권에의 대답은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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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 미국 대선 결과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몇 가지 시선

버락 오바마는 '변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미국의 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것을 보도하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의 자세는 새로움과 거리가 먼 것 같다. 한국 주류 언론에서 오바마의 당선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인간극장. 2. (어쩌고 저쩌고) 흑인. 3. 부시와는 다름. 그리고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 두 가지 정도 사안을 살펴본다. 첫째, 오바마가 당선되었는데 한미 FTA를 원안대로 통과시킬 수 있을까? 둘째, '친미 반북'을 표방하던 정치 세력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될까?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보도 포인트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궁금한 것일 수 있다(가령, '아니,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됐단 말야?'라며 놀랄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또 케냐 이민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을 딛고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의 '성공 신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같은 정보만을 쏟아내는 국내 언론들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바마의 당선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명확히 하고,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대강이라도 나누어 보는 것이다.

   
  ▲ 뉴욕타임스 웹사이트 캡처.  
 
여러 외신과 주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보자. 'It's time'이라는 명료한 표어와, 속된 말로 대단히 '간지나는' 표지로 오바마의 당선 커버스토리를 낸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가 당장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는 '적절한 상황이 되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을 뿐,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즉시 철군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걸지 않았다. 오바마가 일거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컴퍼니에 인수된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Foreign Policy>는, 각계 전문가 10인에게 다음 행정부를 구성할 만한 '드림팀'을 꼽아달라고 청탁했다(<Foreign Policy>, 2008년 11/12월호). 그 결과 다섯 명의 전문가가 로버트 게이츠 현 국방장관의 연임을 요청했다. 그가 이라크 파병군 증가를 통해 상황 호전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당장 미군을 빼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11월 이후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된 경제 살리기는 어떨까.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룬다. 2001년 경기 침체기 당시에도 소득 중 소비 비중을 줄이지 않았던 미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소비자들의 신용카드가 닫혀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경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미국 경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카리스마나 구호만을 통해 극복될 수 없을만큼 구체적이고 심각한 것이다.

그래도 영국의 <가디언>은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의 희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환호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그 희망은 구체적인 정책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가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뚜렷한 정치적 입장에 근거하는 듯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의 건강 보험 시스템, 막대한 재정 적자, 경제 위기 등을 오직 '올바른 태도'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미국 대선이 2004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뉴욕타임스 사이트에 있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먼은 '오바마는 당당하게 진보적인 가치를 내걸고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음으로써 승리했다'며, 그 가치는 결코 폄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현실은 어렵지만 나침반만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 가디언 웹사이트 캡처.  
 
하지만 구체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시 현실은 어렵다. 클린턴 1기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거대 기업들의 로비와 영향력이 살아있는 한 오바마가 자신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오바마가 오늘 승리한다면, 진짜 시험이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요컨대 그는 희망을 걸고 있지만 낙관하지는 못하고 있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10월 29일 영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사이먼 잰킨스는 <가디언>에 글을 보냈는데, 그 첫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오바마를 주식에 빗대어, '지금 오바마를 팔아라'라고 권한다. 오바마 주식은 과대평가되어 있으며 장래 다가올 시장은 미쳐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 너무 큰 기대를 걸면, 나중에 안게 될 실망의 크기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공화당원이 아닌 흑인 대통령 후보'라는 것 뿐이다. 오바마가 자신의 선거운동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의 개인적 매력과 풀뿌리 조직의 결합 덕분이었다. 그 둘은 국정 운영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매도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바마'를 아는 것보다 '미국'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오바마와 나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외모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오바마만을 놓고 아무리 궁리해봐야 우리는 미 대선과 한반도의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노정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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