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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26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1976년 시작된 ‘페트로달러’ 시스템
● 중동 산유국 보호 美 군사력이 기반
●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이거늘


2월 21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하며 ‘기축통화 논쟁’이 불거졌다. [채널A 화면 캡처]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21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한 말이다. 국가 채무를 더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의 견해에 맞서는 본인의 논거로서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학자이기도 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역대급 똥볼”이라고 질타한 것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재명은 2월 23일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얼마 전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에 편입될 근거’를 언급했고 본인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소리다. 애석하게도 이재명의 인용은 전경련의 본의와는 차이가 있다.

‘기축통화국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발언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탓도 없지 않다. 이재명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기축통화는 아니지만 한국 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한국 돈을 냈다, 호텔에서 팁으로 한국 돈을 주고 나왔는데 좋아하더라, 같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우리 돈의 힘이 세진 것이 맞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도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LNG선으로 대표되는 몇 개의 독보적 수출 품목이 있고, 자동차, 유조선, 기타 공업생산품 역시 준수한 대외경쟁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확장된 경제력과 인터넷의 힘을 타고 한국의 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없다. 왜일까?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 오늘날의 미국 달러가 이에 해당한다. [동아DB]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개념에 따르면, 외환 시장에서 B라는 나라의 화폐와 C라는 나라의 화폐를 거래할 때 기준이 되는 A라는 화폐, 그것이 기축통화다. 우리가 한국의 원화를 일본의 엔화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환율표에는 한국 돈 얼마로 일본 돈 얼마를 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는 원화 대 달러, 엔화 대 달러의 교환비율이 먼저 존재한다. 달러를 매개로 원화의 가치, 엔화의 가치를 평가한 후, 비로소 원화 대 엔화의 환율이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를 때 한국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뜻으로 기축통화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 정의를 따르더라도 원화는 기축통화로 인정될 수 없다.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은 우리의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 규모보다 작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액 비중을 보면 그렇다. 1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 유로가 36.56%로 2위다. 1위와 2위 이후로는 격차가 한없이 벌어진다. 영국의 파운드는 3위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고작 6.3%에 지나지 않는다. 원화는 이 순위표에서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앞으로도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학’의 눈으로 바라본 설명에 불과하다. 노골적인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제국의 화폐는 그 영향권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 저장 및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부터 오늘날의 미국 달러까지 변치 않는 냉정한 현실이다.

게다가 달러는 다른 제국의 기축통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가치를 귀금속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로마의 디나르는 기본적으로 은화였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는 디나르의 은 함량이 높고 정품성을 보장받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바깥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로마의 힘이 기울어지면서 점점 은 함유도가 떨어지고 로마의 해외 구매력 역시 꺾이는 악순환이 펼쳐졌다. 달러 역시 연방준비제도와 포트 녹스에 쌓여 있는 금괴를 통해 가치를 최종적으로 담보했으나 베트남 전쟁 비용 및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1971년 금태환을 중단했다.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군사력
그렇다면 대체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1970년대, 세상에는 금보다 더 소중한 재화가 하나 있었다. 플라스틱의 원료이며, 자동차, 배, 비행기 등 거의 모든 교통수단의 연료인데다가, 심지어 비료를 생산할 때도 필요한 ‘검은 황금’. 석유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를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다. 그 위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석유의 지배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976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왕가와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하며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속한 나라들도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니라 원유로 태환되는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몇몇 나라들은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나라들의 말로는 썩 좋지 않았다. 2000년 9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산 원유 결제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디나르 금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원유를 거래하자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뒤집히고 카다피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전쟁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음모론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는 페트로달러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미국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묶어놓을 수 있는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이 갖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힘이란 미국 달러로만 살 수 있는 석유의 힘,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대가로 유지하다
이재명의 ‘기축통화국’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그래서다. 재정 적자를 늘려 당장 복지 예산으로 뿌리자는 취지로 기축통화국 발언을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과 그가 주창했던 기본소득 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기축통화를 그저 ‘맘 놓고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돈’, 일종의 ‘재정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에게 기축통화국이란 ‘공짜로 돈 찍어내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축통화란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다. 패권국이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을 모두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린 6‧25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베트남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퍼부으면서도 굴욕적 퇴각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고, 여러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대내외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달러 패권은 그런 면에서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군대에서 젊음을 바치며 때로는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는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것을 대가로 얻어냈고 지금껏 유지하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한국 돈의 대외적 신뢰도가 높아지니 마치 ‘공짜 돈’이 생긴 것처럼 재정 부채 비율을 10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재명의 주장은 너무도 가벼운 소리다. 패권국의 화폐, 기축통화는 그런 게 아니다. 패권을 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적대국 혹은 제3국의 피해 역시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입만 열면 반미 자주를 외치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달러에 대한 세계의 신뢰는 결국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신뢰다. 석유를 틀어쥔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 협의의 산물이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온 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진보적 가치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썩 달가운 미래도 아닐 것이다.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
이 글의 목적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게 패권국이 된 미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점령했으면서도 ‘사용료’를 받는 대신 각국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이것은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패권과 질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결백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같은 나라였지만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권으로 편입된 북한의 엇갈린 운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 그 시점에 주어진 다른 선택지에 비하면 분명히 낫다.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19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행정학 석사 李’를 들여다보다

● 주제, ‘지방정치 부정부패 극복방안’
● 백기완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 “지방정치에 주민 직접참여 활성화”
● 자칫 ‘지역 영주’ 부채질하는 주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학위 논문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 표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 학위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검증은 대선 후로 미뤄졌다. 지난해 말 가천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조사 계획에 따르면 그렇다. 가천대는 4월 7일까지 조사위원회의 검증을 마치고 4월 17일까지 연구윤리위원회 승인 등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논문 재조사 결과 발표도 대선 이후인 3월 31일로 미뤄졌다.

두 사람의 논문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인 반면 김건희는 후보의 부인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건희의 논문과 학위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에서 학력 부족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득했다는 인상을 준다.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만한 일이지만 비슷한 목적으로 학위를 딴 수많은 이들과 비교해야 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
이재명의 논문은 다르다. 이재명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이재명은 201611월 4일 부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라서 “어디 이름도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 극복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야간 특수대학원을 갔고,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굳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다만 인용문의 따옴표를 못 친 게 있어서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재명은 지난해 1229MBC 라디오에 나와서는 “(학교 측에) 필요 없다, 제발 취소해달라, 그러고 있는 중”이라며 “제가 인정한다. 제대로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몇몇 구절을 가져다 놓고 비교하거나 ‘카피킬러’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지수를 산출해볼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4월 17일 이후에나 내려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재명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 또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쓴 석사논문의 표절 여부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읽고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512월 경원대(현 가천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를 펼쳐보자. 일각에서는 이 논문의 영어 부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엽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은 이 논문을 쓰고 2006년 2월 행정학 석사가 됐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5·31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지자체장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지자체 부정부패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오는 대신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학의 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심화·확장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 지적 정직성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초선 성남시장 때인 201310월 2일 한 행사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동아DB]
2006년 낙선한 이재명은 2010년에 결국 성남시장이 됐다. 그렇다면 그가 쓴 부정부패에 대한 논문이 시 행정의 현장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0년 성남시장 이재명’과 ‘2006년 행정학 석사 이재명’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모로 곱씹어볼만한 일이다. 정치적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재명의 학구열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학생 이재명의 타 저작 인용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위에서 말한 ‘따옴표를 빼먹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오류가 논문에서 눈에 띈다. 가령 13쪽, 이재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부패는 세무, 경찰, 위생, 환경, 건설 등의 분야에서 관행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백기완 외, 2000: 85-87).”

호기심을 참지 못해 논문을 읽다 말고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기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목록은 저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행본의 경우는 ‘김판석’에서 ‘백린’으로, 논문의 경우는 ‘김해동’에서 ‘박홍식’을 지나 ‘서울행정학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간에 들어가야 할 백기완의 이름과 그가 공저한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명이 직접 고르고 인용한 참고문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퍽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시 논문 제출 직전에 백기완이 행정학 석사 논문에 인용할만한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참고문헌 목록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인용문을 지웠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지적 정직성과 스칼라십(Scholarship)의 문제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쓴 논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은 지금껏 퍽 말초적인 수준에서 이뤄져 왔다.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재명의 경우처럼 논문에서 펼친 주장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경우라면 표절 여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내용’을 논박해야 한다. 내용을 논해야 설령 해당 논문이 표절로 판명된다 해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공적 담론이 남는다.

‘상향식 공천’ 듣기에는 좋은 말
그러한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지방정치 부정·부패 유형과 실태분석’을 다룬 3장을 펼쳐보자. 2005년 논문을 쓸 당시 이재명은 전국 정당이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하는 과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상향식 공천과 같은 공천결과의 합리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하향식 공천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공천과정과 관련된 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다”(20쪽)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과 좌절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재명은 다소 평정을 잃는 듯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일각에서 기초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자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정당에 의한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논의가 많았고, 특히 집권여당은 공천배제를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선거법협상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21-22쪽)

요컨대 이재명은 지방선거에 있어서 최대한 전국정당의 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하향식’ 공천 대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향식’ 공천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중앙정부와 전국정당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지방 단위에서 무한대의 경쟁과 돈 선거가 벌어지며,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재명 스스로도 이 난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논문의 서론에서 한 문단을 인용해보자.

“지방정치과정에서의 부패는 중앙정치와는 달리 극복방안이 마땅치 않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략) ①지방의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에는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견제수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②재정자립도가 높은 지방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에 의한 간섭적 정치적 통제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③이 때문에 지방정치에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조직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2쪽, 원문자는 인용자)

사정이 이러한데 지방의회 등에서 상향식 공천이 과연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까? ①에서 이재명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시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무방한 지자체장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영향력을 발휘해 지방의회까지 손에 쥐고 ‘지역 영주’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②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가령 IT(정보기술) 대기업이 몰려 있고 재정자립도가 높은 성남시 같은 곳의 지자체장은 더욱 감시와 견제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에서 제안하고 있는 주민 직접 참여를 위한 주민의 정치적 조직화라는 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장의 재선을 위해, 혹은 시장의 ‘더 큰 꿈’을 위해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제언을 따르면, ‘성남시장’ 이재명의 권력은 줄어들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16일 서울 지하철 잠실새내역 7번 출구 앞에서 집중유세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라는 명분
부정부패, 특히 지방정치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연구실보다는 현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재명의 논문은 그런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선거로 뽑히고 임기를 보장받은 부유한 지자체의 수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키워나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 아닐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당장 현업에서 쓰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건, 모든 공부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유명인의 공부와 논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 마치 조선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자로 쓰인 중국 책의 현실성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걸 누가 더 잘 외웠느냐를 놓고 겨루던 것을 연상케 한다. 누가 무슨 공부를 했고 그 내용이 논문에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진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대신,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눈으로 ‘성남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검토하고 비판했더라면 더 유익한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12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소수민족 정책 탈 쓴 패권 전략

● 장이머우 연출 개막식 논란
● 쑨원, ‘오족공화’ 고안 이유
● 다민족주의, 약육강식 시대 유산
● 차별 않는다는 자치권, 양날의 칼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오성홍기를 든 소수민족 중 하나로 표현돼 논란을 빚었다. [뉴스1]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개막식의 한 장면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기 위해 나르는 사람들 중,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댕기머리를 한 여성이 한국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의 것인 양 포장하는 ‘동북공정’이라며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2월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연달아 실격 처리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은 한층 더 나빠졌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두 선수가 예선에서 탈락한 후, 폴란드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음에도 또 한 차례 비디오 판독을 거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폴란드 선수를 실격 처리하자 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중국만을 위한 잔치가 돼버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인터넷을 넘어 정치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주한중국대사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
그러자 2월 8일 주한중국대사관은 대변인 명의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의 중국 조선족 의상 관련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쇼트트랙 판정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개막식의 조선족 의상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중국이 ‘문화공정’과 ‘문화약탈’을 하고 있다며 억측과 비난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반발했다.

중국대사관의 입장은 이렇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므로, “중국의 각 민족 대표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한반도의 문화는 조선족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므로, 조선족이 조선족의 옷을 입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다 해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실 이런 입장은 중국대사관이 나서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 성향을 지니는 식자층과,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혐오 분위기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진작부터 해왔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일부다. 그런 조선족이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재현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필자는 최근 수년 사이 늘어난 조선족 혐오 분위기에 반대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해 조선족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일종의 예비 범죄자 집단인 양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보편적 인권 차원을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해서는 곤란하다. 저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혹은 소수민족 정책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확장과 지배 프로세스를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한 사람
중국은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말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4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56개의 민족을 나열하고 규정했다. 198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소수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어떠한 민족의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민족단결을 파괴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한 헌법적 기초에 근거해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民族區域自治法)을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구만 보면 좋은 말처럼 보인다.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분열 조장도 하지 않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하다. 모든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그 진의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중화민국을 수립했던 무렵,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고민이 깊었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일부 몽고족이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베이징을 차지하며 중원 전체를 정복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은 근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생 공화국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이 된 나라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족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할 것이며, 반대로 만주족과 몽고족은 정복자에서 피정복자로 굴러 떨어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중화민국을 파괴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쑨원은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회족), 한족, 티베트족이라는 다섯 개의 민족을 명시하고 이들 모두가 중화민국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이 오족공화의 개념은 이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한 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됐다. 일본인을 뜻하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몽골족, 한족, 만주족이 서로 협력하며 잘 살아가는 나라, 근대적인 국가 만주국을 이루겠다는 소리다.

노골적 차별과 지배 담론
이것은 분명 청나라 시절보다는 나아진 것이다. 만주족이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민족을 명시하고, 나열한 후 ‘민족 간 차별을 금지한다’고 선포하는 발상은 21세기는 고사하고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국이나 서구의 식자층이 떠올릴법한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다. 노골적인 차별과 지배 담론일 뿐이다.

오족공화, 오족협화, 그 뒤를 잇는 중국의 56개 민족 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뮈의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총독을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로 간주하고 행정체계 내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알제리는 치열한 전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얻어냈다.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 프랑스는 헌법을 개정한다. 마치 중국처럼 ‘프랑스는 프랑크인, 켈트인,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부르군트인, 골족, 바이킹, 유대인, 베르베르인 등 10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규정했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참고로 베르베르인이란 알제리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쏴 죽인 현지인 또한 베르베르인이다.

어떤가. 중국이 말하는 ‘다민족주의’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가. 특히 1950년을 전후해 무력으로 병합한 티베트과 위구르를 ‘수많은 중국의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하고 억압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해 서구 민주주의 문명권을 이루는 나라의 식자층이 생각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없다. 문화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점령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될 타민족을 억지로 한 나라의 범주에 포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등한 법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19세기-20세기 잔여물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구시대의 유산이다. 강자가 약자를 복속시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횡하던 시절에나 통용됐을 논리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중국식 다민족주의는 현대적인 다문화주의는 고사하고, 21세기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 앞의 평등’과 ‘공화주의’ 같은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민주국가의 이념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호적(戶口: 후커우)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주를 막는 것이 목적인데, 결과적으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소수민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각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주어지는 ‘자치권’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법을 적용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용납한다. 그것은 ‘민족’의 입장에서는 존중되겠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적 사각지대에 산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위구르와 티베트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조선족 역시 문화적 말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한국어) 수업을 하지 않고 중국어로만 시험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19세기와 20세기의 잔여물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로의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인구와 산업 구조의 변화,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요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는 이들과 그 자녀들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지닌, 말하자면 ‘한국계 한국인’과 가까운 과거에 한국으로 온 ‘외국계 한국인’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국민으로 취급하고 단일한 국민으로 동화해나가야 한다. 문화, 종교, 민족 같은 요소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05

윤석열은 박정희 의료보험에서 얼마나 나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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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되려는 자, 보수·진보 줄타기 두려워마라

● 태초의 자본주의는 혁신적 이념
● 공화당 트럼프의 反세계화 기치
●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
● 존 듀이는 복지에 ‘파시즘’ 우려
● ‘진보’ 등에 칼 꽂은 여성주의


2021년 7월 2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마포구 박정희 기념재단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윤석열 캠프 제공]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

지난해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꺼낸 말이다. 이날 윤석열은 “인류 역사를 봐도 자유가 보장된 도시는 번영을 이루고 강했다”며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국가 헌법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 다수결이면 다 된다는 철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보수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흔히 기대할 답변도 이와 같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하는 가치로 놓고 자유에 더 큰 비중을 둔다거나, 시장 경제와 사회 복지 중 전자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국가여서 북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도 하다.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북한과 대화를, 보수 진영은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해 평화를 누리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자유시장과 경쟁, 군사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선호한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성(性)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가치를 옹호한다. 반면 진보 세력은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군비 축소를 주장하며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렇게만 바라보는 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다. 사회복지 역시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와 사유재산권, 제국주의,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진보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보수의 무기로 작동하기도 했다.

2021년 6월 29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선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그는 국민의힘 입당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고 답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몽테스키외의 낙관
자본주의는 진보 이념일까 보수 이념일까. 20세기 중후반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이들이라면 ‘보수의 이념’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란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기업들이 무제한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유럽, 그 중에서도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는 절대 왕정 시대였다. 임금의 변덕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경제 정책이 달라졌고 혼란이 발생했다. 다른 유럽 국가 사정도 비슷했다. 왕이나 군주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전쟁을 벌이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의적 세금을 걷고 무절제하며 방탕한 사치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핵심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개념은 당대의 식자층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주가 경제적 이해관계의 제약을 받아 충동적, 자의적, 돌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자제한다면 국가 구성원 전체가 예측 가능한 삶을 살며 더 큰 풍요와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퍼져나갔다.

당대를 풍미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낙관적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한 문장에 잘 축약돼 있다.

“정념이 사람들에게 악인이 될 생각을 불어넣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익인 상황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몽테스키외, 그와 동시대인이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 등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우리를 혼돈과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진 셈이다. 요컨대 태초의 자본주의는 ‘진보적 이념’이다.

자본주의를 진보 이념으로 여기는 관점은 뒷 세대인 애덤 스미스의 시대부터 비판과 회의에 직면했다. 19세기에 이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뒤바뀐 처지에 놓이게 된다(더 자세한 논의를 원하는 독자는 엘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정념과 이해관계’(후마니타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특히 국경 없는 자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각해보자.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인 세계화에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은 국경을 넘어 상품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오가게 함으로써 기업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현재 지배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보수’가 반대하고 ‘진보’가 찬성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브렉시트나 트럼프에 대해 찬반 논의를 벌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자본주의는 보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진보 같은 식의 단편적 사고방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경직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한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밝은 정치적 미래는 오지 않는다.

복지 강화로 이어진 박정희의 결단
그 어떤 이념도 그 자체만으로는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보성과 보수성을 이념의 속성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 따라 어떠한 이념이 진보적으로 혹은 보수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와 같은 역설을 ‘복지국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 복지는 진보의 이념인가, 보수의 이념인가. 이 주제에 해박한 독자라면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노동자의 양로금이나 건강, 의료 보험제도 같은 복지 제도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그는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진보적 인물이 아니다. 독일 제국의 영광을 꿈꾸었고, 민주주의에 반대했으며, 통일된 독일의 군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오히려 그런 비스마르크였기에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갔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강한 군인들’이 필요하며, 튼튼한 군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라난 아이들과 의료 체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가 오히려 시장질서가 아닌 국가 주도의 복지 체계를 강화하는 역설은 우리도 경험한 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마련된 현행 의료보험 체계가 그렇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국가가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 체계를 운영할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의료를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주의적’으로 바꿔버렸다. 온 국민을 국가가 운영하는 단일한 의료보험에 가입시킨 후, 병원은 일부 비보험 항목을 제외하면 오직 그 의료보험을 통해서만 돈을 받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논란이 있는 주제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폭넓게 확보하는 동시에 의사들에게도 일정하게 치료 대상과 항목에 있어 자유를 보장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서도 병원에 대해 온전히 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지는 않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참고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성공 사례가 돼 있다. 즉 사회복지와 의료보험 같은 주제에서 보수와 진보는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변증법적으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움직인다.

국가 주도 복지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날 선 비판을 한 철학자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보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존 듀이다. 듀이가 볼 때 국가 중심의 복지 체계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국가가 국민을 복지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필요를 파악해 그것을 다시 국가가 나눠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국가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은 듀이가 볼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듀이 스스로는 사회 진보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국가가 복지를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셈이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한국의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 같은 보수주의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과 사회 복지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반면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철학자 듀이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식의 복지를 ‘국가 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 부르며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당대에 손꼽히는 ‘남성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가 복지를 이유로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한쪽의 전유물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썼다. [현실문화 제공]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각을 적용해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물론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그 출발부터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적 의제로서 영역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당시 여당은 자유당이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었다. 제1야당은 보수당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당연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자유당은 언제나 말로는 여성 참정권을 옹호한다고 하지만, 언제 투표권을 줄 것이냐고 물어보면 늘 ‘나중에’라는 답만 했기 때문이다.

팽크허스트가 볼 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약속을 어기는 자유당을 심판하지 않고 ‘비판적지지’만 하고 있는 한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자유당으로서는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느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에너지만 쏙 빨아먹은 후 야당인 보수당 핑계를 대며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테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며 비난했다.”

마침 보궐선거로 의석 하나가 기로에 놓였고, 그 의석을 자유당이 보수당에 빼앗기면 여야가 바뀔 상황이었다. 그런 중요한 선거에서 팽크허스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보수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정치적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라고 여긴 셈이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 운동은 교양 있는 중산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자유당 지지자였기에 팽크허스트의 방향 전환은 내부에서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다.

팽크허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프라제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자유당은 선거에서 졌고 보수당이 집권했지만 세상은 자유당의 협박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정치적 파괴력이 입증됐기에, 오히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뷰파인더 칼럼(윤석열과 보수여, ‘이대남 다 걸기’ 초강수 아닌 惡手)에서 말했던 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다. 페미니즘을 ‘진보의 전유물’로 보는 발상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특정 진영과 정치적 입장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의 등에 칼을 꽂고 ‘보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적 의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과 자유시장주의
‘주당 52시간 노동제를 철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품질이 떨어지는 식품을 사서 먹을 수도 있게 해야 한다.’ 정치 초년생 윤석열을 곤란하게 했던 문제의 발언들이다. 언론에서 축소, 과장, 왜곡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각각의 발언을 관통하는 맥락을 더듬어볼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 사회, 정치철학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이 위와 같은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한 것은 그의 내면에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대선후보로서 윤석열이 적합한 인물인지 근심하던 기존 지지층에는 퍽 안심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도층의 눈에는 그렇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유시장’이라는 공식에 함몰돼 현재 우리가 겪는 시장의 실패와 부작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그러한 우려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무상급식 조례안에 반대하며 주민투표를 시행했다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자진사퇴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세련된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시 행정을 처리해나가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밥 주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며 주민투표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러자 상당수의 서울시민은 냉소를 넘어 분노했다. 심지어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지지층마저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평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 투표소에 갈 만큼 한가한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수주의=복지 반대’라는 단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교조적 태도를 보인 오세훈의 정치적 악수(惡手)는 ‘안철수 현상’과 맞물려 서울시장 박원순을 낳았고, 이후 서울시를 기반으로 민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요, 사회복지는 사회복지다. 진보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보수의 페미니즘도 있다. 진보의 철학, 보수의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선거는 어떤 결과가 나오건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을 위해 유익한 대안을 내놓는 정치 세력과 이념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1-15

이재명 ‘탈모 밈’ 윤석열 ‘멸콩 밈’은 흥겨운 헛발질

 [노정태의 뷰파인더] 그들은 아이젠하워가 아니거늘

● 李 ‘심는다’, 尹 ‘멸치와 콩’
●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 지지층만 즉각 반응한 ‘챌린지’
●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8일 서울 동작구 이마트 이수점에서 멸치와 콩을 사고 있다.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 제공]
선거는 일종의 흥행 사업과 유사하다. 유행어를 만들고 히트시키는 쪽이 재미를 보게 마련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고사하고 TV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전부터 그랬다. 미국의 전직 장군 아이젠하워는 ‘아이 러브 아이크(I Love Ike)’라는 입에 착 붙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밈’에 힘입어 그는 정치 경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이겨내고 1952년 대선에서 이겼다.

입에 착 붙는 구호가 선거를 좌우하는 모습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반복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는 거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돌파하더니 미국 대통령직을 꿰찼다. 바야흐로 ‘밈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을 뽑는다고요? 노(No), 이재명은 심는 겁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월 4일 공개한 유튜브 영상에서 한 말이다. 탈모인들의 수요를 노린 ‘소확행’ 공약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인터넷에서 탈모는 신체 현상이기에 앞서 하나의 밈이다. 즉 ‘이재명은 심는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것을 의도하고 내놓은 공약으로 봐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1월 8일 인스타그램에 이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과 함께 “장보기에 진심인편”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다. 문제는 그 밑에 달린 해시태그다. “#이마트 #달걀 #파 #멸치 #콩 #윤석열”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듯하지만, 네티즌 반응은 달랐다. ‘멸치’와 ‘콩’의 앞 글자를 따면 ‘멸콩’, 즉 ‘멸공’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윤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운영하는 ‘AI 윤석열’은 그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달걀, 파, 멸치, 콩을 샀다. ‘달파멸콩’, 가족과 함께 하는 좋은 주말 보내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내 ‘멸공 밈’에 정국이 휩쓸려 들어갔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터넷 밈의 흥행이 과연 정치적 성공에 도움이 될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된 15초 분량의 ‘탈모 공약 동영상’. [유튜브 캡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밈’의 개념부터 파악해보자. 독자 여러분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그 책,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제시된 신조어다.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생명체란 유전자의 자기복제와 증식을 위해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기계’라는 주장을 펼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볼 때 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것은 유전자(gene)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문화 속에도 유전자와 유사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누군가가 창발적으로 떠올린 후 다른 이들이 따라함으로써 살아남고 전파되는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그것이 바로 ‘밈(meme)’이다. 그리스어에서 모방을 뜻하는 어근인 미멤(mimeme)을 적당히 편집해 gene과 운율을 맞춰 만들어낸 신조어다. 즉, ‘밈’ 자체가 일종의 밈인 셈이다. 도킨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

어떤 밈은 그리 널리 퍼지지 못하고 금세 잊힌다. 설령 널리 퍼졌다 해도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가요 차트를 점령한 수많은 유행가가 그렇다. 어떤 노래는 사람, 때로는 국가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애국가라던가, 혹은 대한민국 건국 전부터 사람들에게 불렸던 아리랑 같은 노래를 떠올려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밈은 ‘생각의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한다. 허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숙주가 될 생명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퍼뜨린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와 그로 인한 문화가 없다면 밈은 존속할 수 없다. 어떤 밈은 다른 밈보다 전파력이 크고 때로는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는다. 신이나 종교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만들고 퍼뜨리는 밈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가 서로 경쟁하듯 밈 또한 경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두뇌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밈의 성공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그 밈을 전달하려는 것 이외에 사용된 모든 시간은 그 밈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날 공개되는 수많은 노래, 개봉하는 영화, 방영하는 드라마 등이 우리의 한정된 시간과 집중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멸공 챌린지’의 이면
오늘날 밈의 작동 방식은 한층 더 바이러스와 가까워졌다. 제도권 언론이 중심이던 시대에는 소수의 밈이 대량으로 복제됐다. 지금은 다량의 밈이 상대적으로 적게 복제된다. 대신 그 과정에서 복제자들, 즉 밈을 퍼다 나르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밈을 복사하고,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한 두 마디 코멘트를 붙이거나 때로는 밈 자체를 변형시킨다. 네티즌들이 각자 그 나름의 방식으로 멸치와 콩을 보여주며 ‘멸공 챌린지’에 참여했던 것 또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후보와 극적인 재결합을 이룬 후, 국민의힘은 ‘밈 정치’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이준석 스스로가 ‘멸공 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제동을 걸긴 했지만, 그 외의 메시지를 볼 때 그러한 방향성은 뚜렷해 보인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메시지를 내놓았던 것도 그렇고, 그 후 ‘병사 봉급 월 200만 원’이라는 단문을 제시한 것도 그러하다. 구체적인 내용과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아주 짧은 밈으로 승부하는 전략이다.

온라인에서 국민의힘 지지층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우호적이었다. 열렬하게 ‘멸공 챌린지’에 참여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딱 한 줄에는 40분 만에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여성가족부 강화’라는 한 줄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직접적인 경쟁 상대가 등장할 만큼 윤석열의 밈이 성공했다는 방증이다.

수세에 몰려 있던 윤석열의 선거 운동이 공세로 돌아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론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월 10일까지의 조사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지지율 역시 반등했거나 하락세를 멈춘 듯하다. 윤석열과 손잡은 이준석의 ‘밈 정치’, 과연 대성공일까.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려울 듯하다. 앞서 말했듯 밈은 바이러스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바이러스는 전파력이 강할수록 치명도가 약해진다. 독성이 강해 숙주를 빨리 죽이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라고 해도 여러 차례 변이를 거치며 전파되다보면 치명률은 줄어들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떠올려보자. 초기에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지만 오미크론은 그렇지 않다. 전파력은 매우 빠르지만 초기 변이에 비해 치명률과 사망률이 많이 약화됐다. 숙주를 타고 옮기는 자기 복제자의 숙명이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밈은 정신에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다. 원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질적 집단 내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 밈은, 그 외의 집단에 잘 전파되지 않는다. 때로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육체에 전파되는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다.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그 치명률 혹은 독성을 줄여야 한다.

이준석이 멸공 밈의 확산에 제동을 건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같은 지지자들 내에서 보면 흥겨운 놀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국민의힘 기존 지지층을 넘어서는 유권자들에게는 그 설득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멸공 챌린지 참여자들을 두고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며 부정적인 코멘트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거를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해야지 특정 계층만 갖고 선거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거래소에서 진행된 2022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이 러브 아이크’가 전부는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아이 러브 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승리에 도움이 됐지만 공화당이 밈 하나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아우라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20년간 이어진 민주당의 통치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우월한 구도와 인물의 힘이었다. 트럼프의 경우도 다른 방향에서 짚어봐야 한다. 트럼프가 다양한 밈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건 맞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로부터 230만여 표를 더 얻었다. 승자독식제에 기반한 선거인단제라는 미국 특유의 대통령 선거 제도가 없었다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탈모 밈’으로 반전을 꾀했던 이재명의 선거운동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각에서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지닌 재정 문제를 지적하자 밈의 정치가 급속히 약화됐다. 윤석열의 밈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멸공 논란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방황하던 중도 표심을 멀어지게 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끼리 열광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면 ‘굴러온 돌’들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이치다. 밈의 정치학이 가지는 한계다. 일종의 ‘인사이더 조크’로 작동하기에 ‘우리 편’과 ‘남의 편’의 경계선을 그어버린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남자 유저들이 많은 커뮤니티의 분위기만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인터넷 밈은 선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편’끼리 서로 기를 살리는 데 적격이다. 그러나 인터넷 밈에만 의존해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국민 전체에 소구력을 지니는 대안과 구호를 끌어내고, 유권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설득해 나가는, 그런 선거를 보고 싶다.

2021-07-04

K-방역이라고? 증오 선동하는 단체기합 통치술!

[노정태의 뷰파인더㊶] 사회적 거리두기에 나타난 文 권력사용법


● 단체기합은 왜 인간성을 말살하나
● ‘고문관’ 찾기, 동료 간 미움 조장
● 방역 핑계로 연좌제까지 쓴다?
● ‘컨트롤 타워’ 文이 비난 피하는 방식
● 정의롭지 못한 국가, 강도떼와 같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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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2차 코로나19 대응 특별방역 점검 회의’에서 발언을 한 뒤 마스크를 쓰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1983년생인 필자와 그 윗세대는 학창 시절 수많은 단체기합을 받고 자란 세대다. 필자 세대에서는 학교에서 학생에게 벌점을 주는 식으로 통솔한다는 개념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분단 전체가, 혹은 교실 전체가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요즘 젊은 세대나 청소년들은 ‘가짜사나이’ 같은 예능에서나 봤을 단체기합이 불과 10여 년 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학창시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이었다.

40대, 더 나아가 30대 후반까지 포괄하는 세대는 유독 문재인 정권에 우호적이다. 반대로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세력에는 적대적이다. 그 이유를 한 두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놓고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단체기합을 받으며 자란 세대는 보수 정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제 잔재와 보수정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과학’이라 분류되는 책을 적잖이 읽고 자랐다. 그 내용은 책과 저자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깔고 있는 전제가 있었다. 그 전제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사회적 병폐는 근대의 산물이다. 경제 개발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 ‘조국 근대화’를 추구했던 박정희는 그러므로 그 모든 병폐를 가져온 ‘슈퍼 전파자’다. 게다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관동군 장교로 복무한 바 있다. 박정희 그 자체가 일제 잔재이며 그러니 소탕해야 마땅하다.”

나와 내 윗세대가 치를 떠는 단체기합의 정체가 무엇인가. 군대에서 받는 기합, 얼차려 따위가 아니던가. 이를테면 이런 인식이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이 군대로부터 나왔고, 한국군은 만주 관동군 출신들이 꽉 잡은 조직이며, 따라서 단체기합은 일제 잔재이며 소탕해야 마땅하다. 군인 출신 대통령을 자신들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보수 정치권은 단체기합을 주는 나쁜 놈들이다. 나는 저 나쁜 놈들이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을 찍을 뿐이지, 민주당을 ‘묻지마 지지’하는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층)과는 다르다.”

이것은 필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이 많은 세대에 흔히 퍼져 있는 정치적 사고의 패턴을 요약한 것이다. 모든 40대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야 물론 없다. 하지만 어떤, 혹은 많은 40대는 현재의 보수 정치권을 단체기합 주는 꼴통 학교 선생이나 자신이 군대에서 만났던 말 안 통하는 윗사람과 등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 혹은 청와대에서 그 어떤 추문과 ‘내로남불’이 터져 나온다 해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런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학창시절 및 군 시절 경험을 사회 일반에 지나치게 확장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인, 따라서 유치한 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도 분명 귀담아 들을 대목이 있다. 2021년 현재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현대 사회의 규칙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압적 폭력 행사하는 자
단체기합은 왜 나쁜가. 첫째, 잘못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안에 대해서만, 딱 잘못한 만큼만 벌을 받아야 한다. 이는 비단 단체기합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근대 형사법 체계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연좌제 금지가 바로 이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혹은 다른 가족이 어떤 죄를 저질렀건 그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한 가족이나 친지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단체기합은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좋게 볼 수가 없는 훈육 방식이다.

둘째, 처벌이 예측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집단 얼차려를 받을 때는 언제나 ‘마지막 구호 붙이지 않기’ 따위 규칙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누군가 실수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전체 인원이 받는 기합의 양이 달라진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 볼 때 전혀 납득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국의 귀족들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만들 때 국왕에게 죄형법정주의를 요구했다. 어떤 행위가 어떻게 범죄가 되는지, 그리고 그 각각의 범죄에 따라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미리 정해져 있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법은 법으로서 정당성을 지닌다. 반면 단체기합은 ‘여러분이 하는 행동에 따라서 본 교관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소리 지르는 교관과, 그 교관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엉터리 규칙,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못해 ‘삑사리’를 내는 누군가의 실수에 따라 처벌의 내용과 수준이 달라진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셋째, 같이 기합을 받는 구성원이 서로를 증오하게 만든다. 단체기합을 받다보면 누군가는 고문관이 된다. ‘마지막 동작에 구호 붙이지 않기’ 따위 이상한 규칙을 틀리는 일이 곧잘 발생한다. 그렇게 누군가 실수를 하고 다른 사람이 모두 ‘연대책임’을 지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비합리적인 단체기합을 강요하는 것은 교관 내지 선생인데, 시달리고 있는 훈련병 혹은 학생들은 교관이나 선생이 아니라 실수한 동료를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가 다 고생하고 있잖아’ 이런 분위기에서 졸지에 ‘고문관’이 된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즉 단체기합은 강압적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책임을 감추고, 대신 가장 어리석고 둔한 누군가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리게 만드는, 인간성 말살 기계인 것이다.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국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지 1년 반 정도 지났다. 온 국민은 단체기합을 받는 중이다. 특히 자영업자들이 그렇다. 적나라하게 말해보자.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K방역’이라 떠벌이는 것의 본질은 단체기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은 방역을 핑계로 엉뚱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예측 불가능한 정책 설계와 집행으로 국민을 불안과 스트레스에 빠뜨리면서, 결국 국민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 7월 1일부터 전국에는 2주간에 걸친 특별방역 점검기간이 시행중이다. 지난 6월 29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수도권 감염 사례를 분석하면 방역 긴장도가 떨어져 방역수칙이 잘 지켜지지 않거나 유증상 상태에서 바로 검사받지 않는 경우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전파 가능성이 높은 업종을 대상으로 특별히 더 경계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행정적 지시 사항이 전달되는 가운데, 권 장관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방역수칙을 위반할 경우, 무관용 원칙에 따라 과태료 등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방역수칙 위반이 반복되는 경우에는 해당 지역의 동일 업종 전체에 대한 운영제한 등이 적용될 수 있다.”

처음 이 내용을 뉴스를 통해 읽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업소가 방역수칙을 반복적으로 위반한다 해서, 해당 지역 동일 업종 전체에 대해 운영제한 등을 적용할 수 있다고? 이걸 세 글자로 하면 ‘연좌제’요, 네 글자로 하면 ‘단체기합’이다. 문 대통령이 임명한 권 장관은 빨간 모자 대신 노란색 방역 점퍼를 입은 채, 자영업자들을 향해 ‘자꾸 구호 틀리고 그러면 전원 연병장 다섯 바퀴 돈다’고 말하고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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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이 ‘내일부터 6명 모임 가능’이라고 쓴 안내문에 ×표를 치고 있다. 당초 7월 1일 수도권의 모임 제한 인원이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1주일 연기됐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권 장관의 발표가 나온 것은 6월 28일. 이틀 후인 6월 30일에는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7월 1일부터는 5인 이상 집합 금지, 밤 10시 이후 음식점과 카페 영업 금지 등의 제한 조치가 완화될 예정이었다. 긴 코로나19 시기를 힘겹게 보내고 있던 자영업자들은 달력이 넘어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리 재료도 주문하고 일손이 부족한 곳은 단기 아르바이트도 고용했다. 평범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동안 인원수 제한에 부딪쳐 만날 수 없었던 이들과 약속을 잡고 식당에 예약을 하며 들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은 그 기대를 단번에 뒤집었다. 7월 2일 0시 기준 확진자가 826명까지 치솟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불가항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잘 따져보면 그렇게 옹호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6월 중순부터 확진자 수가 늘고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7월이 오면 모여서 먹고 마실 수 있다’는 희망찬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지, 자영업자들이 손님맞이 준비를 하도록 수수방관했다. 그리고 7월 1일이 되기 불과 여덟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6월과 같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최소 일주일 연장한다고.

이번엔 누가 ‘고문관’으로 찍힐까
자영업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운동장 세 바퀴 돌아’라는 말을 듣고 죽어라 뛰었는데, 뒷짐 지고 배 나온 교련 선생이 이런 소리를 하는 꼴이다. ‘너희들 태도가 불량해. 아직 반성하는 기색이 안 보여. 두 바퀴 더 뛰어!’

자영업자에게 이건 장사 준비를 했다가 엎어야 하는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자영업자로서 생사가 오가는 문제다. 마치 단체기합이 그렇듯, 문재인 정권의 ‘K방역’에는 일말의 합리적 예측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 정서적 피해는 국민들 스스로가 뒤집어쓰고 있다. 국민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책임을 묻게 만들어서, ‘컨트롤 타워’인 문 대통령이 비난을 피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갓 퍼지며 맹위를 떨칠 무렵, 대구를 중심으로 특정 교회 신도 감염자가 폭증하던 무렵을 잠시 떠올려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콕 찍어 욕할 수 있는 대상이 자신들의 지지층이 아닐 때, 문재인 정권은 너무도 쉽게 국민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번 확진자 증가 추세가 쉽게 꺾이지 않으면 이제는 또 누가 ‘고문관’으로 찍힐까. ‘저 고문관 때문에 너희가 다 고생하는 거 알지? 자, 다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실시!’

예측 가능하지 않은 권력, 정책의 스트레스를 특정 계층에게만 전가하는 권력, 국민이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권력은, 그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정의롭지 않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는 강도떼와 다를 바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한 말이다. 문득 저 명언을 곱씹게 된다. 어서 이 지긋지긋한 단체기합이 끝나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코로나19 #K방역 #사회적거리두기 #자영업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기자 프로필

신동아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20

비극에 탐닉하는 사회, 활개 치는 ‘방구석 코난’

[노정태의 뷰파인더㊴] 광주 건물 붕괴에서 故손 모씨 사건까지

● 쓰러진 에릭센과 BBC의 영상
●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대중
CCTV를 통해 ‘진실’ 엿보다?
● 경각심 없는 블랙박스 방송
● 수술실 CCTV 설치? 환자 인권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5월 28일 고(故) 손 모 씨 사건과 관련해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수색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CCTV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인다. [뉴스1]

 

6월 13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3차전. 레바논을 상대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다. 상대의 파울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처리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손흥민은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며 손가락으로 ‘23’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며 카메라에 키스를 했다. 시청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위한 세레모니였다.

에릭센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과 함께 뛴 적 있는 덴마크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그는 6월 13일(한국시간) 열린 2020 유럽축구챔피언십(유로 2020) D조 1차전 덴마크 대 핀란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전반 42분 무렵 다른 선수와의 충돌 없이 갑자기 쓰러졌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의료진이 달려와 응급처치를 하는 가운데 동료 선수들이 에릭센을 둘러싸고 벽을 쳤다. 환자의 모습을 방송 카메라나 관중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중계 카메라 역시 처음에는 (카메라맨의 ‘본능’에 따라) 쓰러진 에릭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으나, 곧 경기장의 원경과 관중석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BBC 스포츠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방송사들은 지탄을 받았다. 에릭센이 쓰러진 직후 모습이 다소 노출됐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방송을 통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BBC 스포츠 해설위원 게리 리네커는 “중계 화면은 대회 주최 측인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송출한 장면이고 BBC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볼 권리’와 상식선
프로 스포츠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손흥민이나 에릭센 같은 축구선수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탁월한 축구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즐기는 수많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센의 모습을 촬영해 ‘알 권리’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한 시청자는 없다. 외려 시청자는 에릭센이 쓰러진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이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는 점을 이유로 유럽축구연맹과 각국 방송사를 비난했다. 즉 시청자에게는 ‘볼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걸맞은 상식과 감수성을 근거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반대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식’이 막상 우리 현실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난 4월 25일 발생한 고(故) 손 모 씨의 사망 사건을 떠올려보자. 논의해야 할 점이 많지만, 특히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경찰의 발표를 믿지 못한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CCTV가 왜 없느냐”, 혹은 “CCTV 영상을 무편집본으로 공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인이 익사한 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CCTV 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당연한 사실이 있다. 설령 그런 영상이 존재한다 한들 경찰이 그것을 아무에게나 보라고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손 씨가 익사한 현장의 CCTV 영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영상은 누군가가 사고로 죽은 모습, 혹은 (일각에서 꾸준히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사람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라는 소리다. “경찰은 진실을 공개하라”는 이들은, 그러므로 “경찰은 사람이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멈춰서 이 상황을 제3자의 눈으로 보자. 누군가가 죽기 직전, 혹은 죽는 그 장면을, 대중이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는 CCTV를 통해 ‘진실’을 엿보는 행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졌다. 그러한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다양한 사건 사고 현장을 담은 CCTV나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
몇 년 전, 특히 남자들이 많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여성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 등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이는 모습을 담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그런 영상에는 흔히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와, 종종 로드킬(야생동물 찻길사고)을 야기하는 ‘고라니’를 합친 비하 용어가 첨부됐다.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찍은 영상 속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돌려보면서 그 위에 여성혐오까지 끼얹고 있던 셈이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것은 여성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교통사고 현장을 담은 모습이 여러 방식으로 촬영되고, 때로는 편집돼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갔다. ‘폭력에의 탐닉’은 많은 경우 여성혐오와 공생 관계를 이뤘다. 여자가 차에 치이면 ‘X라니’, 여자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면 ‘김여사’라고 손가락질하는 식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유출되고 유통되는 데 대해 진작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정 반대로 흘러갔다. 공적 논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공중파 방송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모아놓고 방송하는 별개의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지금도 매주 방송되고 있는 SBS의 ‘맨 인 블랙박스’ 얘기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으로 공중파 방송을 만들어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심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방심위가 ‘맨 인 블랙박스’를 제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식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아날 방송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 벌어진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참사에 대한 언론 보도만 해도 그렇다.

사고 당일,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사고 당시의 모습이 수도 없이 뉴스로 보도됐다. 건물이 풀썩 쓰러지는 광경, 자동차가 깔리는 모습, 간신히 사고를 피한 차량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 아무런 제지 없이 노출됐다.

이미 남들이 그런 영상을 찾아서 시청률과 조회 수를 끌어올리고 있다면, 다른 언론사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 역시 특정 언론이 사건 현장의 CCTV나 블랙박스를 공개하는 것을 막지 않는데, 다른 언론에 대해서만 제지를 가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국의 미디어는 여과 없이 쏟아지는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보도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사회적 책무다. 하지만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을 쉴 새 없이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공개하는 것은 언론의 바람직한 사회적 기능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사안을 해석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건물 붕괴 사고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경찰, 소방서가 합동으로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광주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영상을 온 국민이 되풀이해서 보는 게 과연 이 시점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안전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되새기게 해주는가? 왜 그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사고 현장의 부상자를 구조하는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보도 행태가 성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영상을 가져다 써야 조회 수가 늘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온갖 ‘유출 영상’에 우리가 중독돼 있는 탓이기도 하다. 언론이 나쁜 대중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고, 언론 소비자가 언론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최근 현안으로 넘어와 보자.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8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반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법안이 계류 중인 상태다.

수술실 내 CCTV 설치에 대한 찬반론을 깊게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몰래 찍는’ 데 익숙해졌는가. 왜 우리는 교통사고 현장, 기타 사고 장면, 범죄 현장 등 통상적으로 보기 어렵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볼 권리’를 요구하는가.

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면 환자 인권 보호에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나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충격 수술실 CCTV 영상’ 따위가 수없이 돌아다니며 더 많은 환자의 인권이 유린될 위험을 생각해봐야 한다.

수술실로 간 ‘방구석 코난’
찍어놓은 영상은 언제 어떤 식으로건 유출될 수 있다. CCTV 영상을 돌려보고 품평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의 인권을 짓밟을 여지가 생긴다.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CCTV를 설치할 경우, 의료진은 CCTV에 익숙해지고 그 중 위험성이 높은 ‘예비 범죄자’는 CCTV를 피해 어떻게든 범죄를 저지를 방법을 모색할 테다. 마취된 채 알몸으로 수술을 대기하는 환자는 CCTV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CCTV와 차량용 블랙박스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방구석 코난’ 혹은 ‘네티즌 수사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수술실 내 CCTV 의무화 법안은 ‘방구석 코난’을 수술실에 들여놓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제다. 우리에게 인권이란 대체 무엇인가?

#광주참사 #손모씨사건 #수술실CCTV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13

‘검수완박’ 文정권이 軍에는 사법독립 촉구? 표리부동!

 [노정태의 뷰파인더㊳] 헌병 동원하고 맹견 풀어 ‘예비군 윤석열’ 사냥

● 삼권분립 작동 않는 평시 軍법정
● 장군의 지위는 말 그대로 ‘왕’
● ‘中과 대립’ 대만도 평시 軍법정 폐지
● “독립적 재판” 文 일성, 진심일까
● 검찰을 軍검찰처럼 만드는 박범계案
● 공수처의 ‘자연인 윤석열’ 수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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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과 김오수 검찰총장이 6월 3일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청에서 만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18일 발생한 공군 A 중사의 사망 때문이다.

A 중사는 같은 부대 내의 상급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할 당시 녹음을 해두었고, 자신의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며,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했다. 심지어 성폭력이 발생한 차량은 가해자의 후임인 제3자가 몰고 있었다. 증인까지 있는 사건이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은 사건 해결에 있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고 자신과 다른 곳에 배치해달라는 A 중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급자인 B 준위는 최대한 ‘좋게좋게’ 넘어가고자 했다. 피해자를 불러 저녁식사를 하며 달래려 들었다. 가해자인 장모 중사가 조사와 동시에 제5공중기동비행단으로 이동조치 된 날짜는 3월 17일. 사건 발생 후 보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상담 프로그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A 중사는 4월 15일, 제20전투비행단 성고충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가 4월 30일 내린 결론은 전혀 달랐다. “자살 징후 없었으며 상태가 호전됐다.”

군내에서 법적인 조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은 국선변호사 제도를 운영 중이다. 공군 법무실 소속 군법무관이 국선변호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직무유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행태를 보였다. 국선변호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했다는 뜻이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겪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군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 초기 국선변호사를 믿고 별도의 법적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본인의 지휘계통을 따라 사건을 보고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군은 A 중사를 버렸다. 사건을 드러내고 수사하기는커녕, 다른 부대로 전출해달라는 A 중사의 요청마저도 마지못해 들어줬다. 새로운 부대 역시 A 중사를 배척했다. A 중사는 연인과 혼인신고를 한 그날 스스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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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모 중사가 6월 2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장 중사는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돼 미결수용실에 구속 수감됐다. [국방부 제공]
이런 비극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한두 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 특유의 폐쇄적 집단주의 같은 문화적 요인이 적잖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평시 군사법정이 바로 그것이다.

A 중사 사건은 부대 내의 인맥과 관계를 고려하는 군사법정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8월에 전역할 예정이었다. 이에 군 검찰이 가해자의 전역만 기다리면서 시간 끌기로 일관했다는 의혹에 휩싸여있다. 가해자를 구속 수사하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취하면 부대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부대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회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의 사건 은폐의 핵심 원인 아니었을까.

평시에도 군사법정은 군인 사이의 사건을 관할한다. 현행 체제에서 장군의 지위는 ‘왕’과 같다. 삼권분립은 작동하지 않는다. 군 검찰이 소속되는 보통군검찰부, 군 판사가 소속되는 보통군사법원 모두 편제상 군단급 부대의 휘하 조직이다. 군 검사는 수사 감독 및 기소 등의 재판 과정에서, 군 판사는 판결 과정에서 모두 지휘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군 지휘관은 법조인 자격이 없는 일반 장교를 재판관으로 참여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 심판관 제도 때문이다. 이 또한 군 내부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지금껏 용인돼왔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군 지휘자의 뜻을 거스르는 수사와 기소 등이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렵다. 설령 재판까지 간다 해도 군 지휘자가 ‘꽂아 넣은’ 다른 군인이 판사 노릇을 할 개연성도 있다.

그나마 이게 ‘개선된’ 형태다. 2017년부터 시행중인 현행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사단급 이하 부대에서는 보통군사법원을 가질 수 없다. 그 전까지는 사단장, 즉 ‘투 스타’(2성급 장군)들도, 자신의 부대에서 조선시대의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지녔다. 여차하면 아무나 감옥에 넣고, 또 감옥에서 꺼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과 전쟁 상태다. 휴전 상태일 뿐 종전 협정을 하지 않았다. 일각의 터무니없는 낙관적 태도와 달리 북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보다 훨씬 강한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대만조차도 2018년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했다.

민주공화국은 법치국가다. 군대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삼권분립이 작동하지 않는 곳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지난 6월 6일 A 중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후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A 중사의 부모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후에는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최근 군과 관련해 국민이 분노한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며 “군 사법 독립성과 군 장병이 독립적으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군사법원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요구했다.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문 대통령의 입장에 동의한다. 사법의 독립성은 신성한 것이다. 군 장병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재판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인권의 최후 보루와도 같다.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문 대통령의 진심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사법부,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사하는 경찰 등은 군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가 사법 영역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한 뒤 같은 기준을 군에 요구해야 설득력을 지닌다.

문 대통령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행보를 고집하고 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한 김오수 검찰총장과 박범계 법무장관이 빚고 있는 마찰만 해도 그렇다. 법무부는 ‘검찰직제개편안’을 통해 검찰의 독립적 수사권을 사실상 완전히 박탈하려 하고 있는 반면, 현 정권에서 임명한 (아마도) 마지막 검찰총장인 김오수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직제개편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인해 검찰은 부패, 공직, 경제, 선거, 방위사업, 대형 참사의 6대 범죄를 제외한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인지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다. 그런데 박범계의 ‘직제개편안’은 그마저도 수사하려면 법무부의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국가건 행정부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정치적 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법치주의는 남아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지역별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는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및 검사들의 사건 기소와 공소에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법무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 지휘 감독한다’는 검찰청법 제8조가 바로 그 안전판이다. 저런 장치가 없다면 대한민국 검찰청은 일개 사단장이 쥐락펴락하던 군 검찰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박범계가 요구하는 직제개편안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지위를 포기하고, 법무장관의 충견이 되라는 소리다. 각 지청은 ‘총장의 요청에 따라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륙법과 영미법을 떠나 법치국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퇴행이다.

반복해보자. 현재 박범계 법무장관이 요구하는 검찰직제개편안은 검찰을 송두리째 군 검찰과 같은 권력의 개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검찰총장을 통해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검사가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군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하던 2017년 이전의 군사법정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군 검사와 군 판사를 군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군사 문제와 무관한 군인의 일반 범죄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왜 문재인 정권은 동시에 검사와 판사를 청와대의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가?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을 수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6월 10일 보도되면석 국민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공수처는 6월 4일 윤 전 총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3부(최석규 부장검사)에 배당했다고 한다. 일단 윤 전 총장은 ‘공직자’가 아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공수처가 수사에 착수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설령 그가 공직에 있을 당시 벌어졌던 사안이라 해도 ‘공직자’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구가 자연인 윤석열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상식의 선에서 납득 불가능하다.

공수처라는 조직의 태생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법치주의가 도입된 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법치주의를 능멸하는 제도가 생긴 적은 없었다. 현재 공수처는 여당이 독단적으로 법을 바꿔 대통령이 야당의 뜻과 무관하게 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공직자를 대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는다. 공수처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군 사법제도와 비교하자면 ‘사단장 직속 헌병+검찰’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군대 비유로 끝내보도록 하자. 군인 및 군 경험자들은 고위 장성들을 흔히 ‘똥별’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문 대통령은 그들의 수사권, 기소권, 사법권을 빼앗는 개혁을 하고 있다. 개혁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아마 ‘똥별’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군인이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온전히 대우받을 때 우리의 국방력도 질적으로 나아진다.

공직에서 물러난 윤석열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모자 거꾸로 쓰고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 신세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헌병을 동원하고 맹견을 풀어 한낱 예비군을 잡으려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사법원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런 표리부동한 이중성이야말로 이번 정권의 본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현재 모습은 그가 개혁하겠다는 ‘똥별’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여군사망 #군사법정 #공수처 #윤석열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5-02

우리는 윤여정의 수상에 박수칠 자격이 없다

 [노정태의 뷰파인더㉜] 인습적 여성혐오의 ‘생존자’

● 오스카 거머쥔 완벽한 연기자
● 가시밭길의 이름, 가부장제
● ‘악녀 장희빈’, 광고에서 잘리다
● ‘길티 플레져’와 국뽕 스민 호들갑
● 수많은 ‘윤여정들’에게 보내는 박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배우 윤여정이 4월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레드카펫에 올라 웃음 짓고 있다. [AP 뉴시스]
온 나라가 윤여정 열풍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오스카상 수상이라는 경사가 벌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지인처럼 매끄러운 발음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또박또박 전달하는 ‘윤여정식 영어’도 화제다. 덕분에 적잖은 사람이 ‘영어 울렁증’에서 벗어나 힐링을 맛보고 있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맞붙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한국의 ‘할머니’ 역할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 이런 쾌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반응들은 어딘가 불편하다. 배우 윤여정의 수상을 축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금 쏟아지는 요란한 찬사가 애써 가리고 덮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배우로서 오래도록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그가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배우이자 여성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했다. 가시밭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가부장제와 보수적 성역할, 그리고 여성혐오였다. 윤여정은 설령 오스카를 받지 못했더라도, ‘유별난 여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공격성을 온전히 받아내고 극복했다는 것만으로 박수 받아 마땅한 승리자다.

‘악녀 장희빈’과 이유 없는 적개심
윤여정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66년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김기영 감독의 1971년 작 ‘화녀’의 주연을 맡아 농염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펼치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46년생 윤여정은 고작 스물다섯 나이에 한국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윤여정은 배역에 대한 이해, 표현력, 순발력 등 모든 분야에서 빠질 데 없는 완벽한 연기자이지만, 그간 맡아온 주요 역할은 무난한 ‘호감형’이 아니었다. 대체로 ‘연기파’에게 어울리는 무언가로 간주되는 역할, 많은 경우 악역이었다.

‘화녀’에서 윤여정은 작곡가 동식의 집에 하녀, 즉 식모로 들어가 겁탈을 당하고 동식의 아내에 의해 강제로 유산을 당한 후 복수극을 펼친다. TV에서의 히트작 ‘장희빈’ 또한 마찬가지다. 장희빈이 어떤 캐릭터인지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악녀 장희빈’의 전범을 만든 사람이 바로 윤여정이다.

청춘스타로 잘 나가던 윤여정은 갑자기 미움의 대상이 됐다. 당시 윤여정은 청량음료 오란씨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포스터가 있었는데, 눈에 구멍이 뚫리는 식의 ‘테러’가 자행됐다. 급기야 윤여정은 광고 모델에서 잘렸다. 본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사람들이 방송국으로 쳐들어왔고 문방구 주인은 물건 같은 것을 던지기도 했단다.

이 이야기를 과연 ‘뭘 몰랐던, 순박했던 시절’의 추억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윤여정은 그런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정말 괜찮은 일이었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후로도 윤여정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를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표출하는 대중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음악다방 ‘쎄씨봉’의 멤버들과 어울려 멋진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인 가수 조영남과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했다. 조영남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윤여정도 그 길에 함께 했다.

13년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다. 귀국한 그는 두 아들을 양육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반발했다. ‘어떻게 이혼한 여자가 TV에 출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여정은 그 반발을 온전히 실력으로 돌파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윤여정의 귀국 후 첫 출연작은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였다. ‘어미’는 김수현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 때문에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시놉시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비극으로 끝나는 한국판 테이큰’이다. 라디오 진행자이며 저명한 작가인 홍 여사(윤여정 분)는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이다. 고등학생인 딸은 엄마가 홀아비인 최 교수(신성일 분)를 만나 밀회를 즐기는 동안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당한다. 딸은 강간당한 후 성매매 업소로 팔려가고, 그런 딸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하지만 딸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자살하고, 어머니는 세상을 향한 복수극을 벌인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미’는 그리 좋은 작품이 아니다. 설정과 각본, 연기 모두 훌륭하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연출이 몰입을 깨뜨린다. 김수현 본인부터가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본 후 매우 격분했다. 이후 김수현은 박철수와 절대 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말을 지켰다.

김수현이 택한 최적의 배우
19951118일 첫 방영된 KBS2 ‘목욕탕집 남자들’은 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썼다. 극중에서 윤여정(왼쪽)과 고두심이 대화하고 있다. [KBS 제공]
대신 김수현의 파트너로 등극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여정이었다. 연기 잘 하고 탁월한 대사 전달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좋건 나쁘건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얻고 있는 스타. 하지만 그에게 끼얹어진 오명 아닌 오명 때문에 다른 작가나 연출자들이 선뜻 데려가지 못하는 문제적 인물. 하지만 김수현은 KBS2 ‘목욕탕집 남자들’, MBC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등 주요 히트작에서 윤여정에게 좋은 배역을 연이어 맡겼다.

중요한 건 각각의 작품에서 윤여정이 수행한 역할이다.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철모르는 로맨티스트 둘째 며느리(목욕탕집 남자들), 여주인공을 발탁해 배우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당찬 여성 디자이너(사랑과 야망),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가부장적인 집에 시집가는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정엄마(사랑이 뭐길래).

여기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한국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좋아하는,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의 역할’로부터 어딘가 벗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에 대한 입체적 시각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배우가 바로 윤여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수현은 대중이 보는 드라마를 쓴다는 자의식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결론에 다다르면 사회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신 화해와 통합, 혹은 봉합을 선택했다. 특히 큰 성공을 거둔 홈드라마에서 그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한국 사회의 평균보다는 한 발자국, 최소한 반 발자국 정도는 앞서 나가는 인식을 보여줬다. 그런 까다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게 윤여정의 주요 임무였다.

2007SBS에서 방영된 ‘내 남자의 여자’에 대해 당시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와 유지나 동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가 나눈 대담을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김수현은 과거에 보여줬던 도발성에서 나아가, 이번 드라마에서는 결혼제도, 즉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친구의 남편과 바람이 난) 김희애가 ‘셋이 같이 살자’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거죠.”

“영화로 비교하면 김수현 정도의 여성의식이면 상당한 것입니다. 박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어미’만 봐도 그렇죠. 페미니즘 텍스트 같아요.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페미니즘 의식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근슬쩍 봉합하는 마무리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어미’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어미’는 김수현의 스크린 복귀작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윤여정은 김수현과 짝을 이뤄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평면적인 역할을 극복해나갔다.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로도 그랬고,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도 그랬다.
물론 그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장희빈’ 시절처럼 여기저기서 봉변당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윤여정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너무도 재미있는 김수현 드라마에서, 주어진 역할을 너무 잘 해내기에, 안 볼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렇게 윤여정은 왕년의 청춘스타에서 벗어나 중견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보해갔다.

사회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
4월 29일 서울 노원구의 한 영화관 전광판에 영화 미나리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는 분위기다. [뉴스1]
2021년 4월, 윤여정은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자 한 언론에서 그의 전 남편인 조영남을 인터뷰했다. 조영남은 ‘대단한 일이다, 바람 피워서 이혼당한 남편에 대한 최고의 복수’라는 식의 코멘트를 했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다시 한 번 여론의 된서리를 맞고 있다.

물론 조영남의 저 발언은 주책없는 소리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전후 맥락 자체가 너무도 이상하다. 윤여정을 ‘조영남의 전 부인’으로 바라보고, 이혼했다는 사실을 죄악시하고,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야깃거리로 삼던 것은 조영남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식이었다. ‘쎄씨봉’ 회원들의 음악이 다시 유행하고, 급기야 2018년 영화 ‘쎄씨봉’이 개봉할 당시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의 추억담이 입에 오르며 윤여정은 계속 원치 않는 맥락으로 소환됐다. 대중 역시 그런 ‘추억 팔이’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윤여정을 두고 한 배우와 연기를 이야기하는 대신 그의 실패한 결혼을 논하며 시시덕거리던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어떤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결국 즐기게 되는 심리) 아니었던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스카상 수상에 대한 조영남의 발언이 마뜩찮은 것과는 별개다. 조영남 한 사람만을 극렬히 비난하면서 마치 자신은 결백한 양 서둘러 알리바이를 만드는 듯한 모습에 외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나뿐인가.

지금 나는 윤여정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두고 여성혐오의 ‘희생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본인도 그렇게 인식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성혐오의 ‘생존자’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콧대 높은 여자, 똑똑한 여자, 한 마디도지지 않는 여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여자. 그런 여자가 인생 안 풀리고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윤여정은 늘 그랬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여성상을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반대 되는 길을 택해왔다. 그의 인생은 그로 인해 순탄하게 흘러오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1년 3월 11일,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 그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순종에서 벗어난
“저는 결코 미인이 아니죠, 김기영 선생님도 저를 퍼니페이스(funnyface)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역은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할입니다.”

윤여정에게 진정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국뽕’ 중심의 과도한 호들갑을 멈추는 게 어떨까. 대신 대중의 편견과 증오를 딛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들을 좀 더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어야겠다. ‘47년생 윤여정’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윤여정들’을 향해 힘찬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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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5

보스 정치보다 못한 팬덤 정치

 [노정태의 뷰파인더㉛]대깨문의 적반하장과 민주당 잔혹史

●‘초선 의원의 亂’과 문자 폭탄
●한층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의 길
●黨心 추종이 민주주의에 反한다?
●당원도 결과에 따른 책임지는 것
●한국 정당은 ‘구경하는 정치’ 조장
●극성 친문이 쏘아올린 퇴행 신호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9대 대통령선거가 한창이던 2017년 4월 21일. 인천 부평구 부평역 광장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집중유세가 열렸다. [동아DB]
극성 열혈 지지층. 현재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다. 야당보다는 여당에서 더 큰 고민거리가 돼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7 재·보궐선거(재보선)에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자리를 동시에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성 친문 지지층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4월 9일 민주당의 초선 의원 다섯 명은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내고 ‘조국 사태’ 때 조국 전 법무장관을 감싼 것을 반성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사흘 뒤 ‘민주당 권리당원 일동’ 명의의 권리당원 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서는 초선 의원들의 입장 발표를 ‘초선 의원의 난(亂)’이라 표현하며, “초선의원들은 4·7 보궐선거 패배 이유를 청와대와 조국 전 장관의 탓으로 돌리는 왜곡과 오류로 점철된 쓰레기 성명서를 내며 배은망덕한 행태를 보였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내놨다.

극성 친문은 단지 성명서를 발표한 데 멈추지 않았다. 김정란 상지대 명예교수 등 유명 극성 친문 지지자들이 앞장서서 초선 의원 다섯 명의 연락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번호로 온갖 폭언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그것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인증하는 모습을 지난 4월 9일 이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극성 親文의 영향력
4월 20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광주, 전남, 제주 당대표, 최고위원 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홍영표, 송영길, 우원식 당대표 후보들(왼쪽부터)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동아DB]
민주당에서 극성 친문이 미치는 영향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듯하다.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총사퇴한 가운데 새로운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규정대로라면 지도부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고위원은 당규에 따라 중앙위원회에서 뽑아야 한다. 하지만 차기 당권 주자인 홍영표, 우원식 의원 뿐 아니라 문자폭탄에 시달린 다섯 명의 초선 의원들까지 권리당원 전체투표를 통한 최고위원 선출을 요구했다. 이에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당대표와 최고위원 모두를 전당대회에서 뽑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에서 당비를 내는 당원을 권리당원이라고 한다. 모든 민주당 권리당원이 극성 친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성 친문이라면 99% 이상의 확률로 권리당원일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극성 친문은 막강한 조직표로 작동하고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 규정상 일반 권리당원은 40%, 국민 일반의 투표가 10%, 일반당원이 5%의 투표권을 갖는다. 권리당원의 지지를 받으면 무난히 이길 수 있다. 지난 4월 16일 선출된 윤호중 원내대표 역시 친문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이 한층 더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 향할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단 오해의 여지가 없는 내용부터 이야기해보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SNS에서 특정인의 연락처를 공유하며 욕설과 폭언 등을 퍼붓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SNS를 통해 악플 폭격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상식적인 시민 사회의 양식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 위법성이 있을 때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 특히 정당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극성 친문 지지자들의 행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소수가 다수의 의사를 왜곡하는 현상’이라고 비판한다. ‘민심’과 ‘당심’이 괴리되었을 때, 마땅히 ‘민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론처럼 들린다. 소수의 열성적 지지층이 활동하여 일부 의원들을 움직이고, 그 일부 의원들이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면서 당이 바뀌고, 정당이 국가 전체의 국정을 좌우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원의 투표로 정당의 행보가 결정되는 것 자체를 ‘민주주의에 반(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다. 당원의 뜻에 따라 정당이 움직이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중 상당수가 실은 국민보다는 집권 여당의 당원들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부자 노인의 정당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맨 오른쪽)과 이소영, 오영환, 장경태, 장철민 의원(오른쪽에서 세번째 부터)이 4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가장 최근의 사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을까? 그는 2019년 테레사 메이 총리가 사임한 후 보수당 당원들의 투표로 당대표가 됐다. 집권당의 당대표는 곧 총리다. 따라서 그는 총리로 취임했다. 물론 그 전에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운동을 펼치며 온 국민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 정치적 의제를 알린 상태였지만, 영국인들이 그를 총리로 직접 뽑지는 않았다.

보리스 존슨은 보수당 내 경선을 통해 영국 총리가 됐다. 그 투표권은 오직 보수당원만이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당원은 노년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소득 수준을 놓고 봐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마디로 부자 노인들의 정당이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총리가 오직 부자 노인들만의 투표로 결정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일까?

브렉시트의 경제적 여파를 정확히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제 상식에 비추어보면, 브렉시트는 무역 및 국가 간 노동력의 이동을 저해한다. 이는 전반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영국의 주요 언론들이 새삼스럽게 ‘온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보수당의 당내 경선으로 새 총리를 뽑는 상황’을 문제 삼았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디언’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진보 성향 언론은 유럽연합 및 국경의 개방성 등 진보 의제를 놓고 존슨 총리의 취임에 반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보수 성향의 경제지들은 브렉시트가 미칠 경제적 여파와 혼란을 우려하며 존슨을 반대했다.

하지만 보수당은 예정대로 당대표 경선을 강행했고 존슨이 승리했다. 이후 정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201912월, 아직 코로나19가 중국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던 그 무렵, 존슨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렀다. 선출의석 650석 가운데 365석을 차지하여 단독으로 과반을 넘기는 압승이었다.

어차피 본질은 ‘YS당’, ‘DJ당’
여기서 우리는 내각책임제가 정당과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내각책임제에서 집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정당이다. 어떤 정당이 총선을 통해 다수 의석을 차지하거나, 총선 후 여러 정당이 연정을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한다. 그렇게 집권당 혹은 집권 내각이 형성되고, 그들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국정을 수행한다.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문화는 정당보다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지 않은 후발주자로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정당은 그저 ‘대통령당’일 뿐이었다. 자체적인 정치 의제를 토론하고 형성하는 기능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법을 만드는 거수기 집단에 더 가까웠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가 건재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분명 그렇다. 김영삼·김대중은 당대표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정치, 정책, 가치관 등을 표상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당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어차피 본질은 ‘김영삼 당’, ‘김대중 당’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던 고도 성장기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집중된 리더십의 필요성은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1987년의 직선제 개헌, 그 이후의 역동성 있는 정치 변화 등은 정당보다는 사람, 특히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합 집산하는 한국 정치의 기본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론과는 다르다. 정당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의회 정치의 중요성이 누락돼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형 정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누군가의 개인적 의지나 열정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합의된 이상과 이념에 따라 움직인다. 이를 원한다면 정당의 역할은 더욱 커져야 한다.

‘코빈마니아’의 실패
다시 영국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에 따르면 영국의 선거는 돈이 안 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예 법으로 돈을 못 쓰게 막아놓았다. “영국은 선거법상 선거비용을 1만 파운드(약1400만원)이하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고 유권자들을 직접 찾아나서는 선거 운동원에게 절대 돈을 지급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비밀을 풀 열쇠는 자원봉사에 있다. “영국의 선거운동은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점심식사를 자비로 챙겨오고 교통비도 자기 돈을 쓴다. 말 그대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주영 대사관 홍보실에서 제공한 자료라고 하니 믿어도 좋을 듯하다.

왜 영국의 정치 고관여층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봉사를 하는 걸까. 정치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과 사랑이 유별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치에 대해 관심 많기로 따지면 한국인을 능가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당에서 자원봉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 중 일부는 인터넷에서 악플을 달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이 차이는 대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영국에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은 퍽 많은 함의가 있다. 당대표를 뽑는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물론 정당마다 규정이 다르긴 하겠으나) 대부분 여론조사와는 무관하게 당원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다. 평소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테레사 메이가 사임하고 보리스 존슨 등 다양한 후보가 당대표 경선에 나서는 상황이라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나의 한 표가 지금 당장 누군가를 영국 총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다른 ‘민주주의 선진국’ 역시 정당을 운영하는 데 자원봉사에 크게 의존한다. 대신 당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그만한 정신적 보상을 제공한다. 그 중 핵심은 당내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이다. 설령 ‘민심’과 ‘당심’이 다르다 해도 ‘당심’을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이념이나 정책에 집중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진다.

극단적인 두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만든 영국 보수당의 ‘당심’은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반면 제레미 코빈을 열렬히 지지하던 노동당의 진보 블록, 소위 ‘코빈마니아’(Corbynmania)들은 그렇지 못했다. 노동당은 201912월의 총선에서 처참히 패했다. 코빈의 오랜 정치 경력 역시 그 시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존슨 지지자들이 옳고 코빈 지지자들은 틀렸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당심’은 ‘민심’과 가까웠거나 민심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다른 ‘당심’은 그러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코빈 지지자들은 당내 경선 및 총선 과정의 자원 봉사를 통해 뜨겁게 정치에 참여했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들의 지나친 사회주의 성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정당에 들어간다. 혹은 스스로 정당을 만든다. 민주적으로 그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이념과 정책을 정직하게 밝히고, 대중을 설득하여, 그에 따른 정치적 결과도 온전히 스스로 책임진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의 작동 방식과 매우 가깝다. 결국 당원들이 정당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정당민주주의가 관건인 셈이다.

‘정치 개혁’의 첫걸음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자면, 나는 현재로서는 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당심’보다는 ‘민심’에 가까운 지도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특히 국민의힘은 젊고 신선한 지도부가 등장해 한국 보수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면 좋겠다.

정당은 정치 결사체다. 당원 스스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지도부를 구성하며,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더욱 가깝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변화는 당원으로부터, 즉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형태여야 한다.

지금처럼 두 거대 정당이 일관된 방향도 이념도 정책도 없이 여론조사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정치 풍조는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을 떨어뜨린다. 정치를 ‘참여하는’ 것이 아닌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당에 뛰어들어 시간과 돈을 써가며 내 의사를 드러낼 이유를 빼앗는다. 물론 곧장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이상을 잊지 말아야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극성 친문, 소위 ‘대깨문’처럼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는 것은 몇 번을 비판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는 보스 정치보다 못한 팬덤 정치로의 퇴행일 뿐이다. 진정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정당 민주주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극성 지지층의 행태는 제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좀 더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시민 참여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첫걸음이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