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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26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1976년 시작된 ‘페트로달러’ 시스템
● 중동 산유국 보호 美 군사력이 기반
●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이거늘


2월 21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하며 ‘기축통화 논쟁’이 불거졌다. [채널A 화면 캡처]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21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한 말이다. 국가 채무를 더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의 견해에 맞서는 본인의 논거로서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학자이기도 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역대급 똥볼”이라고 질타한 것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재명은 2월 23일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얼마 전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에 편입될 근거’를 언급했고 본인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소리다. 애석하게도 이재명의 인용은 전경련의 본의와는 차이가 있다.

‘기축통화국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발언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탓도 없지 않다. 이재명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기축통화는 아니지만 한국 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한국 돈을 냈다, 호텔에서 팁으로 한국 돈을 주고 나왔는데 좋아하더라, 같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우리 돈의 힘이 세진 것이 맞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도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LNG선으로 대표되는 몇 개의 독보적 수출 품목이 있고, 자동차, 유조선, 기타 공업생산품 역시 준수한 대외경쟁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확장된 경제력과 인터넷의 힘을 타고 한국의 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없다. 왜일까?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 오늘날의 미국 달러가 이에 해당한다. [동아DB]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개념에 따르면, 외환 시장에서 B라는 나라의 화폐와 C라는 나라의 화폐를 거래할 때 기준이 되는 A라는 화폐, 그것이 기축통화다. 우리가 한국의 원화를 일본의 엔화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환율표에는 한국 돈 얼마로 일본 돈 얼마를 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는 원화 대 달러, 엔화 대 달러의 교환비율이 먼저 존재한다. 달러를 매개로 원화의 가치, 엔화의 가치를 평가한 후, 비로소 원화 대 엔화의 환율이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를 때 한국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뜻으로 기축통화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 정의를 따르더라도 원화는 기축통화로 인정될 수 없다.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은 우리의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 규모보다 작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액 비중을 보면 그렇다. 1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 유로가 36.56%로 2위다. 1위와 2위 이후로는 격차가 한없이 벌어진다. 영국의 파운드는 3위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고작 6.3%에 지나지 않는다. 원화는 이 순위표에서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앞으로도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학’의 눈으로 바라본 설명에 불과하다. 노골적인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제국의 화폐는 그 영향권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 저장 및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부터 오늘날의 미국 달러까지 변치 않는 냉정한 현실이다.

게다가 달러는 다른 제국의 기축통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가치를 귀금속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로마의 디나르는 기본적으로 은화였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는 디나르의 은 함량이 높고 정품성을 보장받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바깥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로마의 힘이 기울어지면서 점점 은 함유도가 떨어지고 로마의 해외 구매력 역시 꺾이는 악순환이 펼쳐졌다. 달러 역시 연방준비제도와 포트 녹스에 쌓여 있는 금괴를 통해 가치를 최종적으로 담보했으나 베트남 전쟁 비용 및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1971년 금태환을 중단했다.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군사력
그렇다면 대체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1970년대, 세상에는 금보다 더 소중한 재화가 하나 있었다. 플라스틱의 원료이며, 자동차, 배, 비행기 등 거의 모든 교통수단의 연료인데다가, 심지어 비료를 생산할 때도 필요한 ‘검은 황금’. 석유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를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다. 그 위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석유의 지배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976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왕가와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하며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속한 나라들도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니라 원유로 태환되는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몇몇 나라들은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나라들의 말로는 썩 좋지 않았다. 2000년 9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산 원유 결제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디나르 금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원유를 거래하자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뒤집히고 카다피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전쟁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음모론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는 페트로달러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미국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묶어놓을 수 있는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이 갖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힘이란 미국 달러로만 살 수 있는 석유의 힘,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대가로 유지하다
이재명의 ‘기축통화국’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그래서다. 재정 적자를 늘려 당장 복지 예산으로 뿌리자는 취지로 기축통화국 발언을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과 그가 주창했던 기본소득 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기축통화를 그저 ‘맘 놓고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돈’, 일종의 ‘재정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에게 기축통화국이란 ‘공짜로 돈 찍어내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축통화란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다. 패권국이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을 모두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린 6‧25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베트남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퍼부으면서도 굴욕적 퇴각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고, 여러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대내외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달러 패권은 그런 면에서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군대에서 젊음을 바치며 때로는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는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것을 대가로 얻어냈고 지금껏 유지하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한국 돈의 대외적 신뢰도가 높아지니 마치 ‘공짜 돈’이 생긴 것처럼 재정 부채 비율을 10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재명의 주장은 너무도 가벼운 소리다. 패권국의 화폐, 기축통화는 그런 게 아니다. 패권을 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적대국 혹은 제3국의 피해 역시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입만 열면 반미 자주를 외치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달러에 대한 세계의 신뢰는 결국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신뢰다. 석유를 틀어쥔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 협의의 산물이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온 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진보적 가치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썩 달가운 미래도 아닐 것이다.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
이 글의 목적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게 패권국이 된 미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점령했으면서도 ‘사용료’를 받는 대신 각국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이것은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패권과 질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결백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같은 나라였지만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권으로 편입된 북한의 엇갈린 운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 그 시점에 주어진 다른 선택지에 비하면 분명히 낫다.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19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행정학 석사 李’를 들여다보다

● 주제, ‘지방정치 부정부패 극복방안’
● 백기완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 “지방정치에 주민 직접참여 활성화”
● 자칫 ‘지역 영주’ 부채질하는 주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학위 논문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 표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 학위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검증은 대선 후로 미뤄졌다. 지난해 말 가천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조사 계획에 따르면 그렇다. 가천대는 4월 7일까지 조사위원회의 검증을 마치고 4월 17일까지 연구윤리위원회 승인 등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논문 재조사 결과 발표도 대선 이후인 3월 31일로 미뤄졌다.

두 사람의 논문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인 반면 김건희는 후보의 부인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건희의 논문과 학위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에서 학력 부족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득했다는 인상을 준다.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만한 일이지만 비슷한 목적으로 학위를 딴 수많은 이들과 비교해야 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
이재명의 논문은 다르다. 이재명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이재명은 201611월 4일 부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라서 “어디 이름도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 극복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야간 특수대학원을 갔고,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굳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다만 인용문의 따옴표를 못 친 게 있어서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재명은 지난해 1229MBC 라디오에 나와서는 “(학교 측에) 필요 없다, 제발 취소해달라, 그러고 있는 중”이라며 “제가 인정한다. 제대로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몇몇 구절을 가져다 놓고 비교하거나 ‘카피킬러’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지수를 산출해볼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4월 17일 이후에나 내려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재명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 또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쓴 석사논문의 표절 여부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읽고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512월 경원대(현 가천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를 펼쳐보자. 일각에서는 이 논문의 영어 부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엽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은 이 논문을 쓰고 2006년 2월 행정학 석사가 됐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5·31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지자체장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지자체 부정부패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오는 대신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학의 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심화·확장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 지적 정직성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초선 성남시장 때인 201310월 2일 한 행사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동아DB]
2006년 낙선한 이재명은 2010년에 결국 성남시장이 됐다. 그렇다면 그가 쓴 부정부패에 대한 논문이 시 행정의 현장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0년 성남시장 이재명’과 ‘2006년 행정학 석사 이재명’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모로 곱씹어볼만한 일이다. 정치적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재명의 학구열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학생 이재명의 타 저작 인용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위에서 말한 ‘따옴표를 빼먹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오류가 논문에서 눈에 띈다. 가령 13쪽, 이재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부패는 세무, 경찰, 위생, 환경, 건설 등의 분야에서 관행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백기완 외, 2000: 85-87).”

호기심을 참지 못해 논문을 읽다 말고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기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목록은 저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행본의 경우는 ‘김판석’에서 ‘백린’으로, 논문의 경우는 ‘김해동’에서 ‘박홍식’을 지나 ‘서울행정학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간에 들어가야 할 백기완의 이름과 그가 공저한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명이 직접 고르고 인용한 참고문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퍽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시 논문 제출 직전에 백기완이 행정학 석사 논문에 인용할만한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참고문헌 목록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인용문을 지웠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지적 정직성과 스칼라십(Scholarship)의 문제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쓴 논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은 지금껏 퍽 말초적인 수준에서 이뤄져 왔다.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재명의 경우처럼 논문에서 펼친 주장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경우라면 표절 여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내용’을 논박해야 한다. 내용을 논해야 설령 해당 논문이 표절로 판명된다 해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공적 담론이 남는다.

‘상향식 공천’ 듣기에는 좋은 말
그러한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지방정치 부정·부패 유형과 실태분석’을 다룬 3장을 펼쳐보자. 2005년 논문을 쓸 당시 이재명은 전국 정당이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하는 과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상향식 공천과 같은 공천결과의 합리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하향식 공천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공천과정과 관련된 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다”(20쪽)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과 좌절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재명은 다소 평정을 잃는 듯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일각에서 기초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자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정당에 의한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논의가 많았고, 특히 집권여당은 공천배제를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선거법협상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21-22쪽)

요컨대 이재명은 지방선거에 있어서 최대한 전국정당의 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하향식’ 공천 대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향식’ 공천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중앙정부와 전국정당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지방 단위에서 무한대의 경쟁과 돈 선거가 벌어지며,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재명 스스로도 이 난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논문의 서론에서 한 문단을 인용해보자.

“지방정치과정에서의 부패는 중앙정치와는 달리 극복방안이 마땅치 않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략) ①지방의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에는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견제수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②재정자립도가 높은 지방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에 의한 간섭적 정치적 통제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③이 때문에 지방정치에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조직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2쪽, 원문자는 인용자)

사정이 이러한데 지방의회 등에서 상향식 공천이 과연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까? ①에서 이재명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시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무방한 지자체장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영향력을 발휘해 지방의회까지 손에 쥐고 ‘지역 영주’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②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가령 IT(정보기술) 대기업이 몰려 있고 재정자립도가 높은 성남시 같은 곳의 지자체장은 더욱 감시와 견제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에서 제안하고 있는 주민 직접 참여를 위한 주민의 정치적 조직화라는 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장의 재선을 위해, 혹은 시장의 ‘더 큰 꿈’을 위해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제언을 따르면, ‘성남시장’ 이재명의 권력은 줄어들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16일 서울 지하철 잠실새내역 7번 출구 앞에서 집중유세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라는 명분
부정부패, 특히 지방정치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연구실보다는 현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재명의 논문은 그런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선거로 뽑히고 임기를 보장받은 부유한 지자체의 수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키워나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 아닐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당장 현업에서 쓰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건, 모든 공부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유명인의 공부와 논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 마치 조선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자로 쓰인 중국 책의 현실성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걸 누가 더 잘 외웠느냐를 놓고 겨루던 것을 연상케 한다. 누가 무슨 공부를 했고 그 내용이 논문에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진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대신,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눈으로 ‘성남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검토하고 비판했더라면 더 유익한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12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소수민족 정책 탈 쓴 패권 전략

● 장이머우 연출 개막식 논란
● 쑨원, ‘오족공화’ 고안 이유
● 다민족주의, 약육강식 시대 유산
● 차별 않는다는 자치권, 양날의 칼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오성홍기를 든 소수민족 중 하나로 표현돼 논란을 빚었다. [뉴스1]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개막식의 한 장면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기 위해 나르는 사람들 중,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댕기머리를 한 여성이 한국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의 것인 양 포장하는 ‘동북공정’이라며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2월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연달아 실격 처리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은 한층 더 나빠졌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두 선수가 예선에서 탈락한 후, 폴란드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음에도 또 한 차례 비디오 판독을 거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폴란드 선수를 실격 처리하자 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중국만을 위한 잔치가 돼버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인터넷을 넘어 정치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주한중국대사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
그러자 2월 8일 주한중국대사관은 대변인 명의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의 중국 조선족 의상 관련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쇼트트랙 판정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개막식의 조선족 의상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중국이 ‘문화공정’과 ‘문화약탈’을 하고 있다며 억측과 비난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반발했다.

중국대사관의 입장은 이렇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므로, “중국의 각 민족 대표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한반도의 문화는 조선족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므로, 조선족이 조선족의 옷을 입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다 해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실 이런 입장은 중국대사관이 나서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 성향을 지니는 식자층과,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혐오 분위기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진작부터 해왔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일부다. 그런 조선족이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재현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필자는 최근 수년 사이 늘어난 조선족 혐오 분위기에 반대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해 조선족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일종의 예비 범죄자 집단인 양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보편적 인권 차원을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해서는 곤란하다. 저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혹은 소수민족 정책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확장과 지배 프로세스를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한 사람
중국은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말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4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56개의 민족을 나열하고 규정했다. 198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소수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어떠한 민족의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민족단결을 파괴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한 헌법적 기초에 근거해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民族區域自治法)을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구만 보면 좋은 말처럼 보인다.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분열 조장도 하지 않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하다. 모든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그 진의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중화민국을 수립했던 무렵,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고민이 깊었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일부 몽고족이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베이징을 차지하며 중원 전체를 정복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은 근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생 공화국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이 된 나라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족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할 것이며, 반대로 만주족과 몽고족은 정복자에서 피정복자로 굴러 떨어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중화민국을 파괴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쑨원은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회족), 한족, 티베트족이라는 다섯 개의 민족을 명시하고 이들 모두가 중화민국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이 오족공화의 개념은 이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한 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됐다. 일본인을 뜻하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몽골족, 한족, 만주족이 서로 협력하며 잘 살아가는 나라, 근대적인 국가 만주국을 이루겠다는 소리다.

노골적 차별과 지배 담론
이것은 분명 청나라 시절보다는 나아진 것이다. 만주족이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민족을 명시하고, 나열한 후 ‘민족 간 차별을 금지한다’고 선포하는 발상은 21세기는 고사하고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국이나 서구의 식자층이 떠올릴법한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다. 노골적인 차별과 지배 담론일 뿐이다.

오족공화, 오족협화, 그 뒤를 잇는 중국의 56개 민족 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뮈의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총독을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로 간주하고 행정체계 내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알제리는 치열한 전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얻어냈다.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 프랑스는 헌법을 개정한다. 마치 중국처럼 ‘프랑스는 프랑크인, 켈트인,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부르군트인, 골족, 바이킹, 유대인, 베르베르인 등 10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규정했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참고로 베르베르인이란 알제리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쏴 죽인 현지인 또한 베르베르인이다.

어떤가. 중국이 말하는 ‘다민족주의’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가. 특히 1950년을 전후해 무력으로 병합한 티베트과 위구르를 ‘수많은 중국의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하고 억압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해 서구 민주주의 문명권을 이루는 나라의 식자층이 생각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없다. 문화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점령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될 타민족을 억지로 한 나라의 범주에 포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등한 법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19세기-20세기 잔여물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구시대의 유산이다. 강자가 약자를 복속시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횡하던 시절에나 통용됐을 논리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중국식 다민족주의는 현대적인 다문화주의는 고사하고, 21세기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 앞의 평등’과 ‘공화주의’ 같은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민주국가의 이념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호적(戶口: 후커우)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주를 막는 것이 목적인데, 결과적으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소수민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각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주어지는 ‘자치권’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법을 적용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용납한다. 그것은 ‘민족’의 입장에서는 존중되겠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적 사각지대에 산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위구르와 티베트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조선족 역시 문화적 말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한국어) 수업을 하지 않고 중국어로만 시험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19세기와 20세기의 잔여물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로의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인구와 산업 구조의 변화,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요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는 이들과 그 자녀들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지닌, 말하자면 ‘한국계 한국인’과 가까운 과거에 한국으로 온 ‘외국계 한국인’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국민으로 취급하고 단일한 국민으로 동화해나가야 한다. 문화, 종교, 민족 같은 요소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2-05

윤석열은 박정희 의료보험에서 얼마나 나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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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되려는 자, 보수·진보 줄타기 두려워마라

● 태초의 자본주의는 혁신적 이념
● 공화당 트럼프의 反세계화 기치
●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
● 존 듀이는 복지에 ‘파시즘’ 우려
● ‘진보’ 등에 칼 꽂은 여성주의


2021년 7월 2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마포구 박정희 기념재단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윤석열 캠프 제공]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

지난해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꺼낸 말이다. 이날 윤석열은 “인류 역사를 봐도 자유가 보장된 도시는 번영을 이루고 강했다”며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국가 헌법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 다수결이면 다 된다는 철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보수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흔히 기대할 답변도 이와 같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하는 가치로 놓고 자유에 더 큰 비중을 둔다거나, 시장 경제와 사회 복지 중 전자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국가여서 북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도 하다.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북한과 대화를, 보수 진영은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해 평화를 누리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자유시장과 경쟁, 군사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선호한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성(性)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가치를 옹호한다. 반면 진보 세력은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군비 축소를 주장하며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렇게만 바라보는 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다. 사회복지 역시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와 사유재산권, 제국주의,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진보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보수의 무기로 작동하기도 했다.

2021년 6월 29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선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그는 국민의힘 입당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고 답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몽테스키외의 낙관
자본주의는 진보 이념일까 보수 이념일까. 20세기 중후반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이들이라면 ‘보수의 이념’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란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기업들이 무제한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유럽, 그 중에서도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는 절대 왕정 시대였다. 임금의 변덕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경제 정책이 달라졌고 혼란이 발생했다. 다른 유럽 국가 사정도 비슷했다. 왕이나 군주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전쟁을 벌이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의적 세금을 걷고 무절제하며 방탕한 사치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핵심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개념은 당대의 식자층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주가 경제적 이해관계의 제약을 받아 충동적, 자의적, 돌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자제한다면 국가 구성원 전체가 예측 가능한 삶을 살며 더 큰 풍요와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퍼져나갔다.

당대를 풍미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낙관적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한 문장에 잘 축약돼 있다.

“정념이 사람들에게 악인이 될 생각을 불어넣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익인 상황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몽테스키외, 그와 동시대인이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 등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우리를 혼돈과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진 셈이다. 요컨대 태초의 자본주의는 ‘진보적 이념’이다.

자본주의를 진보 이념으로 여기는 관점은 뒷 세대인 애덤 스미스의 시대부터 비판과 회의에 직면했다. 19세기에 이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뒤바뀐 처지에 놓이게 된다(더 자세한 논의를 원하는 독자는 엘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정념과 이해관계’(후마니타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특히 국경 없는 자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각해보자.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인 세계화에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은 국경을 넘어 상품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오가게 함으로써 기업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현재 지배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보수’가 반대하고 ‘진보’가 찬성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브렉시트나 트럼프에 대해 찬반 논의를 벌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자본주의는 보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진보 같은 식의 단편적 사고방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경직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한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밝은 정치적 미래는 오지 않는다.

복지 강화로 이어진 박정희의 결단
그 어떤 이념도 그 자체만으로는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보성과 보수성을 이념의 속성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 따라 어떠한 이념이 진보적으로 혹은 보수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와 같은 역설을 ‘복지국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 복지는 진보의 이념인가, 보수의 이념인가. 이 주제에 해박한 독자라면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노동자의 양로금이나 건강, 의료 보험제도 같은 복지 제도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그는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진보적 인물이 아니다. 독일 제국의 영광을 꿈꾸었고, 민주주의에 반대했으며, 통일된 독일의 군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오히려 그런 비스마르크였기에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갔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강한 군인들’이 필요하며, 튼튼한 군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라난 아이들과 의료 체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가 오히려 시장질서가 아닌 국가 주도의 복지 체계를 강화하는 역설은 우리도 경험한 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마련된 현행 의료보험 체계가 그렇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국가가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 체계를 운영할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의료를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주의적’으로 바꿔버렸다. 온 국민을 국가가 운영하는 단일한 의료보험에 가입시킨 후, 병원은 일부 비보험 항목을 제외하면 오직 그 의료보험을 통해서만 돈을 받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논란이 있는 주제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폭넓게 확보하는 동시에 의사들에게도 일정하게 치료 대상과 항목에 있어 자유를 보장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서도 병원에 대해 온전히 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지는 않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참고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성공 사례가 돼 있다. 즉 사회복지와 의료보험 같은 주제에서 보수와 진보는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변증법적으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움직인다.

국가 주도 복지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날 선 비판을 한 철학자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보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존 듀이다. 듀이가 볼 때 국가 중심의 복지 체계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국가가 국민을 복지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필요를 파악해 그것을 다시 국가가 나눠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국가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은 듀이가 볼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듀이 스스로는 사회 진보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국가가 복지를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셈이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한국의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 같은 보수주의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과 사회 복지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반면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철학자 듀이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식의 복지를 ‘국가 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 부르며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당대에 손꼽히는 ‘남성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가 복지를 이유로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한쪽의 전유물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썼다. [현실문화 제공]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각을 적용해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물론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그 출발부터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적 의제로서 영역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당시 여당은 자유당이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었다. 제1야당은 보수당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당연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자유당은 언제나 말로는 여성 참정권을 옹호한다고 하지만, 언제 투표권을 줄 것이냐고 물어보면 늘 ‘나중에’라는 답만 했기 때문이다.

팽크허스트가 볼 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약속을 어기는 자유당을 심판하지 않고 ‘비판적지지’만 하고 있는 한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자유당으로서는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느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에너지만 쏙 빨아먹은 후 야당인 보수당 핑계를 대며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테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며 비난했다.”

마침 보궐선거로 의석 하나가 기로에 놓였고, 그 의석을 자유당이 보수당에 빼앗기면 여야가 바뀔 상황이었다. 그런 중요한 선거에서 팽크허스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보수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정치적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라고 여긴 셈이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 운동은 교양 있는 중산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자유당 지지자였기에 팽크허스트의 방향 전환은 내부에서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다.

팽크허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프라제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자유당은 선거에서 졌고 보수당이 집권했지만 세상은 자유당의 협박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정치적 파괴력이 입증됐기에, 오히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뷰파인더 칼럼(윤석열과 보수여, ‘이대남 다 걸기’ 초강수 아닌 惡手)에서 말했던 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다. 페미니즘을 ‘진보의 전유물’로 보는 발상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특정 진영과 정치적 입장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의 등에 칼을 꽂고 ‘보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적 의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과 자유시장주의
‘주당 52시간 노동제를 철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품질이 떨어지는 식품을 사서 먹을 수도 있게 해야 한다.’ 정치 초년생 윤석열을 곤란하게 했던 문제의 발언들이다. 언론에서 축소, 과장, 왜곡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각각의 발언을 관통하는 맥락을 더듬어볼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 사회, 정치철학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이 위와 같은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한 것은 그의 내면에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대선후보로서 윤석열이 적합한 인물인지 근심하던 기존 지지층에는 퍽 안심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도층의 눈에는 그렇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유시장’이라는 공식에 함몰돼 현재 우리가 겪는 시장의 실패와 부작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그러한 우려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무상급식 조례안에 반대하며 주민투표를 시행했다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자진사퇴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세련된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시 행정을 처리해나가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밥 주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며 주민투표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러자 상당수의 서울시민은 냉소를 넘어 분노했다. 심지어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지지층마저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평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 투표소에 갈 만큼 한가한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수주의=복지 반대’라는 단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교조적 태도를 보인 오세훈의 정치적 악수(惡手)는 ‘안철수 현상’과 맞물려 서울시장 박원순을 낳았고, 이후 서울시를 기반으로 민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요, 사회복지는 사회복지다. 진보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보수의 페미니즘도 있다. 진보의 철학, 보수의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선거는 어떤 결과가 나오건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을 위해 유익한 대안을 내놓는 정치 세력과 이념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1-29

1960년 12월생 윤석열은 설에 63살? 62살? 61살?

 

1960년 12월생 윤석열은 설에 63살? 62살? 61살?

[노정태의 뷰파인더] 세계 유일 한국식 나이 셈법

● 자궁에서 10개월 보내면 한 살?
● 고대, 중세 중국 전통
● 일본 연호가 기년법
● 행정편의주의 ‘年 나이’


한국인은 매년 새해를 두 번 맞이한다. 양력으로 1월 1일에 한 번, 음력으로 1월 1일에 한 번. 새해 결심을 했다가 못 지켜도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며 농담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인은 매년 나이도 두 번 먹는다. 1월 1일에 한 번, 자신의 생일에 한 번. 태어날 때부터 일괄적으로 부여받은 한 살에 매년 한 살씩 덧붙는 ‘세는 나이’, 그리고 대부분의 공문서에 사용되는 ‘만 나이’가 그것이다.

한국인의 나이 셈법. 이 문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K-팝과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유행과 더불어 이제는 전 세계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나이를 세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한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한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에서도 출생 이후의 나이만을 세고 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한 사안이다. 그만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9년, 2020년, 2021년, 매해 빠지지 않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한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올해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의제를 던졌다. 이준석 당 대표, 원희룡 선대위 정책본부장은 1월 17일 유튜브에 공개된 ‘59초 쇼츠’ 영상을 통해 서로 몇 살인지 물어보며 오락가락하는 한국의 나이 셈법을 문제 삼았다. 그러고는 윤석열을 향해 바꿔보자고 제안하자 윤석열은 “좋아, 빠르게 가”라고 답하며 영상이 끝난다.

생각해보면 이건 퍽 이상한 상황이다. 드러나는 의견만 놓고 보면 그 누구도 복잡하고 난삽한 한국식 나이 셈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만 나이를 쓴다. 그런데 왜 우리의 나이 체계는 쉽게 통일되지 않는 걸까?

허세, 주세, 실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20211112일 서울 광화문 이마빌딩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일단 가장 흔한 오해부터 바로잡아야 하겠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부여하는 한국식 ‘세는 나이’는 태아가 잉태해 있던 시절을 포함하는 인간적인 나이 셈법이라는 주장 말이다. 그렇지 않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해 출생하기까지 사람은 대체로 자궁에서 10개월을 보낸다. 그보다 일찍 태어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12개월을 채우는 아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논리에 따라 1월에 잉태해 11월에 태어난 아기의 나이를 한 살이라고 센다면, 10월에 잉태해 이듬해 8월에 태어나는 아기의 나이는 두 살로 세는 것이 합당하다. 이미 자궁에서 보낸 시간에 세는 나이의 기본인 한 살을 또 더해야 할 테니 말이다.

세는 나이에 대한 두 번째 오해가 있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세는 나이는 ‘우리’ 전통이 아니다. 동아시아권, 특히 중국에서 풍부한 문헌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중국 전통이다. 청나라가 무너진 신해혁명, 그리고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차지한 역사적 격변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형태의 나이 세는 방식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다.

이기천 서강대 사학과 강사의 논문 ‘당송대(唐宋代) 묘지(墓誌)의 연구와 생년(生年) 표기: 나이 세는 방식의 혼란과 제안’(중국학보 96권, 2021년 5월)을 펼쳐보자.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사람들이 죽은 이를 매장할 때 묻는 묘지(墓誌)라는 문헌이 있다. 운 좋게 고스란히 발굴되면 상당히 큰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해당 시대의 사람들이 직접 작성하고 매장한 살아있는 텍스트다. 그리하여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묘지를 중요한 사료로 삼는다.

단, 문제가 있다. 당송대 사람들의 나이 세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처럼,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 가지나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은 허세(虛歲)다. 지금 우리 ‘세는 나이’와 같은 방식이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치고, 매년 해가 바뀔 때 한 살을 더한다. 다만 그 시절에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썼다는 차이가 있다. 둘째로는 주세(周歲)가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연 나이’와 같은 개념이다. 태어난 해를 한 살이 아니라 0살로 치고, 매년 정월 초하루에 한 살을 더한다. 마지막은 실세(實歲)다. 태어난 날부터 하루씩 더해 생일에 한 살이 된다. 다음해 생일에는 두 살. 지금 우리가 아는 ‘만 나이’다.

이기천은 당시 문헌을 다방면으로 검토해 당송대 사람들은 대체로 허세에 따라 나이를 따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당연한 나이 셈법’, ‘표준적 나이 셈법’은 주세도 실세도 아닌 허세였다. 그러므로 후대 연구자들은 일단 허세, 즉 세는 나이에 따라 해당 시대 문헌을 읽자고 주장한다. 개별 연구자가 임의로 주세나 실세를 통해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의 나이를 세고 논문을 쓰면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독창적이고 고유하고 아름답다고?
그러니 ‘세는 나이’에 대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우리 조상님들은 이런 식으로 나이를 셌을까?’라고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는 ‘왜 고대와 중세의 중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나이를 셌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 방식은 베트남과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 고루 수출됐지만, 오직 대한민국만이 여전히 이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는 나이’의 수수께끼는 간단하다. 기년법(紀年法)을 개인에게 적용한 것이다. 기년법이란 무엇인가? 왕의 제위 기간에 따라 달력을 구분 짓는 방식이다. 태종 이방원은 서기 140011월에 즉위했다. 그에 따라 1400년은 ‘태종 1년’으로 불린다. 그는 서기 1418년 9월 9일에 왕좌를 세종에게 물려줬다. 따라서 1418년은 태종 18년이자 세종 1년이 된다. 0이라는 개념 없이, 왕에서 왕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구분 짓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독자는 이런 식의 나이 세는 방식, 혹은 시대 구분하는 법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전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동아시아의 전통적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 일본의 연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 텐노가 물러나고 나루히토 텐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은 ‘令和’라고 쓰인 붓글씨를 대중에 공개했다. ‘令和’, 일본식으로 ‘레이와’라 읽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음을 알린 것이다. 2019년은 일본인에게 헤이세이 31년이자 레이와 원년, 즉 레이와 1년이 됐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전통에 대해 ‘기원’보다는 ‘사용’, ‘과거’보다는 ‘현재’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대찌개가 어엿한 한국의 ‘전통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일본의 ‘노리마키’(海苔巻)와 한국의 ‘김밥’은 모두 적당히 간을 한 밥을 김에 싸서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같고, 엄밀하게 기원을 따지자면 노리마키가 김밥의 원조다. 그러나 노리마키의 ‘전통’을 김밥은 넘어선지 오래다. 우리는 그 속에 치즈를 넣고 참치를 넣고 뒤집어서 싸고 청량고추로 매콤한 맛을 내며 심지어 밥이 아니라 계란지단을 꽉꽉 채워 넣으면서도 ‘김밥’이라고 부른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그러니 ‘세는 나이’를 ‘우리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덧붙여 우리 문화의 ‘고유한’ 전통이라거나, 오직 우리에게만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미풍양속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는 나이의 기본이 되는 기년법, 그 연장선상에 있는 허세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반도에 유입됐다. 앞서 언급했듯 전 세계에 기년법을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습군주제를 유지하는 일본은 온 국민이 우리만큼이나 능숙하게 기년법을 쓴다. 세는 나이를 옹호하고자 우리 문화의 독창성, 고유성, 아름다움을 근거로 들이대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일 수밖에 없다.

71%가 세는 나이 폐지에 찬성
중국과 대만은 세는 나이를 일소한 지 오래다. 일본 역시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기년법이나 그로부터 파생된 나이 세는 법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허세, 혹은 세는 나이가 보편적으로 살아남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나 나름대로 열심히 논문과 책 등을 뒤져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아주 거친 추론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필자는 한국에서 쓰이는 또 다른 나이 셈법인 ‘연 나이’에 주목한다. 연 나이는 문화와 관습이 아니라 법에서 쓰이는 나이 셈법이다. 청소년보호법이나 병역법 등 일부 법률은 연 나이를 사용한다. 이런 법을 개정해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것이 국민의힘 공약이다.

연 나이를 사용하는 저 두 법에 뭔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젊은이들을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목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만 나이에 따라 청소년보호법을 적용한다고 해보자. 같은 학교와 학급 내에서도 청소년보호법의 대상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나뉠 수 있다. ‘관리’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병역법의 목적은 더욱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 늘 전쟁 위험을 안고 있다. 여차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을 단번에 군사 단위로 편성해야 했다. 병역의무를 부과할 때 만 나이를 기준으로 삼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연 나이와 세는 나이는 시작점이 0세냐 1세냐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나이 셈법이다. 연 나이는 청소년이냐 성인이냐, 군 입대 대상자냐 아니냐와 같이, 한국인 특히 남자들의 인생에서 큰 분기점을 나누는 방식으로 사용돼 왔다. 그러니 그 자매품이라 할 세는 나이 역시 수십 년간 한국인의 문화에 깊게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닐까.

이유가 무엇이건, 이제 세는 나이는 사라질 때가 됐다. 1월 5일 한국리서치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1%가 세는 나이 폐지에 찬성한다. 청소년 보호와 병역 의무 수행이라는 중요한 과제 역시 행정편의주의가 아닌 당사자의 실제 연령에 맞춰야 마땅하다. 국제적인 표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1-22

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

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일벌백계’에서 ‘백벌백계’로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교훈
● 찰스 페로의 통찰, ‘정상 사고’
● 분풀이 패러다임은 해결책인가
● 중대재해처벌법 우려하는 이유
● 작업중지권 없는 韓 근로감독관


1월 11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건설 중인 아파트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 작업자 중 6명이 실종됐다가 1월 14일 1명이 사망한 상태로 수습됐다. 1월 18일 현재 5명이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광주=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대형 참사는 ‘정상적’ 사건이다. 사회학자 찰스 페로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소개된 책 ‘Normal Accident’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고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뒤흔든 바 있다.

대형 건축물, 원자력 발전소, 화학 공장, 비행기, 배 등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떠올려보자. 각각 목적도 제작 방식도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중층적 하위 체계를 결합해 만들어지며, 하위 요소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적당히 뺐고, 적당히 실었으며, 적당히 묶고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은 그 나름의 철저한 관리 감독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은 고장이 나거나 오작동할 수 있다. 마치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인 인간이나 동물이 작은 병이나 상처를 입은 채로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질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작은 문제가 여러 개 중첩되면 어떨까. 평소 다한증이 있어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 발바닥에 작은 티눈이 생겼고, 오늘따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충혈 되고 침침한 상태라고 해보자. 떼어놓고 보면 별 문제가 아니다. ‘정상’이다. 다만 발바닥의 티눈 때문에 걸음걸이가 어색해진 상태에서, 눈이 잘 안 보여 균형을 잃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나 있어서 계단의 난간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넘어진다면 ‘정상적’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크게 다칠 수 있다.

페로의 주된 목적은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냉각수를 거르는 복수 탈염 장치에 불순물이 섞였고, 터빈의 작동이 멈췄다. 흔히 발생하는 ‘정상적’ 상황이었다. 하필 그 상황에 대비한 비상 급수 펌프가 막혀 있었다. 이틀 전 보수 작업을 했지만 제대로 마무리 지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밸브에 이상이 있을 때 표시하는 램프 위에는, 하필이면 바로 그 때, 서류가 붙어 있었다. 밸브 이상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곧장 대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노심이 과열됐고 미국에서 가장 큰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도 마찬가지다. 늘 해왔던 것처럼 짐을 더 싣기 위해 평형수를 적당히 뺐고, 배에 많은 짐을 실었으며, 그 짐을 제대로 묶지 않았다. 하필이면 조류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수역에서 선박 운항에 서툰 3등 항해사가 키를 잡았고, 짐이 무너지면서 배가 균형을 잃었는데, 하필 그때 배의 조타장치를 움직이는 부품이 관리 소홀로 인해 한쪽으로 쏠린 채 고정되고 말았다. 무게균형이 깨지지 않았다면 적당히 제 자리에서 맴돌았을 세월호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최고 안전 책임자 선장과 그 아래 고급 선원 다수가 자기만 먼저 살겠다고 도망쳤다. 그 결과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이렇듯 거대한 공장, 발전소, 건설 현장, 기차나 배, 우주선 같은 대형 시스템에는 ‘정상적’으로 처리되면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문제가 수없이 발생하고 또 해결되지만, 때로는 그런 작은 사고가 겹친다. 그러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엄청난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 찰스 페로는 그와 같은 현상을 이렇게 정의한다.

“상호작용성 복잡성과 긴밀한 연계성이라는 시스템의 속성에 따라 발생하는 사고를 ‘정상 사고’ 혹은 ‘시스템 사고’라고 한다.”

너무도 친숙한 패턴 반복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이 1월 17일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용산사옥 대회의실에서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아파트 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이날 정 회장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1월 11일, 광주 화정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건설 중인 아파트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23층부터 38층까지 무너져 내렸다. 공사 작업자 중 6명이 실종됐다가 1월 14일 한 명이 사망한 상태로 수습됐다. 1월 18일 현재 아직 5명이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사고 후 전개는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사임했다. 경찰은 현대산업개발 공사부장 등 안전관리 책임자와 하도급업체 현장소장 등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다. 감리 3명 역시 관리 감독 소홀 혐의로 입건된 상태다. 문제가 터진 후 ‘책임자’를 찾아서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너무도 친숙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아직 실종자 수습과 원인 분석이 이뤄지는 중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고층 아파트 건설 사고 역시 일종의 시스템 사고라는 것이다. 개별적 작업만 놓고 보면 ‘이쯤은 해도 되겠지’ 싶어서 어기는 안전 규칙, 혹은 챙기지 못한 작은 실수와 문제가 중첩돼 거대한 사고로 이어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정확한 사고 원인을 단 하나로 압축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사고의 진짜 원인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대형 사고에 대해 이전과 같은 방식의 대응만을 반복한다. 책임자 나와라, 누구 잘못이냐, 누구 하나 붙잡아 ‘일벌백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심지어 현장 작업자들이 이른바 조선족이라는 식으로 혐오 발언 성격을 지닌 음모론마저 횡횡한 상태다. 누군가는 잘못을 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애꿎은 희생자가 됐겠지만 ‘일벌백계’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이 사건을 바라봐선 안 된다.

‘일벌백계’는 기본적으로 백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을 처벌해 본보기로 삼겠다는 발상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99건의 위반 사항을 잡지 않거나 못한다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는 시스템 사고를 예방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사항을 100% 철저하게 지킨다 해도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실수와 오류가 중첩돼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일벌백계’는 사고의 예방이 아닌 사고 발생 후의 분풀이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는 1월 27일부터 시행될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우려하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앞으로는 대형 사고가 발생할 경우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하청이나 재하청이 아닌 원청의 대표자나 책임자 등이 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일벌백계’의 세계관에 따르면 대단히 정의로운 일이다. 하지만 건설 및 산업 현장의 인센티브 구조는 그대로다. 원청과 하청의 먹이사슬은 똑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는 사고가 날 경우 대신 감옥에 갈 누군가를 앞세우는 식으로 기업들이 대응하지 않을까. 심지어 ‘일벌백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백벌백계’와 체크리스트
해법은 없을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작은’ 사고들이 모여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현상, 그것을 어떻게 가능한 한 원천봉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답을 모두 설명했다. ‘일벌백계’를 버리고 ‘백벌백계’로 나가야 한다. ‘큰’ 사고가 터졌을 때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때리는 식으로는 ‘작은’ 사고를 막지 못한다. ‘작은’ 사고를 막지 못하면 결국에는 ‘큰’ 사고가 터진다. 그러므로 핵심은 ‘작은’ 사고들을 꾸준히 체크하고 예방하며 곧장 수정하고 확인할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는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다. 현직 의사면서 ‘뉴요커’의 필자로도 유명한 아툴 가완디는 ‘체크! 체크리스트’에서 그러한 과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현대 의료계의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가 있다. 그 환자를 살리려면 먼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아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에 따른 직무 178가지를 매일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니터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바로 옆 침대에 있는 환자의 심장이 멎고, 여성 환자의 가슴 개복을 도와달라고 간호사가 찾아오더라도 일의 종류나 성격에 상관없이 178가지 일을 정확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인 상황이다. 심지어는 아직도 의료계가 충분히 전문화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툴 가완디의 해법은 단순하지만 확실하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고 확인하며 일하는 것이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확인할 사항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일하기에 앞서 서로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며 그 체크리스트를 검토한다. 그 간단한 절차만으로도 업무 현장은 훨씬 민주적인 분위기로 변하고, 서로가 상대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사소한 실수가 거대한 실패를 낳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단, 중요한 전제가 있다. 체크리스트를 체크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수술실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간호사에게 체크리스트를 맡기면 권위적인 의사나 간호사는 무시하고 ‘대충 빨리 하자’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체크리스트는 공염불이 되고 만다.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부기장이 기장에게 체크리스트에 입각해 좋은 조언을 해도 권위적인 기장이 듣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수술실 막내 간호사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산업안전에 대한 우리의 법과 규정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주요 외국의 하도급 산업안전 체계와 함의’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좋은 제도를 많이 수입해 놓은 상태다. 문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찬임은 특히 현장에서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는 근로감독관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근로감독관에게 작업중지권이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작업중지권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있다. 근로감독관은 다만 관계인에게 질문하고 서류를 요청할 권한을 가질 뿐이다(산업안전보건법 제 155조 1항). 수술실의 막내 간호사가 체크리스트를 쥐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어도 의사를 막을 권리는 없는 셈이다. 물론 근로감독관의 권한을 확충하는 것 말고도 더 좋은 방안이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유의 아파트 붕괴 사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실종자를 찾는 것만이 아니다. 민주적으로 소통하며 지킬 건 지키는 안전한 산업 현장을 이뤄 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해내려고 대충 넘어가는 악습을 도려내지 않는 한, ‘정상 사고’는 언젠가 재발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1-15

이재명 ‘탈모 밈’ 윤석열 ‘멸콩 밈’은 흥겨운 헛발질

 [노정태의 뷰파인더] 그들은 아이젠하워가 아니거늘

● 李 ‘심는다’, 尹 ‘멸치와 콩’
●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 지지층만 즉각 반응한 ‘챌린지’
●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8일 서울 동작구 이마트 이수점에서 멸치와 콩을 사고 있다.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 제공]
선거는 일종의 흥행 사업과 유사하다. 유행어를 만들고 히트시키는 쪽이 재미를 보게 마련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고사하고 TV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전부터 그랬다. 미국의 전직 장군 아이젠하워는 ‘아이 러브 아이크(I Love Ike)’라는 입에 착 붙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밈’에 힘입어 그는 정치 경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이겨내고 1952년 대선에서 이겼다.

입에 착 붙는 구호가 선거를 좌우하는 모습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반복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는 거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돌파하더니 미국 대통령직을 꿰찼다. 바야흐로 ‘밈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을 뽑는다고요? 노(No), 이재명은 심는 겁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월 4일 공개한 유튜브 영상에서 한 말이다. 탈모인들의 수요를 노린 ‘소확행’ 공약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인터넷에서 탈모는 신체 현상이기에 앞서 하나의 밈이다. 즉 ‘이재명은 심는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것을 의도하고 내놓은 공약으로 봐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1월 8일 인스타그램에 이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과 함께 “장보기에 진심인편”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다. 문제는 그 밑에 달린 해시태그다. “#이마트 #달걀 #파 #멸치 #콩 #윤석열”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듯하지만, 네티즌 반응은 달랐다. ‘멸치’와 ‘콩’의 앞 글자를 따면 ‘멸콩’, 즉 ‘멸공’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윤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운영하는 ‘AI 윤석열’은 그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달걀, 파, 멸치, 콩을 샀다. ‘달파멸콩’, 가족과 함께 하는 좋은 주말 보내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내 ‘멸공 밈’에 정국이 휩쓸려 들어갔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터넷 밈의 흥행이 과연 정치적 성공에 도움이 될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된 15초 분량의 ‘탈모 공약 동영상’. [유튜브 캡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밈’의 개념부터 파악해보자. 독자 여러분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그 책,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제시된 신조어다.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생명체란 유전자의 자기복제와 증식을 위해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기계’라는 주장을 펼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볼 때 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것은 유전자(gene)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문화 속에도 유전자와 유사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누군가가 창발적으로 떠올린 후 다른 이들이 따라함으로써 살아남고 전파되는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그것이 바로 ‘밈(meme)’이다. 그리스어에서 모방을 뜻하는 어근인 미멤(mimeme)을 적당히 편집해 gene과 운율을 맞춰 만들어낸 신조어다. 즉, ‘밈’ 자체가 일종의 밈인 셈이다. 도킨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

어떤 밈은 그리 널리 퍼지지 못하고 금세 잊힌다. 설령 널리 퍼졌다 해도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가요 차트를 점령한 수많은 유행가가 그렇다. 어떤 노래는 사람, 때로는 국가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애국가라던가, 혹은 대한민국 건국 전부터 사람들에게 불렸던 아리랑 같은 노래를 떠올려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밈은 ‘생각의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한다. 허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숙주가 될 생명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퍼뜨린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와 그로 인한 문화가 없다면 밈은 존속할 수 없다. 어떤 밈은 다른 밈보다 전파력이 크고 때로는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는다. 신이나 종교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만들고 퍼뜨리는 밈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가 서로 경쟁하듯 밈 또한 경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두뇌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밈의 성공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그 밈을 전달하려는 것 이외에 사용된 모든 시간은 그 밈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날 공개되는 수많은 노래, 개봉하는 영화, 방영하는 드라마 등이 우리의 한정된 시간과 집중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멸공 챌린지’의 이면
오늘날 밈의 작동 방식은 한층 더 바이러스와 가까워졌다. 제도권 언론이 중심이던 시대에는 소수의 밈이 대량으로 복제됐다. 지금은 다량의 밈이 상대적으로 적게 복제된다. 대신 그 과정에서 복제자들, 즉 밈을 퍼다 나르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밈을 복사하고,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한 두 마디 코멘트를 붙이거나 때로는 밈 자체를 변형시킨다. 네티즌들이 각자 그 나름의 방식으로 멸치와 콩을 보여주며 ‘멸공 챌린지’에 참여했던 것 또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후보와 극적인 재결합을 이룬 후, 국민의힘은 ‘밈 정치’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이준석 스스로가 ‘멸공 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제동을 걸긴 했지만, 그 외의 메시지를 볼 때 그러한 방향성은 뚜렷해 보인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메시지를 내놓았던 것도 그렇고, 그 후 ‘병사 봉급 월 200만 원’이라는 단문을 제시한 것도 그러하다. 구체적인 내용과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아주 짧은 밈으로 승부하는 전략이다.

온라인에서 국민의힘 지지층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우호적이었다. 열렬하게 ‘멸공 챌린지’에 참여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딱 한 줄에는 40분 만에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여성가족부 강화’라는 한 줄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직접적인 경쟁 상대가 등장할 만큼 윤석열의 밈이 성공했다는 방증이다.

수세에 몰려 있던 윤석열의 선거 운동이 공세로 돌아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론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월 10일까지의 조사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지지율 역시 반등했거나 하락세를 멈춘 듯하다. 윤석열과 손잡은 이준석의 ‘밈 정치’, 과연 대성공일까.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려울 듯하다. 앞서 말했듯 밈은 바이러스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바이러스는 전파력이 강할수록 치명도가 약해진다. 독성이 강해 숙주를 빨리 죽이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라고 해도 여러 차례 변이를 거치며 전파되다보면 치명률은 줄어들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떠올려보자. 초기에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지만 오미크론은 그렇지 않다. 전파력은 매우 빠르지만 초기 변이에 비해 치명률과 사망률이 많이 약화됐다. 숙주를 타고 옮기는 자기 복제자의 숙명이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밈은 정신에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다. 원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질적 집단 내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 밈은, 그 외의 집단에 잘 전파되지 않는다. 때로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육체에 전파되는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다.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그 치명률 혹은 독성을 줄여야 한다.

이준석이 멸공 밈의 확산에 제동을 건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같은 지지자들 내에서 보면 흥겨운 놀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국민의힘 기존 지지층을 넘어서는 유권자들에게는 그 설득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멸공 챌린지 참여자들을 두고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며 부정적인 코멘트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거를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해야지 특정 계층만 갖고 선거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거래소에서 진행된 2022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이 러브 아이크’가 전부는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아이 러브 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승리에 도움이 됐지만 공화당이 밈 하나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아우라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20년간 이어진 민주당의 통치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우월한 구도와 인물의 힘이었다. 트럼프의 경우도 다른 방향에서 짚어봐야 한다. 트럼프가 다양한 밈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건 맞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로부터 230만여 표를 더 얻었다. 승자독식제에 기반한 선거인단제라는 미국 특유의 대통령 선거 제도가 없었다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탈모 밈’으로 반전을 꾀했던 이재명의 선거운동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각에서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지닌 재정 문제를 지적하자 밈의 정치가 급속히 약화됐다. 윤석열의 밈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멸공 논란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방황하던 중도 표심을 멀어지게 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끼리 열광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면 ‘굴러온 돌’들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이치다. 밈의 정치학이 가지는 한계다. 일종의 ‘인사이더 조크’로 작동하기에 ‘우리 편’과 ‘남의 편’의 경계선을 그어버린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남자 유저들이 많은 커뮤니티의 분위기만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인터넷 밈은 선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편’끼리 서로 기를 살리는 데 적격이다. 그러나 인터넷 밈에만 의존해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국민 전체에 소구력을 지니는 대안과 구호를 끌어내고, 유권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설득해 나가는, 그런 선거를 보고 싶다.

2022-01-08

윤석열과 보수여, ‘이대남 다 걸기’ 초강수 아닌 惡手

 [노정태의 뷰파인더] 페미니즘에 투자하라!

● 20·30 세대에 백기 투항 尹
● 페미니즘은 진보 전유물 아냐
● 전통과 법치, 보수주의 두 축
● 간통죄가 여성 인권 지킨 까닭

2021년 12월 20일, 서울 여의도에 마련됐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실에서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운데)를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하는 환영식이 열렸다. 오른쪽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신 전 대표는 1월 3일 수석부위원장에서 사퇴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지금까지 20·30 세대에 실망을 주었던 행보를 깊이 반성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1월 5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선거대책위원회 해산이라는 초강수를 두며 발표한 내용의 일부다. 그의 지지율은 지난해 12월 말부터 올해 1월 초까지 지속해 떨어졌다. 이중에서도 20대의 지지율 하락세가 도드라졌다.

윤석열이 말하는 "20·30 세대에 실망을 주었던 행보"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신지예 전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 영입이 그에 포함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지예는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 정치인이다. 그런 신지예를 보수야당 대선후보인 윤석열이 영입했다. '이래도 될까?' 싶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파격적 행보였다. 신지예 때문이건 다른 요인 때문이건 그 후 윤석열의 지지율은 쭉 떨어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추월당했다. 결국 윤석열은 선대위 해산이라는 카드를 꺼냈고, 20·30 세대를 향해서는 '반성'이라는 단어를 쓸 만큼 공개적으로 백기를 들어 올렸다.

정치인의 말은 일단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한다. 윤석열은 '이대남'(20대 남성) 여론을 추종하겠다고 공언했다. 문제는 그 이대남 여론의 중심에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 즉 '안티 페미'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종합해보면 윤석열의 '20·30 세대에 사과' 발언은 앞으로 안티 페미 여론을 염두에 두겠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여러 요인에 의해 벌어진 지지율 하락의 책임을 신지예라는 한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희생양 찾기에 다름 아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면 엉뚱한 곳에서 해법을 찾으려 들고, 결국 대선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수, 페미니즘 관계가 뒤틀리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 보수 정치와 페미니즘의 관계가 뒤틀렸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외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깝다. 법치주의에 터를 잡은 근대 정치가 출발한 후로 한정지어 보자면 분명히 그렇다. 페미니즘은 보수와 진보를 오가며 여성의 권리를 증진해왔다.

보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에드먼드 버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이다. 그의 논리는 간명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세상을 단번에 뒤엎으려 하지만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혁명을 꿈꾸는 진보주의자들이 마음먹은 대로 고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책상에서 고민해 내놓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해법은 현실에서 늘 한계에 부딪힌다. 많은 경우 역효과를 불러오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버크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개혁가였다. 세상의 악을 못 본 척 하자는 태도는 버크의 보수주의와 무관했다. 버크는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고 뒤집는 이상주의적인 개혁 대신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경험주의적이고 사례 중심적인 해법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됐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는 행동 양식 혹은 문제 해결 방법론의 집합이다. 전통은 고리타분해 보인다. 당장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장애물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전통을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전통이 전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효과 내지는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를 법에 대해서도 적용해볼 수 있다. 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설령 다소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하루아침에 졸속으로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 모든 국민이 법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법을 악법이라 손가락질하며 함부로 뜯어고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은 집주인들을 혼쭐내주겠다며 임대차 3법(계약갱신청구권제·전월세상한제·전월세신고제)을 밀어붙였다. 그 뒤 전세가가 폭등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월세를 택하는 사람이 늘었다. 법은 보수적으로 만들고 보수적으로 시행하며 보수적으로 개정해야 하는, 보수의 보루와도 같다.

법의 보수성은 대한민국 같은 법치주의 후발국에서 묘한 맥락을 지니게 된다. 선진국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법과 제도를 이식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진보적 의제를 앞세우는 법률가는 해외 사례를 참고하거나 외국의 법을 이식해오는 것 자체에 불만을 품곤 한다. 허나 법은 온 국민에게 동시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이며, 한번 만들면 쉽게 되돌릴 수 없다. 다른 나라의 법을 참고해 우리의 법을 만드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전통과 법치. 보수주의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은 보수주의 중에서도 문화적 보수의 영역에 가깝다. 반면 법치는 경제적 보수가 선호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영국처럼 자국의 문화와 법치주의의 역사가 단절 없이 지속된 경우라면 양자의 차이가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처럼 식민지 시대를 겪고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근대화가 시작된 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보수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만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한 템포 쉬어가는 차원에서 소설의 한 대목을 읽어보도록 하자. 소설가 박완서가 쓴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는 제목의 단편이다.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의 6권, '그 여자네 집'의 136쪽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조강지처 대접 하나만은 깍듯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다니던 경전(京電)을 해방 후 한전이 된 후에도 눌러서 다녔는데, 당시로서는 안정되고 대우도 괜찮고 가욋돈도 생기는 꽤 좋은 직장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직장 근처에 딴살림을 차리고도 월급봉투 하나만은 한 푼도 안 건드리고 큰집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실하고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월급봉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오래 누리진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사회를 정화한답시고 관청이나 국영기업체에서 축첩한 자는 자진해서 사표를 쓰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상습적인 바람둥이들도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그럭저럭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는데 아버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소실을 두고 있다는 건 사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엄포가 내린 이상 실적을 올려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전후 맥락이 없어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 자신이 본처라는 사실을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던 어머니. 남편은 월급통장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고 아내는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건 군말 없이 살림을 하는 유교적 가부장제 모델을 구현하며 살던 부부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균형이 일순간 뒤흔들리고 만다. 왜? 근대적·서구적 법치주의에 기반 한 일부일처제를 강요하는 권력자, 박정희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처첩제는 1948년 해방과 함께 폐지된 상태였다. 법이라는 것은 그저 만들었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 법을 집행하겠다는 행정부의 의지, 법에 따라 판결하겠다는 사법부의 단호한 태도가 뒷받침돼야 제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난 후 남자가 여자보다 부족한 여초현상이 벌어지면서 경제력을 지닌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첩을 거느리는 풍조가 일반화됐다.

위에서 인용한 박완서 소설의 한 장면은 바로 그런 세태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 해방된 조국, 현대 국가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은 전근대적 조선시대를 벗어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요컨대 보수주의의 두 축 중 하나인 전통의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반면 또 다른 축인 법치는 달랐다. 많은 경우 우리의 법은 선진국의 법을 베껴온 형태였다. 그 덕분에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했고 여성 인권이라는 대의에도 잘 맞았다. 그리하여 박정희가 '있는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자 이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첩을 거느리고 살던 남자들의 머리 위로 별안간 불호령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왜 그런 짓 감행했을까

앞서 말했듯 당시에는 남자가 여유가 되면 첩을 두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50·60대는 노인으로 간주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축첩을 단속하는 것은 그런 남자들에게 환영받을 일이 전혀 아니었다. '20·30대 민심'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일부 여성들도 반발했다. 소설을 다시 읽어보자.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다냐?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로 인해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정희를 미워하였다."

대체 박정희는 왜 그런 짓을 감행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축첩을 금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득이 됐기 때문이다. 첩을 거느리는 소수의 남자들, 그리고 졸지에 실업자의 아내가 된 소설 속 '어머니' 같은 일부 여성은 반발했을 것이지만 대다수의 남녀에게 축첩제는 옳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혼의 커트라인이 더 높아지는 일이요,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첩이 되는 것은 법적으로 불안정한 지위에 묶인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전통과 법치는 때로 갈등한다. 전통은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법치는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처럼 선진국의 법과 제도를 도입한 후발주자 국가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시대에 뒤떨어진 법 때문에 여성이 고통 받는 일도 흔하지만, 시대가 법을 따라오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 역시 흔히 발견된다. 그럴 때, 보수의 핵심인 법치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보루가 된다. 여성들은 사회를 통째로 들어 엎고 바꾸자고 요구하는 대신, '있는 법이나 잘 지켜라'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여성 인권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가 간통죄 처벌 조항이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사진은 이날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오른쪽)과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관(왼쪽) 등이 선고를 위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 [동아DB]
여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법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벌어지기도 한다. 2015년 폐지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간통죄가 대표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간통죄가 고리타분한 부부간의 정절 의무를 지켜주는 '꼴통 보수'의 가치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1953년 제정될 당시 간통죄는 가족의 가치와 여성의 인권을 동시에 지켜내는 것을 목적으로 뒀다. '보수주의 페미니즘'이라는 형용모순의 목적을 추구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1905년 대한제국 시절 제정된 정조법(貞操法)을 대체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조법은 간통을 저지른 유부녀와 상간남을 처벌할 뿐이었다. 아내가 있는 남자가 미혼 여성과 불륜을 저지를 경우 처벌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여성의 성은 가정의 울타리에 묶어놓고 남성의 성은 처벌하지 않는, 사실상 '축첩보장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전통만 앞세웠지 법치의 합리성과 균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격론 끝에 국회는 단 한 표 차이로 쌍방처벌을 전제로 한 간통죄를 통과시켰다.

1953년 간통죄 제정은 그런 면에서 여성주의의 승리이자 보수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전통이 여성을 억압하는 퇴행적 기능에 머물고 있을 때, 법치가 앞장서 '가족'이라는 가치를 보호하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후로도 간통죄는 꾸준히 논란이 됐고, 결국 20세기 중반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앞장서 비판하고 폐지했다.

가장 보수적인 법학자들이 앞장서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 제정에 나선 사례를 우리는 이것 말고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것, 그 자명한 법치주의의 원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하고 든든한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주의가 제 기능을 해야 여성주의 역시 공허한 담론이 아닌 현실을 바꾸는 법과 정책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왼쪽)와 이수정 당시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경기대 교수)이 2021년 1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용호 무소속 의원 입당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둘이 우결 찍느냐"

윤석열의 메머드급 선대위가 해산되면서 신지예뿐 아니라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 역시 자동적으로 공동선대위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두 영입 인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안 좋은 모습으로 쫓겨나게 된 점은 실로 애석한 일이다. 보수주의와 보수 정당이 페미니즘과의 관계를 건설적으로 재구축할 드문 기회를 소진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수정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여성 인권을 지키기 위해 경찰과 공권력의 치안 유지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범죄 전문가다. 여성을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 진영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수정의 영입을 통해 보수는 여성주의의 일부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신지예의 경우는 더욱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여러 차례 방송에 함께 출연한 사이다. 이준석이 먼저 나섰다면 어땠을까. 끝없이 치닫고 있는 남녀 간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문화적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신지예의 새시대위원회 합류가 결정된 후 일부 인터넷 사용자들은 "둘이 우결(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 찍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농담이 어떤 식으로건 현실화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여러모로 상황이 나았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로 향했다.

‘이대남의 마음을 잡아라!' 이런 지상 과제에만 몰두하는 것은 당장의 선거 전략으로 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 보수 정치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여성주의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끌어안는 건강한 보수 정치의 출현을 기대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2-01-02

공수처 저인망式 민간인 사찰, 도청과 다르지 않아

 [노정태의 뷰파인더] '검찰개혁'한다던 '아마추어'와 신종 감시사회

● 개별 통화 모아놓으면 패턴이 나온다
● 구체성 빠진 공수처의 ‘나쁜 사과문’
● 이성윤 공소장 단독보도와 연관성
● 법원은 어떤 근거로 영장 내줬나
● 공수처에 ‘격려 우선’이라는 박범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민간인 사찰’ 의혹에 휩싸인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공수처장)이 2021년 12월 29일 경기 정부과천청사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민간인 사찰’ 의혹에 휩싸인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공수처장)이 2021년 12월 29일 경기 정부과천청사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가 수백여 명을 대상으로 통신자료 조회를 감행했다. 여기에는 채널A, 중앙일보, TV조선, 조선일보 등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가 여럿 포함됐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CBS 노컷뉴스 등 친여 성향 언론사도 조회 대상에 있다. 하다못해 공수처는 일본 신문사와 방송국이 한국에 파견한 기자 두 명의 통신자료까지 조회했다. 2021년 12월 28일까지 확인된 대상만 해도 173명·287건이다.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2021년 12월 29일 국민의힘은 공수처가 당 소속 국회의원 105명 중 60명의 통신자료를 조회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회의원 보좌진 6명도 공수처의 통신자료 조회 대상이 됐다. 공수처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캠프에서 활동한 김병민 대변인의 통신자료까지 조회했다.

언론사 소속도, 정치권 인사도 아닌데 조회 대상이 된 경우도 여럿 있다. TV조선 기자의 모친, 동생, 다른 기자의 지인, 전직 종합편성채널 기자와 그의 지인, '조국 흑서'(‘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필자인 김경율 회계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을 지낸 김준우 변호사 등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대적인 민간인 사찰이다.

공수처는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및 헌법재판관,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대통령경호처·국가정보원 3급 이상 공무원, 판검사, 경무관 이상 경찰 및 그 배우자와 직계존비속을 수사 대상으로 한다. 기자, 기자의 가족, 변호사, 회계사 등은 당연히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유튜브는 도청할 필요가 없다

여기까지 읽은 어떤 독자가 잠시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유튜브에 접속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독자는 오늘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대학 동창을 만나 새로 출시된 어떤 자동차의 디자인을 칭찬하고, 해외 주식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눈 후 친구가 최근 방문했던 강원도의 어떤 휴양지에 대해 수다를 떨고 돌아왔다.

그런데 유튜브를 켜보니, 세상에. 아까 이야기했던 자동차, 해외 주식, 강원도에 대한 내용이 추천 영상으로 뜨고 있다. 참고로 저 세 가지 화제는 모두 친구가 먼저 꺼냈다. '뷰파인더' 독자는 해당 내용을 단 한 번도 검색해본 적이 없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구글이 무시무시한 기술력을 통해 핸드폰으로 '뷰파인더' 독자와 친구의 대화를 도청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내막을 알기 전까지는 필자 역시 그런 의심을 품었다. 물론 실상은 다르다. 구글이건 애플이건 IT(정보기술) 기업은 스마트폰을 통해 사용자 몰래 대화를 실시간 도청하지 않는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음성 정보를 수집해 텍스트로 바꾸고 맥락상 중요한 키워드를 추출하는 고난이도 작업을 하면 사용자의 핸드폰과 서버에 부담이 생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도청하지 않아도 빅테크 기업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나눈 대화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쿠키를 사용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이 웹서핑을 하면서 수도 없이 접했을 문구다. 대부분 큰 고민 없이 'OK'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웹사이트는 광고 중 무엇을 클릭했는지, 쇼핑몰 사이트에서 어떤 검색어를 입력했는지, 대략 그런 내용을 수집한다. 한 두 개의 사이트라면 사실 그리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도 없다. 개별적으로 떼어놓고 보면 별거 아닌 정보다.

문제는 그 정보를 '종합'할 때 발생한다. IT 기업은 인터넷 검색, 클릭, 페이지 종료 등의 행동을 한데 묶어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욕망하며, 또 궁금해 하는지 면밀히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스마트폰을 거의 24시간 내내 지니고 다닌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내 핸드폰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테크는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하루 종일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튜브는 우리를 도청할 필요가 없다. 최근 자동차, 해외 주식, 강원도 휴양지에 관심이 많았던 사용자 A와 사용자 B가 어떤 카페에서 만났고, 사용자 B가 커피 두 잔 값을 지불했으며, 두 사람이 40여 분간 같은 장소에 있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유튜브는 두 사람이 서로의 관심사를 교환했으리라고 추측한다. A는 B에게 자동차, 해외 주식, 강원도 휴양지를 이야기했다. B는 A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 A와 B의 개인적 관심사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추측은 대체로 맞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 특별한 용건을 주고받거나, 그렇지 않거나, 아무튼 본인의 평소 관심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하게 된다. 구글이나 애플 같은 빅테크뿐 아니라 한국 IT 기업도 마찬가지다. 여러 웹사이트가 수집한 개인 정보를 유통하는 시장이 있다. 그런 경로로 우리의 정보들이 사고 팔린다. 그걸 잘 종합할수록 맞춤형 광고를 내보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도청'이라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 대상으로 저인망식 조회

유튜브 알고리즘의 소름 돋는 추천 시스템을 거론한 이유가 있다. 공수처가 감행한 전 방위적 통신자료 조회 행위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실감나게 느껴보시라는 차원에서다. 이번에 발각된 공수처의 무차별 통신자료 조회는 특정인을 지목한 통신자료 조회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저인망식 통신자료를 조회함으로써, 그들 중 누군가의 통화를 사실상 도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유튜브 도청'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누구와 어떤 장소에서 얼마나 길게 통화했는지, 누가 먼저 걸었는지 따위의 정보는 개별적인 한 두 건으로는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료를 대량으로 모아놓고 분석하다보면 어떤 패턴이 발견될 수 있다.

가령 직장과 집만 오가는 어떤 기혼 남성이 퇴근 후 직장도 집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어떤 여성에게 전화를 하는 패턴이 있다면 어떨까. 당연히 불륜을 의심해볼만 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 여성에게 전화를 한 후, 직후에 한적한 교외의 식당에 전화를 했다면? 그 다음에는 인근 숙박업소에 전화를 걸었다면? 99% 이상의 확률로 그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법하다. 이런 사실을 알아두면 훗날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공수처가 이런 목적으로 통신자료 조회를 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통신자료 조회라는 수단을 통해 긁어낼 수 있는 정보의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될 수 있을지, '탐정의 눈'으로 상상력을 발휘해보라는 뜻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사례일 뿐이다. 공수처가 대체 왜 이런 식으로 통신자료를 조회했는지, 그 목적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2021년 12월 28일 현재까지 공수처는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많은 이들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공수처는 "수사 중인 피의자의 통화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것뿐이며 적법 절차에 따랐다"며 구체적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논란이 커지자 "과거의 수사 관행을 깊은 성찰 없이 답습하면서 기자 등 일반인과 정치인의 정보 조회 논란을 빚게 돼 매우 유감"이라는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도 않고, 잘못을 어찌 시정할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나쁜 사과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세 가지 의문

김진욱 공수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2021년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감사원, 법무부,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제처, 공수처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박범계 법무부 장관(왼쪽)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통신자료 조회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개별 웹사이트에서 쿠키를 수집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 사실상 유튜브가 우리를 도청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을 염두에 두고 그 주변인의 통신자료를 샅샅이 훑는 행위는, 문제의 특정인이나 집단의 전화 통화를 직접 도청하는 행위에 버금간다. 요컨대, 군사독재 시절에나 했을 법한 대대적인 민간인 사찰이 자행됐다.

세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공수처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비판적 보도를 한 기자들을 뒷조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앙일보 21명, 조선일보 12명, TV조선 12명 등 수십여 명의 기자를 상대로 한 통신자료 조회를 놓고 보자면 그렇다. 중앙일보는 이성윤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의 공소장 내용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해당 보도에는 조국 당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법무부를 통해 "불법 출금 혐의 수사를 하지 말아 달라"라고 수사팀에 전달했다는 내용도 있다. TV조선은 이성윤이 관용차를 타고 공수처 조사를 받으러 오는 이른바 '황제조사' 영상을 보도했다. 그 외에도 100건이 넘는 통신자료 조회가 이뤄졌다. 과연 무엇을 위한 조회였는지, 공수처가 해명을 내놓지 않는 한 명확한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대체 무슨 혐의로 일부 기자들에 대해 영장까지 청구했는가. 공수처는 TV조선 기자 2명과 중앙일보 기자 1명, 전직 종합편성채널 기자 등 최소 4명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통신영장을 발부받아 통화 내역을 들여다봤다. 이들은 모두 민간인 신분이다. 영장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사를 하고 있으며 어떤 목적으로 해당 정보가 필요한지 법원에 소명해야 한다. 영장을 청구한다고 반드시 내줄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법원은 영장을 발급해줬다. 어떤 판사가 무슨 근거로 민간인 사찰을 허용한 것인지, 국민은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셋째, 이 끔찍한 '아마추어 공수처'를 옹호하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2021년 12월 26일 KBS에 출연한 박범계는 "공수처는 축구팀으로 따지면 창단된 신생팀"이라며 "부족하다면 보충해주고 격려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국의 수사 기관을 축구팀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통신자료 조회에 대해 '격려해 달라'고 국민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황당한 소리다. 이쯤 되면 공수처 만의 문제가 아니다. 법무부, 더 나아가 대한민국 법치주의와 사법 시스템 전체의 문제다.

놋수저와 바꿔먹은 엿 같은 조직

2017년 11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수처설치법’ 제정 관련 당정청 회의에 조국 당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오른쪽)이 참석한 모습.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긴 말이 필요 없다. 공수처는 해체돼야 한다. 애초에 그 탄생 과정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나면 대다수 헌법학자와 형법학자들이 반대하던 사안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을 따돌리고 정의당을 중심으로 한 군소야당들이 더불어민주당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가위 소리를 듣고 따라가 귀중한 놋수저를 내주고 바꿔먹은 엿 같은 조직이 바로 공수처다. 우리는 감시사회의 문턱 앞에 서 있다. 2022년 새해다. 공수처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자.

#공수처 #통신조회 #민간인사찰 #감시사회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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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6

‘설강화’ 보이콧…이것은 민주화가 아니라 ‘民主독재’

[노정태의 뷰파인더-64] 새로운 금기와 뒤집어진 레드 콤플렉스

● 청와대 국민청원 대상 된 드라마
● 로맨스 위한 고전적 설정이거늘…
● 안기부 야쿠자 취급하는데 독재 미화?
● 이른바 ‘역사의식’ 녹이려 애쓴 흔적
● 민주화 운동 신성시한 태도의 결과
● 업적이지만 성역은 아닌 산업화·민주화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2월 18일 첫 방송된 JTBC 드라마 ‘설강화’의 포스터. 이 드라마는 시놉시스가 유출된 지난 3월부터 이른바 ‘민주화 운동 폄하 논란’에 휩싸였다. [JTBC 제공]
JTBC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지난 3월 시놉시스가 유출돼 이미 ‘민주화 운동 폄하 논란’에 시달렸던 ‘설강화’는 우여곡절 끝에 12월 18일 첫 방송됐다.

비판의 목소리는 쉽게 잦아들지 않는 기세다. 네티즌의 항의를 받은 협찬 기업들은 광고를 거둬들이고 있다. ‘설강화’ 방영을 중단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12월 22일 현재 30만 명 넘는 이들이 서명했다. “민주화운동과 간첩, 안기부를 엮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가해”라며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 또한 반발하고 있다.

논란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12월 21일 ‘설강화’ 논란과 관련해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정의로운 안기부,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 마피아 대부처럼 묘사되는 유사 전두환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면 오히려 문제”라며 “창작의 자유는 역사의 상처 앞에서 겸허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방영을 중단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느 편’에 있는지는 혼동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신선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기법
주인공인 남파공작원 임수호(정해인)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 [JTBC 제공]
원고를 쓰기 위해 막 국내에 진출한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플러스’를 이용해 ‘설강화’ 1~2화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끝날 무렵, ‘설강화’ 논란에 대해 나는 또렷한 입장을 세웠다. 작품에 대한 호오(好惡)와는 별개로, 현재 쏟아지고 있는 숱한 ‘역사왜곡’ 논란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간략하게 줄거리와 배경을 살펴보자. 1987년 봄, 군부독재의 끝을 향하고 있는 대한민국. 고위층은 다가올 대선을 준비 중이다. 안기부는 북한과 짜고 대국민 사기극을 치려 한다. 야당 대선 후보의 경제 브레인인 한이섭 교수를 납치해 북한에 보낸 후,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공개하는 북풍 공작을 기획한 것이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남파공작원 임수호(정해인)는 한이섭을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안기부 대공수사1국 팀장 이강무(장승조)에 쫓겨 호수여대 기숙사로 숨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수호는 이전에 기숙사 ‘방팅’에서 만났던 은영로(지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기부의 눈을 피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맨스를 뽑아내기 위한 고전적 설정이다. 연인 사이에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세워놓음으로써 서로 안달하게 하고 애타게 하며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장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가 원수인 가문의 자식들이다.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는 신분의 차이가 있을 뿐더러 눈이 맞았더니 초호화 유람선이 침몰한다. 이미 방영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재벌 2세 패션산업가인 여자 주인공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고를 당하고, 그곳에서 북한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북한이라는 금기를 로맨스의 장애물로 활용하는, 솔직히 이제는 신선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왜 ‘설강화’는 이전과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앞서 인용한 심상정의 말을 다시 짚어보자.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정의로운 안기부,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 마피아 대부처럼 묘사되는 유사 전두환.” 모두가 문제고 잘못됐다고 심상정은 언급했다. 글로 써놓고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비판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

심상정의 비판을 반박한다!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수호는 한국에서 독일 베를린대 경제학과 대학원생이라는 위장 신분을 지니고 있다. 단, 영로는 수호가 시위를 하다가 다치고 경찰에게 쫓겨 들어왔다고 오해하고 있으며 수호는 그런 오해를 바로잡아주지 않는다. 간첩이 나오고 학생운동이 나오는 것도 맞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은 모두 간첩들이 조종한 꼭두각시놀음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의 민주화 운동 폄하나 비하와는 무관하다. 민주화 운동을 얼마나 신성하게 여기고 있느냐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청와대에 방영 중단 국민청원을 할 사안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피아 대부처럼 묘사되는 유사 전두환.” 아닌 게 아니라 시놉시스가 유출됐던 지난 3월, 인물 설정 및 캐스팅된 배우들의 이름값으로 인해 ‘군사 독재 미화’라는 비판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를 보면 군사 독재 미화는커녕 극히 비판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안기부장 은창수(허준호)와 여당 사무총장 남태일(박성웅)은 ‘동심회’라는 육군사관학교 사조직에 속해 있다. 1화 초반에 동심회 창립 30주년 기념회 장면이 등장한다. 마치 야쿠자처럼 손에서 피를 내어 술잔에 섞고 마시는 모습이 연출된다. ‘너는 일본 야쿠자 같은 놈’이라면 한국인끼리 할 수 있는 욕 중 가장 수위가 높은 것일 터. 시작하자마자 ‘동심회’와 안기부 등을 일본 야쿠자 취급하는 드라마를 ‘군사 독재 미화’라고 비난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정의로운 안기부.” 안기부 직원인 이강무가 간첩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열혈 형사’처럼 그려지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1화와 2화를 아무리 뒤져봐도 딱히 정의로운 인물처럼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현장에서 뛰는 안기부 직원들 또한 역사와 권력의 희생양으로 묘사되고 있다. 윗선에서 북한과 내통하고 한이섭을 북에 넘기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 한이섭을 납치하러 온 수호를 추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간적인 공감과 동정을 표할 수 있는 캐릭터이긴 하나, ‘정의로운 안기부’라고 요약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 이건 제작진 입장에서 퍽 억울할 것 같다. 영로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운동권 학생 여정민(김미수)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1화. 기숙사 식당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지면서 정민이 들고 온 만화책 ‘공포의 외인구단’의 표지가 벗겨지고, 곧 레오 휴버먼의 책 ‘사회주의란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영로는 용기를 내어 자기가 그 책을 수습하고 너스레를 떨어 위기를 모면한다.

“‘넌!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이건 하늘의 뜻이자 엄지의 뜻이다.’ 이건 야구만화가 아니라 순정만화라니까.”

시대적 고민이 ‘있는’ 대학생의 모습은 이후로도 꾸준히 묘사된다. 1화, ‘방팅’에 수호를 끌고 온 광태는 행정고시에 1차 합격한 자신이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 거라고 수다를 떠는데, 그 와중에 생경한 이름이 등장한다.

“아이, 물론이지. 밑바닥 인생들이나 사랑 하나 보고 결혼 하는 거지. 지배계급은 전적으로 경제적 타산 여하에 따라서 결혼이 결정된다고 본 사람이 엥겔스야.”

2화 초반, 기숙사에 숨어들어온 수호를 추적하는 안기부 직원들은 간첩이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같은 방 친구들은 겁을 먹지만 정민은 말한다. “간첩, 짭새들 맨날 하는 소리야. 걸핏하면 우리 빨갱이로 모는 거 몰라?” 그렇게 숨어 있는 수호에게 영로는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오빠가 데모하다가 강제징집당해서 휴가를 많이 나오지 못하는 처지라고 말이다.

또 다른 레드 콤플렉스가 보여준 희극
1987년 민주화항쟁 당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에서 학생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동아DB]
물론 ‘설강화’는 로맨스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기에 이러한 ‘시대적 아픔’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 깔아두고 있는 요소만 놓고 보더라도, 픽션의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이른바 ‘역사의식’ 내지는 ‘균형감각’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화까지의 내용을 놓고 볼 때 그간 쏟아진 비난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신성한 민주화 운동 앞에 어딜 감히 ‘간첩’이라는 말을 내미느냐, 이런 식의 권위주의적인 역사관을 전제하지 않은 다음에야, 납득하기 어려운 비난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 있다. 민주화 운동을 신성시하는 태도가 ‘설강화’ 논란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은 ‘간첩 청정 지대’였나? 북한으로부터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고 다만 민주화를 꿈꾸는 청년들의 순수한 열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나?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고 피해를 입은 역사와는 별개로, 그 학생운동권 중 적잖은 이들이 북한에서 송출하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학습’을 하고 ‘지령’을 받았던 것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아닌가. ‘감히 신성한 민주화 운동 앞에서 간첩이라는 말을 꺼낸다니’라는 식의 반응이야말로 ‘역사왜곡’이다.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은 일종의 뒤집힌 레드 콤플렉스라고 볼 수 있다.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지목해 고초를 겪게 했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이제는 ‘신성한 민주화 운동에는 간첩이라는 말을 감히 꺼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또 다른 금기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12월 21일에는 한 네티즌이 ‘설강화’의 작가와 감독이 간첩을 미화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민신문고를 통해 고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설강화’ 논란이 거울에 비춘 또 다른 레드 콤플렉스임을 이보다 더 희극적으로 보여줄 수가 없다.

20세기의 반공물은 공산당을 머리에 뿔 난 악마로 그리고 우리 편 국군은 아무런 흠결도 인간적 고뇌도 없는 인물처럼 묘사했다. 그런 시대는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는 군사독재 세력은 덮어놓고 극악한 집단으로 취급하며 민주화 세력은 날개 없는 천사처럼 그려야만 하는 세상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화된 사회가 아니라 ‘민주독재국가’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심상정을 비롯해 ‘설강화’를 비난하는 사람들, “창작의 자유는 역사의 상처 앞에서 겸허해야 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레드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손에 그 칼을 쥐고 휘두르고 싶은 것인가.

세계사적 기적의 두 얼굴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출발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세계사적 기적이다. 문제는 그 기적의 두 얼굴 모두 완벽하지도 결백하지도 않다는 데 있다. 우리의 산업화는 미군정 시대에 몰수한 이른바 ‘적산재산’과 한일협정을 통해 일괄 처리된 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상금을 밑천으로 삼았다. 경제가 성장했지만 그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일하다가 죽고 다치고 빨갱이로 몰렸으며 노동운동도 탄압 당했다. 즉 산업화의 이면에서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

산업화의 그늘은 198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히 논의돼 왔다. 산업화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업적이지만 ‘성역’은 아니라는 소리다. 같은 원리가 민주화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민주화는 더욱 민주적으로, 공개적으로, 사실에 입각해 논의돼야 하는 우리의 역사다. ‘설강화’ 논란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설강화 #민주화 #산업화 #레드콤플렉스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