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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여아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주겠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물론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은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현되는 한 양상이며,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여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 더 원론적인 차원으로 논의를 끌어가보자. 과연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은 '정치'의 고유 권한, 말하자면 공천권 같은 게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올바른 정치의 '결과'다.

정치공학적인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말해보자. 오픈프라이머리가 됐건 국민공천단이 됐건 그것은 모두 원칙적으로 당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애초에 당원들에게만 공천투표권을 준다면 역선택을 우려할 필요도 없고 안심번호 같은 기술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의 의사 결정이 정당정치의 기본 원리에도 잘 부합한다.

그러나 여당 야당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각 계파마다 원하는 결과에 제도를 뜯어 맞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만 현재의 논란이 제대로 보인다. 정당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물적,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하되, 정작 그 후보는 일부 당원을 포함한 '국민'들의 공천투표를 통해 결정된다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당비 내는 진성당원 같은 걸 하겠는가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것은 서로 정치적 계산이 뻔히 서 있는 상황에서, 말하자면 '명분'을 끌어들이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빌미로 제공된 명분 그 자체다. 다시 원래의 문제 제기로 돌아가보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저 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1)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누구인가?
2)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정치'란 무엇인가?
3)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돌려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지금처럼 공천권 싸움을 하면서 '국민'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받을 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정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동원되지 않는 한 공천투표권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재벌 총수부터 서울역 앞 노숙인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 아니다. 내년 총선 출마 지망생, 정치적 변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정치 고 관심층 등이 포함되는 협의의 개념일 뿐이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허위다. 왜냐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천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정치에서 아주,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공천권의 배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 내부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나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공정한 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대선 결과에 따라 삶의 이해관계가 180도 달라지는 그런 삶을 사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권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기업 사원이거나, 공무원이거나, 대선 테마주를 매입했거나, 언론사 직원이거나, 여러 사례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전체 인구 비중을 놓고 볼 때 10퍼센트도 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국민들이 정치권에 원하는 것은 공천권이라던가, 공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아니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셋째, 그렇기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거대한 사기극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권으로 표상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와 직접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치권이 뭔가를 '돌려준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돌려주긴 뭘 돌려준단 말인가. 그런 복잡하고 세세한 정치권 내부의 역학관계에서의 이득은 국민이 받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정치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을 바꿨더니 나라가 더 좋아진다는 결과, 우리 동네 국회의원을 잘 뽑아서 내가 원하는 정책이 실현된다는 그런 결과만이, 정치가 국민에게 약속할 수 있으며 또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런 약속을 흔히 공약이라고 하며, 그 공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치인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공천을 받아서 나오는지 그런 것에 대하여, 국민들 일부의 관심만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 결과, 정작 정치의 결과에 따라 국민 전반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못하다. 더욱 큰 문제는 정치인이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그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대신, 정치권이 정치 내부의 일을 알아서 잘 해결하면서, 대신 국민들에게 정확한 결과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국민들은 정치가 약속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다음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적 대의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소수의 이해관계자 및 정치 고 관심층을 상대로는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 비슷한 무언가가 시행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 그 자체로부터 유리된 채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세력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파행의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전체가 짊어지게 되는데, 그 고통의 배분조차도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대신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치의 결과만을 안져주길 바란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면 국민들은 해당 정치 세력을 계속 지지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팽개칠 것이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원론이야말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검증된 유일한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이 아니라 양당이 경쟁하는 총선에서 내 투표권을 행사하여, 내가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지키고 싶다. 그 밖의 논의는, 적어도 내게는, 그저 '지들끼리 치고 박는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수많은 국민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공천권이 아니라, 올바른 후보를 찍어서 발생하게 될 정치의 결과 뿐이다. 그래야 국민도 정치에 올바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본질적 내용을 도외시하는 정치 개혁 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2015-07-15

미각의 제국, 엄마라는 식민지

1.

나는 황교익이 내게 "자유기레기"라는 폭언을 퍼붓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수요미식회'에 출연하기도 전의 일이다. <미각의 제국>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책을 꺼내놓고 뒤적거리며, 최근의 논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여본다.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읽고, 나는 경향신문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경향신문, 2015년 7월 13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나는 황교익의 칼럼이 '어머니즘'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맞벌이 여성'들에게 무심하고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내 칼럼에는 그 내용만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황교익은,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지 고작 한 시간 가량 지난 시점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물을 올렸다. 자신의 칼럼은 '맞벌이라는 현상이 있었고 그로 인해 80-90년대생들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못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직시했을 뿐,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부추긴 바 없다'고 반론했다.

그 과정에서 "글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레기", "자유기레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였는데, 그러한 표현은 어떤 면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여성차별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또 글로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황교익은 7월 12일자 칼럼에서 맞벌이 여성들의 죄책감을 건드린 게 맞다. 그 내용은 지난 블로그 게시물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좀 더 넓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2.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①어머니가 자식에게 먹이는 음식만큼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②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이런 애착은 어머니가 부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곁에서 매일 먹을 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③아내의 음식도 그럴 것이다.(94쪽, 원문자와 강조는 인용자)

<미각의 제국>의 서른한번째 항목 "아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과연 그럴까?

①에 대해 우선 생각해보자. 저 문장은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므로,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정성스럽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사례 나열식 반박을 하지는 않겠다. 황교익의 칼럼이 SNS에 등장한 후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맛없고 이상한 음식'을 토로하는 작은 축제가 벌어졌었다는 사실만 기록해 두기로 한다.

①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개념상 여성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데 있다. 성차별이라고? 저것은 어머니의 음식과 사랑을 찬양하는 말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도 성차별이다. '적대적 성차별'이 아닌 '호의적 성차별'이란 말이다.







어머니나 부인의 역할, 특히 가사 노동에 대해 과도하리만치 상찬을 쏟아붓는 것은, 위에서 인용된 트윗에서 말하는 바 "호의적 성차별"에 속한다. 가사 노동은 여자(라기보다 어머니+아내지만 그 외의 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거론되고 있지 않다)의 몫, 그 밖의 것은 남자의 몫, 이렇게 세상을 나누어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차별적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황교익이라는 한 사람의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고, 직접적으로 간섭할 바도 아니며, 이 글 또한 그의 개인사에 대한 어떠한 예단과 평가도 담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해둔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밑줄까지 그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설령 남편이 가계 수입의 전부를 벌어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에서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것은 현대적이고 평등한 가정을 이루는 기본이다.

'성차별'이라는 말이 과도한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차별을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성을 낮춰보는 것 만큼이나, 불필요하게 '숭배'하는 것 역시, 차별의 개념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이다.

아내가 단지 내 미각만 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아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해서 먹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아내가 내 삶의 조정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이 사랑이 부여한 것이다.(95쪽)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나는 지금 황교익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해 그 어떤 예측이나 평가도 하고 있지 않다(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또 밑줄을 그었다. 이 게시물은 그의 책에 담긴 내용의 '담론적 차원'에 대한 평가지, 저자의 '삶'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렇듯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아내'를 신성시하는 목소리 그 자체가 여성 억압의 근원이었음을 지적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모두 떠맡기고 그것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칭송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아이티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고갱의 감상적 시선을 연상시킨다. 혹은, 기왕 황교익이 일제 식민지 시절을 언급하였으니, '조선의 미'를 예찬하던 일본 지배층의 아련한 눈빛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러한 노동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원적 풍경의 일부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하는 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게다가 이러한 전근대적 '어머니-모유-집밥-사랑'의 물신적 숭배, 이른바 '어머니즘'은, 황교익 본인의 과학적 음식 세계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미각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중 한 사람이지만, 도저히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어머니'들은 이상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냥 이상한 요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의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온갖 '효능'에 혹하고, 그러면서도 '설탕 두 숟가락 대신 매실청 세 숟가락 넣기' 같은 비과학적, 비효율적 레시피가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가장 망치고 있는 프로그램은 '여섯시 내고향'이나 '생생정보통'이지 '집밥 백선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자. 모든 식재료를 고추장에 버무리고 튀김옷을 입혀서 '탕수'로 만들어버린다. '생생정보통'이나 'VJ 특공대'에서 나오는 온갖 '맛집'들은 또 어떤가.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황교익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과연 이러한 정보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황교익 본인의 삶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밥'은 바로 저런 TV 프로그램에 휩쓸리고 있다.

요리에 관심 있는 시청자들이 왜 백종원의 '차라리 설탕을 넣어라'에 열광했는지 황교익도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은 것 아닌가? 황교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집밥' 말고, 현실의 '집밥'은 어차피 지금도 설탕투성이다. 단지 '설탕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매실청' 같은, 음식의 향을 더욱 망가뜨리는 변종 식재료를 투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황교익의 '어머니즘'은, 황교익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한식 레시피가 전반적으로 너무 달다'는 황교익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일으켜진 죄책감 앞에서, 대중들, 특히 '집밥'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많은 주부들은, 설탕을 안 넣고 대신 다른 첨가물을 투입하여 단맛을 벌충한다.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단맛이 부족해서 맛없게 느껴지는 집밥을 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몸에 안 좋은 설탕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설탕 범벅인 매실청으로 단맛을 내는, 그런 모순된 사랑 말이다.

황교익 본인이 원하는 '한식의 레시피 변화'를 이끌고 싶다면, '어머니의 밥은 무조건 옳다' 같은 전근대적 도그마를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머니'들이 해주는 '집밥'은, 황교익의 이상 세계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4.

황교익이 꿈꾸는 '미각의 제국'은 '어머니'라는 식민지가 없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그 '어머니'는 일단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자식에게 '집밥'의 맛을 가르치기 위해 출산 후 무려 6년이나 육아 휴직을 하는 그런 어머니이다. 요컨대 돈은 돈대로 벌어오고, 밥은 밥대로 다 차려야 황교익이 말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황교익의 육아 관련 정책 제안은, 앞서 말한 '호의적 성차별'의 예시로서 완벽하다.

제아무리 숭고하다고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한들, 그런 시각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상에나, 6년의 육아휴직이라니, 멀쩡히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여성보다 미취학아동의 '집밥' 입맛이 그렇게나 더 소중한가?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우려면, 일을 쉬는 수밖에 없다. 애 하나 낳으면 6년간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세상에 그 어떤 기업이 미쳤다고 여성 사원을 뽑겠는가? 그 경제적 부담을 모두 국가가 진다면, 국가는 모든 여성들이 취업을 애초에 못 하도록 막으려 들 것이다. 재정적 부담이 엄청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6년 동안 남자들은 승진하고 직업적으로 숙련도를 높인다. 저런 세상에서 여성은 모두 집에서 애 키우다가 애들이 다 자라면, 비숙련노동 허드렛일이나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즘'은, 그 대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선량하고 순박하며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 굳어져버린 차별적 성 역할관이 투영된 인습적 사고다. 나는 황교익이 부디 '어머니즘'을 극복하고, 변화된 현실과 개선된 대중적 인식 속에서, 그가 원하는 바람직한 식탁을 구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임)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늘 밥을 해먹는 그곳이 바로 집이다. 그 집밥이 꼭 '어머니'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체험을 되짚어봐도 그렇다. 논산훈련소에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내가 만든 파스타였다. 냉장고에 있는 아무 재료나 되는대로 썰어 넣고 볶아서, 대충 끓인 면에 대충 볶아 만든, 그런 얼렁뚱땅 파스타. 그게 나의 집밥인 것이다. '자신만의 집밥'을 가진 남성들이 더 늘어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15-06-02

메르스 '괴담', 정보 공개로 맞서라

1.

중동에서 최초로 메르스에 걸려온 사람을 1차 감염자라 하고, 접촉을 통해 그 사람에게 옮은 사람을 2차 감염자, 이런 2차 감염자에게 옮은 사람을 3차 감염자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 1천여 명의 메르스 확진 환자가 있었지만 이 중 3차 감염자는 아직 없습니다. http://news.jtbc.joins.com/html/284/NB10909284.html

이것이 어제까지의 뉴스였다. 오늘, 2015년 6월 2일, 대한민국에서 3차 감염자가 나왔다. 명백히 '세계 최초'로 메르스 3차 감염자를 배출한 것이지만, 모든 언론들은 그저 '최초 발생'이라고만 보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메르스 3차 감염자를 그냥 '최초'라고만 보도하는 모든 언론은, 오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오보를 뿌린다. 정부는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엄중 대처하겠다고 벼르지만, 정작 어제 오전 청와대는 정확한 감염자 숫자마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SNS에는 어떤 병원에서 메르스가 퍼지고 있는지 다양한 '정보'가 떠돌아다닌다.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2.

진정으로 '메르스 괴담'을 줄여나가고 싶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최초 감염자, 중국으로 빠져나간 환자, 그 외 본인이 감염된 상태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움직였던 사람들의 동선을 세세하게 포착하여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괴담'이 더욱 퍼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메르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메르스 그 자체보다 수천배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메르스 그 자체는 잘 옮지 않는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환자와 2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한 메르스의 공기 감염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확진 환자들이 격리되기 전까지 움직였던 동선이 명확하게 파악되고 또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 효과를 생각해보자.


  1.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의료기관을 통해 필요한 처치를 받을 수 있다.
  2.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어렵풋이 겹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2미터 이내에서 직접 접촉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안심할 수 있다.
  3. 그 외 국민들은 불필요하게 '괴담'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이것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메르스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는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알고,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으며, 전국에 의료기관이 배치되어 있는 나라다. 메르스 위기와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바로 그게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부가 볼 때는 '괴담'의 형식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다.


3.

작년 말 에볼라 위기가 서아프리카를 강타했고,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던 의사 한 명이 기니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본인이 에볼라에 안 걸린 줄 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오한과 발열 증상이 나자 스스로를 격리시킨 후 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에볼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옮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서 뭘 했건, 실제로 에볼라를 전파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그가 입국한 이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전부 입수하여 공개했다.

"What the New York City Ebola Patient Was Doing Before He Was Hospitalized"(링크: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23/nyregion/new-york-city-ebola-patient-timeline-map.html?_r=0)를 보자. 과연 이런 정보 공개가 '환자에 대한 조리돌림'을 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환자를 악마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해당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건강 상태를 한번 더 유심히 체크하게 된다. 반대로 그가 있었던 곳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다. 평택을 넘어 대전까지 갔다더라, 무슨 병원이 초토화되었더다더라, 같은 '괴담'이 떠도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 '괴담'을 종식시킬만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도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심하며, 본인이 감염되었다는 의심이 들 경우 적절한 시점에 신고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만약 미 정부나 <뉴욕타임즈>가 '괴담'을 두려워해서 모든 정보를 틀어막는 한국식 대처법을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4.

지금 정부는 국민들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국민들 역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정부다. 왜냐하면 정부는 올바른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단계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까지도 않으면서, 국민들이 퍼즐을 맞춰서 유통시키는 것을 '괴담'이라고 지칭하고 처벌의 의지만 드높이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는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될 태세다. 오늘자 뉴스를 하나 살펴보자.

1일(현지시간) 홍콩 보건당국은 한국인 J(44)씨의 메르스 확진 판정 이후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여행객들에 대한 방역과 검진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발열과 감기 증세 등 메르스와 관련된 어떤 증상이라도 보일 때에는 즉각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해 정밀 검진한다는 방침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4421582

정부의 이유 없고 실익 없는 비밀주의 때문에, 홍콩으로 향하는 모든 감기 환자들이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되어, 아마도 격리 검사를 당하게 생겼다. 대체 왜 정부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가? 홍콩 보건당국 역시 나와 같은 논리를 편다.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는지 공개되면 한국을 여행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해당 병원을 피하라고 알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국발 입국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방역 및 관리 수준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요컨대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 메르스 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수준의 질병 관리 대책을 내놓으면서 '요우커'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펑펑 써주기를 기대한다? 다 틀렸다. 이제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선진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멍청한 권위적 비밀주의가 심지어 경제에도 치명타를 입힐 우려가 크다.



5.

한국 사회는 '확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한다. 병에 걸린 것은, 물론 개인적인 위생의 문제도 있겠으나, 결국은 운이 안 좋은 것이다. 본인에게 유리하지 않은 확률이 실현된 것이다. 불운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나쁜 확률에 걸린 자'를 곧장 '더럽혀진 자'로 인식하고 쫓아내려는 사고방식. 대단히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퍼져 있다. 일단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자. 그래서 개인들은, 본인이 운 나쁘게 뭔가에 걸렸을 경우, 그 사실을 감추려고 든다. 본인이 메르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음에도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 현재 중국에서 격리되어 있는 A씨가 바로 그러한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A씨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회사 생활' 하다보면 눈치 보여서 병가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떡하냐, 메르스는 치사율 40%지만 병가는 치사율 100%다, 같은 이야기가 적잖이 돌아다녔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 사회가 '나쁜 확률에 걸린 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러므로 그 '나쁜 확률에 걸린 자'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원래 그런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눈치 보고 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저 와중에 직장인한테 출장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너희들은 사회 생활의 고통을 알긴 하느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시각에 동참하거나 편승하는 게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힘 없는 약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느냐, 잘못한 것은 위기 대처를 엉망으로 하고 있는 정부가 아니냐, 이런 입장이다. 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현재의 메르스 위기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딱지를 붙여 쫓아내자는 식의 대중적 감정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지만, 개인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는 태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나쁜 확률'에 걸린 사람을 쫓아내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 '나쁜 확률'에 걸렸을 때 자신의 문제를 쉬쉬하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태도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개의 비과학적 태도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6.

일단 국가가 먼저 국민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에 대한 세부적 정보를 제공하라. 그러면 괴담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지금부터라도 모든 신문과 방송을 동원해, 손을 잘 씻고, 눈 코 입을 함부로 만지지 말고,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는 휴지나 손수건으로 가려야 한다고 홍보하라. 손으로 가리지 말고 팔꿈치나 어깨에 기침을 해야 한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손이 많이 닿는 곳은 직접 만지지 않기 위해 유의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계몽'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국민들을 대상화하고, 무시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하층민 취급하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국민들이 질병 전파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노력하여 위생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계몽'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시가 아니라 존중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의 전폭적 긍정이 바로 국민 계몽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를 반추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대체 왜 '보수적 도덕주의'라고 비난받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 하에 올바로 행동하지 않는 한 문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문명을 유지하고 위생과 청결을 지키자는 기본적인 요구가 '보수주의'라면, 나는 위생 관념 없는 비과학적 진보와 단호하게 선을 긋겠다. 그런 '더러운' 진보는 필요 없다.


7.

정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다. 그래야 '괴담'이 잦아들 여지가 생긴다. 그래야 국민들이 스스로 위험한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중화권과 전 세계적으로 실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도, 조금이나마 열린다.

문제는 정부의 권위주의와, 그 권위주의를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진보 진영의 삐뚤어진 세계관이다. 언론은 정부의 권위주의를 이겨내고,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동시에 국민들 역시 '나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무서운 질병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계몽에 나서야 한다.

과학을 존중하는, 인권을 보호하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위생과 청결을 지켜내는,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보자.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자는 말이다. 정부의 전향적인 판단과 세밀한 정보 공개를 다시 한 번 요구한다.

2015-04-09

유승민이 옳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여권에서는 찬반 양론이 갈라진 반면, 야권에서는 대체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편 야권 혹은 진보 지지 성향의 네티즌들로부터는 '그건 어차피 말 뿐이다, 좋은 말 하는 걸로만 치면 박근혜야말로 대단한 진보다'라는 식의 비아냥이 들려오기도 한다. 요컨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대응이야말로 이번 유승민 연설에 대해 나올 수 있는 가장 나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키지 못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하더라도, 어떤 약속을 어떻게 하고 왜 못 지키느냐에 따라 정치인과 정치 세력의 운명이 좌우된다. '그건 그냥 말뿐이다'라는 반응은 값싼 정치 회의주의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정치인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다.

45분에 달하는 연설에 다양한 논점이 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세금과 복지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자. 그 대목을 통해 우리는 유승민의 연설이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얻고 있는지, 반대로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여겨지는 야권은 왜 그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中부담-中복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중략) 中부담-中복지를 목표로 나아가려면 세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무슨 세금을 누구로부터 얼마나 더 거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증세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년간 22.2조원의 세수부족을 보면서 증세도, 복지조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부담은 결국 국채발행을 통해서 미래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비겁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유승민은 중부담-중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증세"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단 증세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부자증세, 법인세 인상 혹은 기존 감면분 철회, 자산세'등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승민의 연설이 야권의 '부자증세'론과 달라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은 국민 전체가 복지 부담을 져야 하며, 그것은 결국 지금보다 높아진 세금이 될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어떤가? '서민 여러분, 부자 증세가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튼 여러분도 세금을 더 내셔야 합니다'라는 진실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4월 8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에 이어, 4월 9일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대표연설이 있었다. 그 내용 중, 앞서 인용한 유승민의 연설에 대응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집중된 조세감면 제도를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국세감면액이 2013년 30조에 달합니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고용 증가,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 전환,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에 대한 지원책으로 조세감면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소득세는 최고세율 구간 설정을 높이고 누진율도 높여야 합니다. 금융과 자본소득 및 재산소득에 의한 고소득에 대해서도 적절한 세금을 부과해야 합니다. 유리지갑이라는 근로소득과 비교해 공평한 소득세 부과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민 중산층 증세는 자제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서민 중산층의 유리지갑을 털어서 세수를 메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문재인이 언급하다시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깎아준 법인세율만 되돌려 놔도, 연 4조6000억원의 추가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연 4조6천억원이 과연 큰 돈인가? 지난 3년간 부족한 세수만 해도 22.2조원이었다. 법인세율을 원상복귀한다 하더라도 약 10조원 가량이 모자란다. 그 돈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물론 부자증세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문재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서구식 복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미국이나 일본 수준의 사회 복지를 이루려면, 우리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들 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증세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전체 국가 인구는 노령화되고 있고, 경제 활동 인구는 줄어들며, 돈 버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돈 써야 할 일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이다. 그리고 유승민과 달리 문재인은, '서민증세'를 전혀 하지 않고도 현재 수준의 복지를 유지하거나 그보다 더 복지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올해 연말정산 파동에 대한 문재인의 언급은 보는 이를 더욱 답답하게 한다. 물론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세 부담이 크게 느는데도 "세율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증세는 아니다"라는 정직하지 못한 주장"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정당하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아는 문재인은, 왜 '월급쟁이 증세' 없이 복지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정직한 태도를 박근혜 정부에게 요구한다면, 스스로도 정직해야 하지 않는가?

연말정산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꾼 것은 대단히 정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소득공제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액공제로 전환함으로써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덜 돌려받고, 낮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경우,

실제로 과세표준 70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했을 경우 소득공제 방식으로는 24%의 소득세율이 적용돼 72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었지만 세액공제 방식으로는 15%의 공제율이 적용돼 45만 원만 환급받는다. 반면 과세표준 12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하면 지금까지는 18만 원을 환급받았지만 이번 연말정산에서는 45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은 '서민증세 반대'를 기치로 삼고 세액공제로 전환된 연말정산에 대해 끝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 기조는 그가 대표연설을 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니 세상에, 과세표준 7천만원 이상인 직장인의 세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과세표준 7천만원인 직장인이 '고소득층'이 아니면 대체 누가 '고소득층'이란 말인가?

문재인의 연설과 유승민의 연설은 같은 달을 가리키는 다른 손가락이다. 하지만 유승민의 손가락이 훨씬 더 곧고, 용기 있게, 그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까지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증세를 피할 수 없다. 적절히 국민의 세 부담을 높히고 그것을 통해 소득재분배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문재인은 바로 그 점에서, 국민에게 사실을 사실로 전하고 설득할 용기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부자 뿐 아니라 서민들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그래야 복지를 더 할 수 있고, 그 이전에 지금 수준의 복지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다. 유승민은 그 사실을 말했다. 문재인은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 두 연설 전문을 다 읽어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윈스턴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 문구를 떠올려보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중의 연설이긴 하나, 정치가 왜 '말'로 하는 일인지, 그리고 정치인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가 거짓말이라면,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복지' 역시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정치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증세와, 그 증세에 따르는 복지일 뿐,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보편복지'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정치권은 국민들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서민증세 없이는 서민복지도 없다. 정치인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고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하다면 증세를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승민은 증세를 이야기한 반면, 문재인은 자꾸 중요한 대목에서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 두 사람의 연설이 불러오는 파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승민이 옳다.

2015-04-02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1.

'이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 아닌가?' 이른바 'KBS 일베 수습'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4월 1일부로 그가 정직원이 되어버린 후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일베라는 이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잘리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의 논의가 드물게 관찰된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안 협회장이 언급한 수습기자가 올린 글은 '생리휴가를 가고 싶은 여자는 직장 여자 상사에게 사용 당일 착용한 생리대를 제출하거나 사진 자료를 남겨서 감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닌 여자들은 공연음란죄로 처벌해야 된다', '밖에서 몸을 까고 다니는 뭐 여자들은 호텔가서 한 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는 내용이다. http://m.segye.com/content/html/2015/04/01/20150401006204.html

이러한 가치관에 KBS라는 조직이 동조하거나,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안주식 KBS PD협회장은 "이 친구가 올렸다는 반성문은 사내 공개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없다. 반성문도 자신의 과거에 썼던 표현에 대해서 '조금 과했다'는 아주 가벼운 반성문이다. 구체적인 반성문은 아니었다고 건너서 들었다. 일종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반성문을 썼느냐?'고 물어보면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우리들 입장이다"고 밝혔다.

자, 이러한 '일베 기자' 논란이, KBS의 입사시험에 있어서 '사상검증'을 강화시킬 것이며, 결국 방향만 다를 뿐 또 하나의 '마녀사냥'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과연 그 우려는 타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베에 혐오발언을 해놓고, 그걸 또 걸린 사람이 입사전형을 통과했다면, 그 혐오발언이 해당 채용 기관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식으로건 신입 선발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걸 정정하는 것이 '사상검증'이 안 되도록 해야 하겠으나, KBS가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방식에 어떤 맹점이 있었고, 그 맹점을 타고 인격의 결함이 밝혀진 구성원이 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드러난 시점에 이미 '이 건으로 인해 KBS 입사시험에 사상검증이 포함될까 우려된다'는 말을 하는 건, 너무 편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시점이 아니다.

지금은 좀 더 보편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가치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쳐나가야 한다. 남들이 다 한 이야기다. '일베를 했다'로 대중의 이목이 쏠렸으면, '생리대 인증' 같은 구체적 여혐 발언의 위험성을 지목하는 식으로 말이다.


2.

문제는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일베'라는 추상적인 기호에는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여성 혐오나 호남 차별 등에 대해, 실은 그리 큰 문제 의식을 절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베'라는 가짜 범주를 넘어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베에 글을 쓰면 일베 형식을 따라야 하고, 일베 형식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 사이트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낙인찍기 = 집단주의 = 히틀러 = 스탈린 = 나빠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베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찍는 낙인'이 현존함을 인정하며, 동시에 '일베라는 낙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거 나 알아 나쁜거야 일베 하는 애들 봤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상 '낙인찍기'에 속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낙인찍기'라고 해서 그냥 '악'이라고만 하지 말고, 질문을 좀 나눠보자.

(1) 그 낙인이 과연 부당한 낙인인가?

(2) '일베 하는 애'가 가치관을 갱신하는데 그 낙인이 도움이 되지 않나?

(3) 제3자들에게도 유익한가?

첫째, 일베에서 활발한 사용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그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화법인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나쁜' 낙인이라면, 그것은 그 사이트의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고, 사용자가 그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노력하여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일베는 나쁘다'는 낙인은, 당연히 '일베'를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혐오발언과 차별적 사고방식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비공식적'인 곳에서 늘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으며, 그 모든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단어가 바로 '일베'가 되었다. 여기서 '너는 일베'라는 말이, 그저 '딱지 붙이기'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나는 일베를 했다, 나쁘다'라는 죄책감을 느낄 때, 비로소 스스로의 행동을 다잡고 보다 여성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시민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베'에 무슨 미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하다. 여성차별과 호남차별이다. 그것을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점점 도외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악'을 지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무엇도 '악'이 아니라면, '선'을 지킬 수도 없다. 일베에는 이론의 여지 없이 '악'으로 취급될만한 여성혐오와 호남혐오가 득시글거리는데, 대체 무슨 '선'이 있는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 그 거대한 악을 포괄하는 이름을 '일베'라고 하는 것, 그래서 '타자화'의 효과를 불러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난받을 소리를 하며 즐기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뭉친 자들을, 왜 '악'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가?


3.

당연히 '일베가 안 되면, 오유도 잘라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근심하는 행위가 가능한 시점은 진작에 지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답을 말하자면, 일베가 아니라 오유를 하더라도,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다면 당연히 문제시될 수 있다. 특히 민간 기업도 아니라 국민 전체의 세계 인식과 언어 생활 등을 책임지는 공영방송 KBS의 기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안에서 굳이 '일베'라는 이름을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 과장된 결벽성, 그것은 양비론으로 향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묻자. '낙인찍기'는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일단 낙인을 찍어야만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요구되는데, 그러한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내어 붙이고, 그 라벨을 갱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낙인찍기가 자기 객관화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를 한다면 스스로에게 찍혀있는 낙인을 응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남자다. 그런데 내가 '한국 남자'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이러저러한 악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런 범주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 거기에 속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근본적으로는 탈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나는 한국 남자 아니거든?' 이라고 우겨봐야,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나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하물며 '일베 회원'이라는 것은 벗어던질 수 있는 정체성이다. '나 아이디 지웠어요' 뭐 이런 인증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베 회원'이라는 범주가 갖는 불명예스러운 요소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노력한다면, 나중에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너 일베 하냐?' 같은 말을 손쉽게 '폭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점에서, 오히려 본인들이 지향하는 '일베 회원의 정신적 교화'를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기독교적인 참회와 속죄가 가능할 게 아닌가.


4.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평가와 반성이 끝난 것 같고, '여성가족부'도 있으니 페미니즘은 완성된 것 같고, 그래서 다들 알아서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쓰면 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또 법적으로 제재되어야 할 수많은 사안들이 존재하며, 그 각각은 너와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죄책감을 통해 유지된다.

'일베'를 무조건 타자화하지 말라는 속 편한 소리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것인지, 혹은 더 이상의 퇴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가 '일베의 타자화'를 걱정할 때인가? 그들로 인해 타자화되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들은 걱정되지 않는가?

'일베에서 '생리대 인증' 같은 소리 하다 걸려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한국 사회에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 발언을 유포하던 일베 회원이 공영방송 KBS의 기자직을 수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2014-12-11

폭발물, 터지지 않은

12월 10일 밤에는 '폭탄 테러'로 보도가 되었지만, 다음날인 11일이 되자 "폭죽용 고체연료" 같은 창의적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고등학생이 다양한 인화성 물질을 모아 도시락통에 넣어, 전북 익산 신동성당 예배실에서 진행중이던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 현장에서, 불을 붙인 후 투척한 사건에 대해 지금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사고 당시에는 '폭탄 테러'였는데, 어느새 "폭죽용 고체연료" 투척 사건으로, 슬쩍 표현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사안의 중요성을 은폐하고, 명백한 폭탄 테러를 마치 불장난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저러한 보도 경향 이면에는, '폭발물'에 대한 대법원의 납득하기 어려운 판례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법원 2012.4.26, 선고, 2011도17254판결을 살펴보자. 피고인은 "①유리꽃병 내부에 휴대용 부탄가스통을 넣고 ②유리꽃병과 부탄가스 용기 사이의 두께 약 1㎝의 공간에 폭죽에서 분리한 화약을 채운 후, ③발열체인 니크롬선이 연결된 전선을 유리꽃병 안의 화약에 꽂은 다음 ④전선을 유리꽃병 밖으로 연결하여 타이머와 배터리를 연결하고, ⑤유리꽃병의 입구를 청테이프로 막은 상태에서, ⑥타이머에 설정된 시각에 배터리의 전원이 연결되면 발열체의 발열에 의해 화약이 점화되는 구조"(원문자는 인용자)의 물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①에서 ⑥까지의 과정을 쭉 읽어보자. 이건 누가 봐도 시한폭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피고인은 재주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들어 있던 것은 연소될 당시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물품보관함의 열쇠구멍으로 잠시 불꽃과 연기가 나왔으나, 물품보관함 자체는 내부에 그을음이 생겼을 뿐 찌그러지거나 손상되지 않았고 그 내부에 압력이 가해진 흔적도 식별할 수 없"는, 시시한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제대로 터지지도 않고 피식~ 했다는 뜻이다.

자, 이런 걸 만들고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설치까지 한 이 행위는, 형법상 무슨 범죄에 해당하는가?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제119조(폭발물사용) ①폭발물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을 해하거나 기타 공안을 문란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72조(폭발성물건파열) ①보일러, 고압가스 기타 폭발성있는 물건을 파열시켜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에 대하여 위험을 발생시킨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심은 그 '물건'을 형법 제119조 제1항의 "폭발물"로 보지 않고, 대신 제172조 제1항의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보았다. 검찰은 항소하였고,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원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리꽃병 속에 부탄가스 통을 넣고 그 사이의 공간에 화약을 채워넣은 후 제 나름대로 도화선이라고 할 것도 꽂아넣고 시한장치까지 부착했는데도, 그것은 "폭발물"이 아닌 "폭발성있는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제119조 제3항은 "③전 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폭발물을 만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의 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시 이유는 이런 것이다. 형법 제172조가 이미 있기 때문에, 제119조에 해당하는 "폭발물"은 아주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떠한 물건이 형법 제119조에 규정된 폭발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그 폭발작용 자체의 위력이 공안을 문란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고도의 폭발성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폭발물'과 '폭발성있는 물질'의 구분은 폭발력, 즉 "폭발성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폭발시켜서 일부러 사람과 재산을 손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통상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인화성 물질이냐에 따라 그 구분선이 그어져야 마땅하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자동차의 연료통에 담배꽁초를 일부러 집어넣는다고 가정해보자. 휘발유는 만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경우, 한꺼번에 수십 리터의 휘발유가 폭발하므로, "폭발성능"은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나 자동차의 연료통 그 자체는 폭발물이 아니다. 그것은 폭발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형법 제172조 제1항에서 "보일러, 고압가스"로 '폭발성있는 물건'의 예시를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어지간한 기름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가 폭발하면, 어설픈 사제폭탄을 가볍게 뛰어넘는 폭발성능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보일러나 고압가스 등도 그 자체가 폭발물인 것은 아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사제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례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제 폭탄을 만들고 테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만으로는 형법 제119조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론이 불러오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자.

첫째. (<마스터 키튼> 같은 몇몇 귀중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전문적인 사제폭탄 제조자라고 해도 불발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경우, 그가 만든 폭탄은,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폭발물'이 아니게 되는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느냐가 '폭발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폭탄 테러범의 터지지 않은 폭탄도 형법 제119조에 의해 처벌 가능해진다.

둘째. 이러한 법 해석론은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의 제2조 제3항에서 다음과 같이 "화약류"를 규정한 것과도 매끄럽게 상응하지 못한다. 우리의 법 체계는 이렇게 엄격하게 화약류를 규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모으거나, 만들어낸 폭발물을 왜 '폭발물'로 규정하고 처벌하지 않는가?

     1. 화약

        가. 흑색화약 또는 질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나. 무연화약 또는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다. 그 밖에 "가"목 및 "나"목의 화약과 비슷한 추진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2. 폭약

        가. 뇌홍·아지화연·로단염류·테트라센등의 기폭제
        나. 초안폭약·염소산칼리폭약·카리트 그 밖의 질산염·염소산염 또는 과염소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다. 니트로글리세린·니트로글리콜 그 밖의 폭약으로 사용되는 질산에스테르
        라. 다이나마이트 그 밖의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마. 폭발에 쓰이는 트리니트로벤젠·트리니트로토루엔·피크린산·트리니트로클로로벤젠·테트릴·트리니트로아니졸·핵사니트로디페닐아민·트리메틸렌트리니트라민·펜트리트 및 니트로기 3 이상이 들어 있는 그 밖의 니트로화합물과 이들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바. 액체산소폭약 그 밖의 액체폭약
        사. 그밖의 "가"목 내지 "바"목의 폭약과 비슷한 파괴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3. 화공품

        가. 공업용뇌관·전기뇌관·총용뇌관 및 신호뇌관
        나. 실탄(실탄;산탄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 및 공포탄(공포탄)
        다. 신관 및 화관
        라. 도폭선·미진동파쇄기·도화선 및 전기도화선
        마. 신호염관·신호화전 및 신호용화공품
        바. 시동약(시동약)
        사. 꽃불 그 밖의 화약이나 폭약을 사용한 화공품
        아. 장난감용 꽃불등으로서 행정자치부령이 정하는 것
        자. 자동차 긴급신호용 불꽃신호기
        차. 자동차에어백용 가스발생기

2012년에 나온 대법원의 이 판결은 매우 실망스럽고 또 우려스럽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시민들은 테러의 공포와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미국에서 누군가가 압력밥솥을 이용해 사제폭탄을 만들어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때도 일부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럼 그건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인가? 멀쩡히 테러범에 의해 제작되고 현장에 배치되었음에도?

하지만 일부러 폭탄을 만드는 자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입법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법문 해석상 그 의도는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대법원은 '폭탄은 터져야 폭탄'이라는, 법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상식에도 어긋나는 판례를 내놓고 있다.

폭발물은 터뜨리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제작된 물건이다. 그래야 한다. 제대로 터졌냐 안 터졌냐는 '폭발물'을 판단하는 기준일 수 없다. 그래야 이른바 '백색 테러'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게 될 '적색 테러'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안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책임 있는 수사와, 검찰의 뚝심 있는 공소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추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12일 오군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발성물건파열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범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옳지 않은 판례가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런 것이다.

2014-08-25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1. 8월 23일, 송희영 칼럼 "국가와 싸우는 국민들"

8월 23일, 조선일보 주필 송희영의 칼럼이 게시되었다. 제목은 "국가와 싸우는 국민들". 그는 미국의 핵 물리학자 리원허(李文和)가 간첩 혐의로 FBI에 체포되었던 사건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리원허 박사는 중국에 핵무기 정보를 몰래 제공한 것 외에, 59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것은 FBI의 잘못된(아마도 '기획'된) 수사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무죄가 선고되었고 "FBI의 잘못된 수사에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송희영 칼럼 첫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다.

2014년 8월 23일, 한국 저널리즘의 한 풍경. 거대 신문사의 유명 주필이 외국에서 벌어진 무리한 기획 수사 이야기를 꺼내들고, 삼권분립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그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부'의 권한을 셋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는 듯 논지를 끌어간다. 그러면서 결국은 세월호 유족들이 '사회계약을 넘어서는 초법적 권리'를 요구한다고, 전교조 혹은 수많은 노동조합들과 다를 바 없다고, "대통령·국회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골몰한 나머지 정작 계약의 당사자인 다수 국민과 싸우고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딱지를 붙인다.

이제, 세월호 피해자들을 조선일보가 어떻게 몰아가려 하는지, 분명해졌다. 제목에는 '국민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국가와 싸우는 비국민들'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2. 삼권분립 위에 '나랏님' 있다?

잠시 그의 칼럼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송희영은 삼권분립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삼권분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인, '넓은 의미에서의 정부'를 강조한다. FBI가 잘못 수사해서 벌어진 일이지만 리원허가 감옥에 갇혀있던 것에 대해, 보석(保釋)조차 허가받지 못했던 것에 대해,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사과한 것을 두고 그런 논지를 펼친다. "FBI의 수사 실패를 왜 판사가 사과하느냐고 한국인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송희영은 단정짓는다.

교묘한 사실의 왜곡이다. FBI가 엉터리 기소를 했더라도, 법원에서 제대로 그 내용을 간파하고 보석을 허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원허 사건에서 법원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식으로 송희영은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뜻이다. 법원은 법원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과를 한 것이다. "법원이 행정부를 대신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가 한 몸이라는 입장에서 사과한 것"이 아니다.

가령 인혁당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시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 공안조작 사건을 벌여 피고인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18시간만에 형을 집행했다. 이 경우, '사법살인'의 궁극적인 주체는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며 사건을 조작한 중앙정보부지만, 법원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대한민국이 진정 삼권분립을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한다면, 그러므로 그 사과의 주체는 법원과 정부 양쪽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코 한쪽이 다른 쪽의 역사적 사죄를 대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리원허 사건과 그 전개에 대한 송희영 나름의 해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사과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은 리원허가 더 나쁘다. 몇 문단 아래로 내려가보자. 리원허가 자서전에서 "자기 조국(祖國) 미국을 원망했다"며, 여태까지 학교나 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판사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사과했지만 그가 먼저 자기 나라를 등졌기 때문일까"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질문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사실상 협박에 가깝다. 대통령도 사과했고 판사까지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사과했으니, 억울해하지도 말고 그런 내용을 자서전으로 쓰지도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다. 되도 않은 기획 수사에 휘말려 인생이 뒤엉킨 피해자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은 온데간데없고, '나라가 사과했으면 백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봉건적 논리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리원허 사건에서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법원은 FBI의 무리한 기소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말았어야 한다. 설령 기소했다 한들 그를 독방에 가둬두고 보석조차 허락하지 않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말았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 모두 나름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과를 했다. 하지만 송희경은 거기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정부'로 성급하게 나아간 후, 오히려 '조국을 욕하고 다니다니'라며 리원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송희영의 세계 속에, 과연 '이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나는 그 과오를 밝힌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내부고발자나 양심적·비판적 애국자의 자리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삼권분립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을 읽는 대신, 그는 3부를 통괄하는 '나랏님'의 존재를 이끌어내고, 세월호 유족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그 '나랏님'을 국민 전체와 등치시킨다. '비국민'을 만들어내기 위한 담론적 포석이다. 이것이 2014년 8월 23일,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세월호 사태 대응 전략이다. 그들을 전교조처럼, 노동조합 가입자들처럼, 비국민으로,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3. 손석희 vs. 조갑제

세월호 참사가 막 시작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배는 급격히 기울어 한 시간 가량 지난 오전 10시 5분, 이미 90도 가까이 기울어 좌현 전체가 거의 물에 잠겼다. 오전 10시 19분에는 완전히 전복되어 배의 바닥만이 수면 위로 드러난 상태가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참사의 시작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처음에는 일종의 해프닝처럼 보도되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했지만 승객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희대의 오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오보를 처음 낸 곳은 어디인지, 사실 확인 없이 받아적은 언론사들이 전부 어디인지, 낱낱이 밝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세월호 침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바로 그 '전원 구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머릿속에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잘못된 프레임이 입력되고 나니, 연이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원 구조가 가능했는데 해경의 잘못으로 애꿎은 생명이 희생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세월호 침몰 이후 해경의 대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1). 해경은 신고를 받고도 일부러 늑장 출동하였다.
(2). 해경은 일부러 세월호 선내에 진입하지 않는 등, 소극적 구조 활동에 머물렀다.
(3). 세월호가 전복된 후에도 '에어포켓' 등에 갇혀 있는 승객을 살려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언딘과 유착된 해경의 수상한 행동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쳤다.

(1)에 대해 살펴보자. 왜 진도 VTS가 아닌 제주 VTS로 신고가 접수되었는지, 세월호의 변침을 왜 진도 VTS에서 놓쳤는지 등을 놓고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을 놓고 보면, 어쨌건 해경은 사고 신고 접수 후 출동했다. 해경 구조 헬기는 약 30분 뒤, 구조정은 약 40분 뒤에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마치 해경에게 무슨 순간이동 능력이라도 있는 양, 왜 배가 기울기 시작한 그 순간에 현장에 없었냐는 식으로 나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경비정은 24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신고를 받은 후 이보다 더 빨리 출동할 수 있는 방법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2)의 경우도 그렇다. 마치 단 한 사람의 해경도 세월호 선내에 갇힌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양, 그렇게 언론은 입을 맞춰 몰아갔고 그렇게 사실은 왜곡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배에 갇힌 단원고 학생을 해경이 망치와 파이프로 유리창을 깨고 구조했다. 세월호에서 승객을 구조해낸 당사자인 박상욱 경장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가 “선실 유리창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배가 船首 쪽으로 돌면서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급히 망치를 들고 세월호로 옮겨 탔습니다. 이형래 경사와 이종훈 경사 그리고 제 곁의 한 분은 구조된 승객이라 기억하는데 그 분도 저와 같이 유리창 깨는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제가 들고 있던 30cm 정도 되는 나무자루에 주먹 만한 쇠뭉치가 달린 망치였는데 이걸로 몇 번 가격해도 유리창이 멀쩡했습니다. 아마 가격할 때 자세가 불안정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기울어진 바닥에서는 망치질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종운 경사가 망치를 들고 저는 123정에서 전해준 쇠파이프 지주봉을 들고 때렸습니다. 지켜보던 123정에서 鐵製 지주봉을 뽑아 저에게 전해 준 겁니다. 함정에 추락방지용으로 설치한 鐵製 봉이었지요. 제 옆에 서 있던 승객도 망치를 건네 받은 뒤에 같이 몇 번을 내리 쳤습니다. 그래도 유리창은 멀쩡했습니다. 그때 제 곁에 있던 승객이 망치를 내리치는 순간 ‘퍽’ 하고 유리창이 깨져 나갔습니다. 거의 동시에 船室에서 두 손이 번쩍 올라왔습니다. ‘만세 자세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오는 손 마다 잡고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도 두 사람이 끝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부터는 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배가 더 기울어지면서 사람들의 손이 유리창 부근으로 다가오질 않는 겁니다. 이번에도 123정에서 ‘홋줄’을 건네 주었습니다. 이걸 내려주어 사람들이 줄을 잡고 올랐습니다.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했던 海警(해경) 朴相旭 경장: "제발 사실대로만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26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41&C_CC=AZ

목포해경에 소속된 의경 김모(22)씨의 증언 역시, 당시 해경이 '적극적 구조 활동'을 하였으며, 심지어 그 구조 활동에는 이미 구조된 세월호 승무원이 참여하기도 했음을 시사한다. "김씨는 123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맞대어 객실 유리창을 깨고 5~6명을 구조한 것과 관련, "누가 유리창을 깼느냐"는 검사의 질문을 받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원(해경) 두 명이랑 승객 두 명이 있었다"고 답했다."("세월호 승무원 2명, 승객 구조 참여 정황 확인(종합2보)", 연합뉴스, 2014년 8월 19일, http://m.yna.co.kr/kr/contents/?domain=2&ctype=A&site=0100000000&cid=dJRTVKaDAJb)

언론을 포함해 블로거 등 독립적으로 여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 한 두 장을 놓고, '세월호 선내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해경은 그것을 못본 척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해경은 이쪽에서는 유리를 깨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저쪽에서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뒀을까?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해경은 최선을 다해 구조 활동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3)으로 넘어가보자. 진도체육관에 몰려 있는 유가족들을 생중계하기 시작한 언론은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내보내며, 마치 뒤집어진 세월호 속에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는 듯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전의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되고 난 후, 국민들의 관심이 비로소 쏠리기 시작한 시점인지라, 자극적인 보도 소재가 필요했기에 모든 언론은 거의 암묵적으로 '저 속에는 생존자가 있다'는 전제를 너무도 당연하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7~8월 해수욕장에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체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월의 바닷물 속에서, 설령 구명조끼를 입고 물 위에 떠있다 한들, 몸이 바닷물에 닿는 한 하루 이상 실종자가 생존해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당 수역의 수온을 전제로 한다면 침몰 후 6시간이 경과했을 무렵 생존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우리는 고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다.

세월호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뒤집힌 배에서 생존자를 발견해 꺼낼 수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더욱 명백해진다. 세월호의 높이는 50미터가 넘고, 수면 위로 드러나있던 배의 아랫부분에는 창문 따위가 없다. 배의 밑바닥이니까 당연히 '물 샐 틈 없이' 튼튼한 철판으로 용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자를 만약 잠수부가 발견한다면, 그 생존자는 수십 미터 물 속을 잠수하여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아무런 장비 없이, 이미 지칠대로 지친, 훈련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말이다. 이 조건이 과연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세월호 침몰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1), (2), (3)의 '상식'은, 모두 사실이 아닌 그저 희망사항에 기반한 것들이다. 해경은 최대한 빨리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배가 45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였다. 선장과 선원이 탈출하면서 선내에 승객들이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는지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탓에,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는 작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선내 진입 시도가 있었지만 배가 너무 많이 기울어서 100톤급 구조정에 실린 장비로는 어림도 없었다. 배가 완전히 뒤집힌 다음에는 사실상 생존자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침몰 당일, JTBC의 손석희 사장은 자신이 진행하는 뉴스9에서 백점기 부산대조선해양공학과 교수와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백점기 교수는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에어포켓'에 생존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손석희가 10여초간 침묵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왜, 언론은 이후에도 '에어포켓'에 집착하며 '골든타임'을 되돌려달라고, 현장에서 실종자 수습 작업에 매진하던 해경을 몰아붙였을까?



여객선 세월호 침몰...백점기 부산대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전화 연결
http://youtu.be/VQLyJu_1F6Q?t=5m55s

사고 당일 언론인으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손석희마저도,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는 일부 여론에 편승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김으로써, 세월호 침몰과 관련된 논의는 더욱 수렁에 빠져들었다. 언딘과 해경의 유착설이 떠오르면서 정작 그 해경이 사고 초기에 174명을 구조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혔다. 승객을 구조해낸 해경의 공로는 완전히 도외시되고, 그들은 '자력으로 탈출'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기까지 했다.

세월호 같은 크기의 배에서 당신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내린다고 가정해보자. 차갑고 조류가 빠른 진도 앞바다에서, 몸이 떠있고 숨을 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살아있다'는 뜻은 아니다. 빨리 안전한 배로 옮겨 타야 한다. 배가 침몰하는 바다에는 온갖 부유물이 떠다니며, 그것에 부딪치면 부상을 입는다. 물에 뛰어내리는 과정에서도 부상을 입을 수 있다. 바다로 '탈출'한다고 해서 자력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그런 오만은, 안전한 곳에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헛소리라는 말이다.

앞서 인용한 박상욱 경장의 인터뷰를 조금 더 읽어보자. 구조 현장의 모습은 이랬다.

잠시 뒤에 또 한 사람이 의식불명인 채로 배로 옮겨졌습니다. 학생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이름표가 ‘정찬웅’이었을 겁니다. 이형래 경사와 제가 즉각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바다에 떠 있어 건졌는데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고 구조대원 중 누군가가 전해 주었습니다. 뇌진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神이 끌어가기 전에 제가 살려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도해도 이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폐 소생술이 예상외로 무척 힘이 듭니다. 제가 지치면 李 경사가 시도하는 식으로 교대로 했지만 더 이상 바이탈 사인(Vital sign·호흡, 맥박, 체온, 혈압 등 活力 징후-注)이 생기질 않아서 헬기로 후송시켜야 했습니다. 그럴 때의 절망감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뉴스를 들으니 사망했더군요.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했던 海警(해경) 朴相旭 경장: "제발 사실대로만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26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41&C_CC=AZ

세월호 참사는 한국 언론의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당일, '에어포켓' 따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손석희는 며칠 후 '다이빙 벨'에 올인했다. 그 기적의 다이빙 벨이 현실 속에서 검증되어 어떤 민망한 결과를 연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서술하지 않겠다. 세월호 참사 내내 가장 믿음직하다고 여겨졌던 '손석희 뉴스'가 이런 식이었다. 냉정한 사실을 파악한 후 그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대신, 헛된 가능성을 부풀리며 '희망 고문'을 하는 여느 언론의 대열에 동참하고 만 것이다.

오히려 이번 참사에서 유일하게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말하던 언론인은 조갑제 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조갑제'라고 말하고 있다. 조갑제는 달랐다. 그는 4월 17일, 그 누구보다 빨리 세월호의 침몰이 과적 및 화물 결박 문제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화물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급회전 때 탈락, 배가 기울 수 있다", 조갑제닷컴, 2014년 4월 17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473&C_CC=AZ). 후속 보도인 "파도 없는 바다에서 이 정도의 急변침만으로 큰 배가 전복된다면 海運이 성립될 수 없다!"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배의 操舵(조타)는 35도 이상 꺾을 수 없다. 배는 덩치가 커서 자동차처럼 핸들을 꺾는다고 금방 회전하는 것도 아니다. 즉 급회전만으로 배가 顚覆(전복)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급회전이, 무게중심이 높은 船體(선체)를 기울게 하고, 여기에다가 적당히 묶어두었던 컨테이너 등 화물이 풀려, 그쪽으로 쏠리고 여기에다가 강한 潮流가 가세하면 배는 復原力 한계를 넘게 되어 전복되는 것이다. 
"파도 없는 바다에서 이 정도의 急변침만으로 큰 배가 전복된다면 海運이 성립될 수 없다!", 조갑제닷컴, 2014년 4월 17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480&C_CC=AZ

나는 조갑제의 거의 모든 정치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를 애국자로 내세우는만큼 나도 애국자라고 생각하지만, 박정희와 이승만을 우상화함으로써 그 애국이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오히려 그런 식의 우상 숭배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조갑제 본인이 말하는 바와 제대로 부합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있어서만큼은 조갑제가 옳다. 조갑제만이 올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보도한 언론인이었다.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여 해경 뿐 아니라 세월호 선장의 변호사까지 인터뷰하는 언론인도 조갑제 뿐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의 알 권리'를 제대로 지켜주고 있는 오직 단 한 사람을 꼽자면, 적어도 나는 손석희가 아니라 조갑제의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활동에 나섰던 해경을 언론은 '참사의 원흉'으로 몰아갔다. 7시간 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청와대에 거주하는 시사평론가 박근혜 씨는, 그 언론 보도를 고스란히 받아적어 '대통령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시사평론가 박근혜 씨는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라고,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선포'하면서, 해경을 해체해버린 것이다. 너무도 노골적인, 희생양을 만들어 국민들의 분노한 여론으로부터 도망가려는, 꼬리 자르기였다.

9. 朴 대통령은 성난 여론 앞에 해경을 희생양으로 바쳐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잠수사들이 죽어 나가는, 목숨을 건 屍身(시신)수습 작업의 주체인 해경을 격려하고 보호하기는커녕 선동 언론과 합세, 뭇매를 때린 대통령을 공무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월호 침몰 후의 사태 전개 정리: 언론이 가장 큰 개혁대상임을 확인",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30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92&C_CC=AZ


4. 조선일보는 어쩌면, 알고 있었다.

박근혜가 하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지 않는 수많은 야권 성향의 인사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들도 백이면 백, 저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만큼은 철석같이 믿는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전제조건을 시사평론가님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해경 해체가 발표된 후 각 신문사에서 내놓은 사설들을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해경 해체의 논리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올바른 일이 된다거나, 조선일보가 찬성하는 일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그들은 특유의 정보력과 여론 감각을 가진 '1등 신문'이다. 해경 해체에 대한 조선일보 사설을 읽어보자.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해경 해체라는 극약 처방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세월호 사태에서 드러난 해경의 구조적 문제를 꼽았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해양 구조·구난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해경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문제 의식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해양 구조·구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해경 본연의 업무이자 우리의 주권 수호와 직결된 해양 경비·경계 역량을 약화하는 쪽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를 볼 때 해양 경계·경비 업무는 더욱 강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선 별도의 해양 경비 조직이 꼭 필요하고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사설] 해경 해체에도 '海洋 주권' 지킬 기구는 강화해야", 조선일보, 2014년 5월 21일, http://m.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14052004191&sname=news

사설 전체에서 해경에 대한 비난이 등장하는 문장은 딱 두 줄 뿐이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해양 구조·구난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해경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문제 의식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두 문장 외에는 모두, 해양주권을 지키기 위한 별도의 조직이 왜 필요한지, 중국의 해양 영유권 주장이 거세지고 중국 어선들이 우리 바다에서 활개를 치는 지금 특히 왜 절실한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지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행간을 꼼꼼히 읽어보면 조선일보가 과연 해경 해체에 찬성한다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다. 주요 부분들을 짚어보자.

"바다 주권(主權)을 지키는 해양 경계·경비 업무가 국가안전처 내 실(室)·국(局) 단위 조직으로 편입되는 셈이다. 주권 수호 기능이 구조(救助) 기능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은 머지않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해경이 세월호 구조 작업에 매달려 있는 사이 중국 어선들이 우리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연평도·백령도·흑산도 등 주요 어장에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매단 중국 어선만 눈에 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중국 어선들은 도끼와 낫, 쇠창 등으로 무장한 채 떼를 지어 다니면서 어종을 가리지 않고 불법 남획을 일삼고 있다. 준(準)군사작전이나 다름없는 이들에 대한 단속 업무까지 국가안전처가 맡게 되는 것이 맞는 방향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은 지금 해양 주권을 지키기 위한 선제적 조치들을 취해나가고 있다. 육·해·공군과는 별도의 해안경비대를 강화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국방부가 지난 3월 발표한 국방 개혁 기본계획에서 현재 육군이 맡고 있는 해안 경계 업무를 2021년까지 해경에 넘기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해경이 해체되면 국방 기본계획까지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내용들을 앞에 한참 늘어놓은 후, '국민 모두 분노했다, 박근혜의 인식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며 해경 해체에 슬쩍 찬성하는 모양새를 만드는 조선일보는, 어쩌면 '해경 책임론'이 세월호 사태에 대한 올바른 진입 경로가 아님을, 늦어도 이 시점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후 언론들의 보도 행태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보수 언론들은 종편 방송사를 총동원하여 유병언 일가에 대한 검찰의 추적에 집중했다. 반면 진보 언론들은 계속 '해경 책임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세월호 책임론'을 물고늘어졌다. 여당과 야당의 대응도 바로 같은 경로로 나뉘었다. 그리고 우리는 8월 25일 현재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선일보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그게 꼭 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조선일보에서 찬성하는 일이 다 나쁜 일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뭔가 독특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 해경 책임론이 바로 그렇다. 이미 조선일보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사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 어느 정도 손을 털었다. 혹자는 그 이유를 '해경을 감싸기 위해서다, 더 큰 음모가 배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영양가가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좀 더 간명하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 관계자들은 대부분이, 특별법과 특검 없이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었고,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이준석 선장을 포함한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 대표적이다. 해경 대원들 역시 재판의 참고인으로 많은 조사를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면, 해경은 그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면수심'이라고 비난받던 세월호 선원들 중 일부도, 자신들이 그 배에서 탈출한 후에는 창문을 깨고 승객을 구조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세월호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이나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야권의 대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잘못된 프레임이다. '전원 구조'가 오보라면, '전원 구조할 수 있었다'는 주장 역시 잘못된 가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월호는 침몰 시작 후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복되었다. 흘수선과 가까운 곳에, 자동차를 싣기 위한 격문이 설치되어 있는 로로선(Ro-Ro船)의 특징이다. 무게중심이 높아서 잘 뒤집히고, 전복되기 시작하면 그 피해를 걷잡을 수 없다. 1994년 9월 28일, 노르웨이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사건이 그렇다. 01시 00분 무렵에 쾅 소리가 들렸고, 01시 30분 무렵이 되자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선원과 승객을 포함해 989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138명이 구조되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병원에서 사망했다.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와 비교해보면 세월호 침몰에 대한 한국 해경의 대응이 과연 '늑장 대응'이었다고, '무책임한 태도로 우리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했다'고,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적어도 조선일보는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야권의 인식을 굳이 교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전제를 놓고 달려들게 내버려두는 편이 '정치적'으로 볼 때 좀 더 나은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요구하는 '진상 규명'이 '해경 책임론'에 근거하고 있는 한, 진도 VTS가 어쨌고 저쨌고 언딘이 어쩌고 저쩌고에 매달려있는 한, 야권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배가 기울기 시작한 순간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선장과 선원들이 잘못된 선내 방송을 틀어놓고 탈출해버린 한 승객을 전원 구조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설령 승객 전부가 바다에 뛰어내렸다 한들 불행한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음을,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언론은 희생양 만들기에 골몰했고 박근혜 정권은 그 여론몰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해경 해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초강수를 두었다.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로서의 책무를 내팽개친 것이다. 로로선이 기울어진 이상 비극은, 크건 작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먼저 깨닫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해경을 향해, 청와대를 향해, 그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영악한 '1등 신문'은 그 포지션에서 이미 발을 빼고,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유가족 중 특히 김영오 씨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쪽에서 먼저 저들보다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대응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또 당할 것이다. 뱀처럼 지혜로우며 비둘기처럼 온유하라는 성경의 말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기울어진 배에,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해경이 뛰어들었다면, 그들은 희생자들을 구조하기는 커녕 스스로가 시신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야권 언론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선량함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 기존의 논의에 매달려있을 때, 조선일보는 이미 그들을 두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5. '침묵의 카르텔'을 향한, 김영오 씨와 우리 모두의 싸움

본격적인 신상털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자료를 확보해두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영오 씨가 작년 7월 충남 궁도협회에서 궁도 초단을 땄다는 그런 '정보'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입수할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실 확인이 좀 더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아무튼 조선일보는 방향을 정했다. 신상을 털겠다는 것이다.

이 신상털기가 무서운 이유는 단지 김영오라는 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붙이기 때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공동의 의제로 소화되어야 할 사안을, 단지 한 사람의 '땡깡'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거칠게 막아서고, 대신 김영오라는 사람, '유민 아빠'라는 누군가가 과연 정말 그렇게 가난해서 딸 양육비도 안 보냈느냐 마느냐로 화제의 촛점을 옮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더욱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세월호 특별법이 정말 '수사'하고 '기소'해야 할 대상은, 현장에 출동한 해경이 아니라, 세월호라는 배를 그런 식으로 개조하고 운항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 총체적 안전 관리 시스템이다.

해경들이 순간 그 장소로 순간이동해서 기관실의 마이크를 빼앗고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방송을 했다면 아마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간 해경의 123정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세월호는 45도가 넘도록 기울어져 있었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다음에야 그보다 더 기울어지고 있는 배에 올라탈 수는 없다. 구조대원은 구조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권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해경 책임론에 목을 매고 있고, 그들의 죄과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며, 청와대와 여당에서 그것을 순순히 내놓지 않자 '더 윗선에 닿은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숙덕거린다. 만약 그렇게 거창한 음모가 있다면, 과연 특별법에서 정한 그 알량한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윗선'을 죄다 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야권과 야권 성향의 언론들은 있지도 않은 음모와 복선을 찾아야 한다고, 마치 지붕 위의 닭을 쳐다보는 개처럼 마구 짖어댔다. 자녀들의 생죽음을 경험한 유족들이 그러한 의견에 휩쓸려버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김영오 씨의 신상을 털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조선일보다. 하지만 누가 김영오 씨를 고립시키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검증할 수도 없는 음모론과 해경 책임론 등등을 유포시킨 모든 언론 및 야권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합심하여 세월호 유족들에게 검증될 수 없는 진실을 요구하도록 몰아갔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배가 뒤집혔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배가 왜 뒤집혔을까? 안전 규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있었어도 엉망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배가 뒤집힌 이후, 승객들을 '전원 구조'해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는 듯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만약 밝혀진다면 박근혜 정권이 발칵 뒤집힐 것 같고, 결코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장으로 급히 달려간 해경은 민간인 어선들과 협력하여 최선을 다했고, 배가 뒤집혀버린 후에는 '에어포켓' 따위 없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할 가능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야권의 논지가 세워졌다면, 오히려 그들은 해경을 해체해버린 박근혜 정부를 향해 강력한 비난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무슨 대통령이 어떤 부처의 정상적인 기능 수행을 '실패'라고 단정짓고, 대뜸 해체를 선언해버린단 말인가? 이보다 무책임한 국정 총책임자를 우리는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권 정치인과 언론들은 '해경 책임론'에서 시사평론가 박 모씨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바, 박근혜를 욕하면서도 박근혜의 정책을 지지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천안함 침몰을 둘러싸고 '진실게임'을 벌이다가 야권이 쓴맛을 본 2010년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국제합동조사팀이 '북한의 어뢰에 천안함이 피격되었음'이라는 결과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 언론들은 계속 온갖 음모론을 양산했고, 심지어 '이스라엘 잠수함이 서해 바다에 와서 천안함을 들이받았다'는 기상천외한 소리까지 등장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영해로 북한 잠수함이 침투했다는 점을 두고 정부와 여당을 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기회는 전부 날아가버렸고, 대신 무능한 군과 정부가 애국자 행세를 하는 꼴이 연출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지는 일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한 해에 80여명씩 '자살'로 처리되는 군내 사망 사고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군대 속에서는, 4년마다 세월호가 한 척씩 침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보자.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왜 이딴 배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었느냐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배의 안전을 검사해야 할 한국선급은 사실상 선주들의 이익단체이며, 심지어 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감사를 받지도 않았다. 세월호 참사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선급 전영기 회장은 4월 25일 사표를 제출했고 그 사표는 깨끗하게 수리되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면 그를 비롯한 한국선급의 고위직에 대한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배가 침몰해서 벌어진 참사에 대해, 배가 침몰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수사하며 예의 주시하는 대신, 정작 사고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있던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이 현상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경의 고위직들이 한국선급에 수사 정보를 흘려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다루고 밝혀내야 할 일이지만, 공권력 전체에 대해 묻지마 불신을 형성하고 퍼뜨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안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어떤 진실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그 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 아니 그 전에 협상 주체로 나서는 이들의 전반적인 합의가 과연 이루어져 있는가. '모든 의혹은 낱낱이 밝혀낸다'는 추상적인 구호 말고, 대체 무엇이 의혹의 대상이며 무엇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야권의 입장은 중구난방이며, 가장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 참사 현장 사진 한 두 장을 가져다 놓고 '왜 당신들은 저 배에 뛰어들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식으로는, 그러나 그 어떤 '진실'에도 다가가지 못할 것이 너무도 명백해지고 있다.

한 발 떨어져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는 '안전'과 '이윤' 가운데 후자를 택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물을 싣고 승객을 태우는 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그렇게 생긴 이윤을 나눠먹는 사람들이 서로 입을 싹 씻고 다물어버리겠다는 합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카르텔'은 세월호 참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 가령 최근 28사단 폭행 사망 사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군 내부의 문제들이 그렇다. 사람을 그렇게 많이 모아놓으면 확률적으로 폭행, 가혹행위, 사망 사건 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군이 조직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은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군은 윤일병의 사망 원인을 질식사로 몰아가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은폐 시도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음을 너무도 확연히 바라볼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세월호 피해자들과 군 사망 사건 피해자들의 접점이 생긴다. 수학여행 보낸 자식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와,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보낸 아들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는, 모두 이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선급을 포함한 해운업계라는 거대 조직, 혹은 군대라는 거대 조직은, 자신들이 '별 일 없이' 누려온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몰아간다.

현재 군 지휘관이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는 군사법정의 재판권을 시민사회가 일부 되찾아오지 않는 한, 군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은폐하려 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전한 해상교통수단을 이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 한, 여전히 위험한 불법 개조를 감행한 배들은 바다 위를 활보하고 다닐 것이다.

이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에 맞설 때, 비로소, 딸에게 줄 양육비는 없고 국궁 쏘러 다닐 돈은 있다고 여론몰이당하고 있는 김영오 씨는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야권과 언론이 만들어온 프레임을 유지하는 한 세월호 유족들은 사회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갈 뿐이다.

'진상규명'이 아닌 '안전회복'에 더 무게를 두고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여론전의 각도를 재설정해야 할 필요성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국정원의 세월호 음모 따위에 계속 발목을 잡혀있으면 곤란하다. 세월호 참사의 핵심은 배가 침몰했다는 것이고, 배가 침몰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손쓸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향할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비겁하게도 행정부의 한 조직을 통째로 쳐냈다는 것이다. 어떤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가, 어떤 진상을 규명해야 하며 무엇은 의혹의 대상이 아닌가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지금이라도 시작되어야 할 필요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jeongtae-roh/story_b_5706973.html

2014-02-27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정치개혁인가 자승자박인가

정치개혁인가 자승자박인가
게시됨: 2014년 02월 27일 23시 55분

1만 명의 군인들이 적진 한 가운데에 갇혔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페르시아의 퀴로스 2세는 자신의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대왕을 공격하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이민족 정벌을 핑계 삼아 대규모의 용병을 불러온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게 1만 3천여 명의 군사들이, 대부분의 경우 생전 처음 가보는 적진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퀴로스의 음모를 몰랐지만, 곧 발각되었고, 반란 수괴인 퀴로스는 전투 중 사망하게 되었다.

그리스 군은 그 전투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1만여 명의 병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용병이 되어 온 것이므로, 품삯을 지불해야 할 퀴로스가 죽은 이상 이제 귀향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페르시아, 즉 최강의 적국 한 가운데에 뚝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튼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 군사들은 반란 세력의 일부, 적군이다. 페르시아의 대왕은 그리스 군을 향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고 요구한다.

자존심 강한 그리스의 보병들은 그 말을 무시했다. 만약 페르시아가 그리스 군을 상대로 이겼다면, 직접 와서 시체 위에 떨어진 창과 방패를 주워가라고 응수한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싸워보지도 않고 무장을 해제한 채 항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중무장한 밀집 대형의 보병들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다. 맞붙어 싸운다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우리는 친구다, 친구끼리는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의 협상에 대해서 이보다 더 탁월한 통찰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일시적인, 혹은 극복 가능한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는 것은, 전략적 목표가 확실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때로는 단기적인 손실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이나 능력 그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쪽에서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친구'가 되면, 그 '친구'는 금새 '정복자'로 돌변할 것이니 말이다. '내줄 수 있는 것'과 '내줄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전자를 양보하더라도 후자는 포기하지 않아야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에 대한 논의가 과연 '정치개혁'일까? 정당의 가장 큰 힘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고 그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서 적절한 선거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한국의 여당과 야당은 모두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내던지는 '개혁'을 하겠다고 목청을 높히고 있다.

여기에 제3후보 안철수 의원 측에서,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처지이므로, 선수를 쳐서 민주당을 머쓱하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 민주당은 그놈의 '개혁'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다. '정치개혁'을 해버리면 정당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정치적 수단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것을 '정치개혁'이라고 말해버린 이상, 개혁에 역행하는 세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한복판에 갇혔는데, 이미 방패와 창을 버리겠다고 선언해버렸고, 페르시아의 대왕은 그저 청와대에서 껄껄 웃고 있을 뿐이다.

정치개혁.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정치'를' 개혁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국민들이 정치개혁을 원하는 것은, 정치'를' 개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치'가' 개혁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이미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페르시아의 '친구'가 되어버린 정치가, 대체 누구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단 말인가. 기업은 국민들의 사적 생활을, 관료들은 국민들의 공적 생활을, 이미 침식할대로 침식해버린 상황이다. 정치권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일단 벗고 보는 눈물의 홀딱쇼를 멈추고,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힘을 이용해, 국민들의 행복과 권리를 지켜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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