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부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7-06-13
2007-06-08
2007-06-06
밀양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복선을 던져주고, 씬이 바뀌면 그 결과가 등장하는 식이다. 아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암시가 나오자 마자, 다음 에피소드에서 유괴가 발생한다. 유괴범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준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납치를 당했다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부흥회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면, 가슴을 부여잡고 절규하다가 신애가 그곳으로 향한다. 바람부는 날, 일부러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화면에는 먼지가 날리는 느낌이 가득했다.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신애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우겨버리는 유괴범 원장의 맨질맨질한 표정을 보며 주저앉아버린 다음 벌이는 모든 행동들은, 말하자면 제발 나 좀 봐달라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그깟 '거짓말이야' 씨디 한 장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훔친다. 이신애씨를 위한 철야 기도회 현장에 돌을 던지고, 예배당에 찾아가 의자를 때리며 항의하고, 급기야는 약국 아줌마 남편을 꼬셔서 들판에 누워버린다. 보이냐고, 보이냐고, 보이냐고 조용히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상대방은 팬티까지 벗겨놓고는 (아마도 안 서서겠지만) 갑자기 회개해버린다.
못된 짓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신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버린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심리 상태라는 게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꾸준히 잘 대해주려는 사람에게 가서, '나랑 섹스 하고 싶어서 그러죠'라며 그 마음을 짓밟아버리고 히스테리컬하게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니까 이제는 몸에 칼을 대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겠지. 애초에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죽은 남편 따라 밀양에 내려온 사람이니까, 신이 자기 마음대로 그 개새끼를 용서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의 소외감을 극복할 방법도 없는 거고.
한때 도올 김용옥 빠돌이었던 시절 그 강의를 직접 가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게스트로 나오셨다. 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양귀자의 이야기를 빌어 대답을 해주었는데, 양귀자가 그렇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아들이랑, 아마도 며느리까지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신부가 와서 달래는 말이고 뭐고 다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분노만이 속에 가득 차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당신이 이럴 수 있냐고 발로 밟고 침을 뱉었다는데, 그렇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를 미쳐 날뛰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침을 뱉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만 해.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에 신애가 했던 짓들이 이해가 좀 되는 거라. 아무에게나 대뜸 마치 작업을 거는 것처럼,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비밀스러운 햇빛이니 뭐니 객쩍은 소리나 하고, 없는 돈 많다고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인테리어 말참견하고,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쟁이 떼어내는 법 모르지도 않을 텐데 여기에는 햇빛밖에 없다는 대꾸를 하고, 다 새어나오고 있었던 거겠지, 외로움이. 하긴 동생도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으니까 이 말이 꼭 정확한 건 아닐 것도 같지만 내 느끼기엔 그렇다고. 그 여자에게 신앙은 믿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었고 어쩌면 용서보다 더 원초적인 거였을수도 있는 거고. 고, 로 끝내는 게 다, 로 끝내는 것보다 입말에 가까운 것 같다.
오락가락하는 문체를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원장 딸에게 사소한 짜증을 내고 집에 와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면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겠지만, 화를 조금이라도 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삶을, 완전히 새롭지는 않아도 어찌어찌 살아가게 된 건, 살려달라고 말한 다음 어쨌거나 살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볼 수도 있겠다. 한 줌의 햇빛같은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니까, 아무리 초라하고 비참해도 생명은 돌려받았으니까.
작품 외적인 얘기도 조금 해야겠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단순한 화법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그 끈을 여기에 잇자면, 그렇게 원인과 결과로만 이어진 단순한 서사구조 하에서 작동하다보니, 그 끝없는 고통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변주가 전부 삭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단련되게 마련이어서, 아이가 죽고 텅 빈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그게 목에 달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 자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더 미워하고 학대하게 된다.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정말 맛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입에 단 걸 물고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로서 굵직한 사건만을 짚어주고 넘어갔기 때문에, 보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고통의 디테일에 시달릴 필요까지는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 했다.
다시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나한테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신애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우겨버리는 유괴범 원장의 맨질맨질한 표정을 보며 주저앉아버린 다음 벌이는 모든 행동들은, 말하자면 제발 나 좀 봐달라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그깟 '거짓말이야' 씨디 한 장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훔친다. 이신애씨를 위한 철야 기도회 현장에 돌을 던지고, 예배당에 찾아가 의자를 때리며 항의하고, 급기야는 약국 아줌마 남편을 꼬셔서 들판에 누워버린다. 보이냐고, 보이냐고, 보이냐고 조용히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상대방은 팬티까지 벗겨놓고는 (아마도 안 서서겠지만) 갑자기 회개해버린다.
못된 짓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신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버린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심리 상태라는 게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꾸준히 잘 대해주려는 사람에게 가서, '나랑 섹스 하고 싶어서 그러죠'라며 그 마음을 짓밟아버리고 히스테리컬하게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니까 이제는 몸에 칼을 대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겠지. 애초에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죽은 남편 따라 밀양에 내려온 사람이니까, 신이 자기 마음대로 그 개새끼를 용서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의 소외감을 극복할 방법도 없는 거고.
한때 도올 김용옥 빠돌이었던 시절 그 강의를 직접 가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게스트로 나오셨다. 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양귀자의 이야기를 빌어 대답을 해주었는데, 양귀자가 그렇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아들이랑, 아마도 며느리까지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신부가 와서 달래는 말이고 뭐고 다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분노만이 속에 가득 차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당신이 이럴 수 있냐고 발로 밟고 침을 뱉었다는데, 그렇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를 미쳐 날뛰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침을 뱉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만 해.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에 신애가 했던 짓들이 이해가 좀 되는 거라. 아무에게나 대뜸 마치 작업을 거는 것처럼,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비밀스러운 햇빛이니 뭐니 객쩍은 소리나 하고, 없는 돈 많다고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인테리어 말참견하고,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쟁이 떼어내는 법 모르지도 않을 텐데 여기에는 햇빛밖에 없다는 대꾸를 하고, 다 새어나오고 있었던 거겠지, 외로움이. 하긴 동생도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으니까 이 말이 꼭 정확한 건 아닐 것도 같지만 내 느끼기엔 그렇다고. 그 여자에게 신앙은 믿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었고 어쩌면 용서보다 더 원초적인 거였을수도 있는 거고. 고, 로 끝내는 게 다, 로 끝내는 것보다 입말에 가까운 것 같다.
오락가락하는 문체를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원장 딸에게 사소한 짜증을 내고 집에 와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면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겠지만, 화를 조금이라도 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삶을, 완전히 새롭지는 않아도 어찌어찌 살아가게 된 건, 살려달라고 말한 다음 어쨌거나 살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볼 수도 있겠다. 한 줌의 햇빛같은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니까, 아무리 초라하고 비참해도 생명은 돌려받았으니까.
작품 외적인 얘기도 조금 해야겠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단순한 화법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그 끈을 여기에 잇자면, 그렇게 원인과 결과로만 이어진 단순한 서사구조 하에서 작동하다보니, 그 끝없는 고통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변주가 전부 삭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단련되게 마련이어서, 아이가 죽고 텅 빈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그게 목에 달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 자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더 미워하고 학대하게 된다.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정말 맛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입에 단 걸 물고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로서 굵직한 사건만을 짚어주고 넘어갔기 때문에, 보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고통의 디테일에 시달릴 필요까지는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 했다.
다시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나한테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200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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