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서는 플라톤 다음으로 거론되지만, 생물학으로 넘어오면 그 학문의 비조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생물들을 분류하였고,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중세 이후까지 통용되던 분류표를 만들었다. 그가 주장한 생기론은 19세기까지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을 곧이곧대로 믿는 생물학자가 존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문을 최초로 개시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직접 하지 않았다. 흔히 드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말의 이빨이 몇 개냐'고 물으면 눈 앞에 있는 말의 이빨을 세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뒤져서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한 관찰 결과를 가톨릭 신학의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은 것 등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근대 철학의 고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던 관찰과 실험을 자기도 직접 해보겠노라고 나선 이들이 만든 것들이다. 새로운 오르가논을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을 가장 앞에 놓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새로운 운동 법칙을 만들어내기 위해 데카르트는 뭔가 이상한 도식을 개발해내는데, 그 내용은 데카르트 생전에 논박당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뉴턴이 빛을 통한 인간의 시각적 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바늘로 자기 눈의 수정체를 찔러서 조작하다가 실명할 뻔 했다는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인지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하고 있기도 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는 오감 중 기억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감관은 청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동물들을 쭉 관찰해본 결과, 우선 사람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기억하고, 개처럼 지능이 있는 동물들도 익숙한 소리를 들으면 반응을 한다. 이들에게는 외부의 지각 대상을 기억하여 자기 속에 갈무리했다가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반면 벌은 옆에서 징을 때려도 놀라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곤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짓고 군집생활을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본성적으로 타고난 어떤 지식이 있기 때문이며, 그 지식은 '벌들의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벌은 죽어서도 벌로 태어나지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할 수 없다. 막판으로 가면 결론이 이상하게 빠지는데 거기에는 일단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과 동물과 곤충을 모두 관찰하고, 당시에 가능하던 방법을 동원하여 실험도 해 본 다음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초기, 즉 우리가 아는 고전들이 생성되던 당시만 해도, 철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과학적인 발전의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습득하는 모습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모르는 게 없었다. 스피노자가 안경알을 깎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요즘 안경점에 앉아있는 직원을 연상하는데, 당시는 광학이 막 발전하던 시대였고 렌즈를 가공하는 것은 그런 첨단 과학의 소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실험실의 실험 보조 내지는 기자재 납품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과학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그쯤 되면 대충 과학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수학자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철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습득을 포기한 사건이 언제부터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자체가 철학사적 연구 과제일 것인데, 관련 도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시간' 개념을 들고 아인슈타인에게 논쟁을 걸었다가 참혹하게 무시당한 이후,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을 올바르게 습득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분석철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한 수학, 논리학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로 공격한 대상은 이른바 '일반 형이상학'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4권 1장에서 말한 바로 그런 형이상학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문법적 착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거의 모든 논의를 무화시켰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던 하이데거를 안주거리 삼아 대륙철학과의 거리를 한없이 벌려놓는다.
하지만 '특수 형이상학', 가령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등은 애초에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렇기에 언제나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철학이, 니체가 선언하기 이전부터 신과는 결별해버린 상태로 근 20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며, 덕분에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적 문제는 오직 신 스콜라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로 인해 고전적인 인식론이 특히 공격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신 스콜라 철학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성채를 끝내 지키고 있다. 그 외의 근대 철학의 사조들은 과학의 발전 앞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할 운명이다.
심리학적 발견이 철학의 인식론의 내용을 반박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고전으로 대접하는 텍스트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치열한 현재성마저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이 더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까지 탐구를 펼친 선구자들이다. '그 결론에 따르면 대륙철학의 많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므로 심리학적인 발견을 직접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윤형의 주장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대륙철학의 전통을 불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 적지 않은 부분은 '말의 이빨을 잘못 센' 기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될 뿐이다.
과학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과학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철학도'들의 모습이 이번 논쟁을 통해 숱하게 발견된 것 같아서 매우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들은 심지어는 아직까지는 과학을 통해 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대륙철학의 텍스트를 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지식을 직접적으로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지적인 토론도 아니고 그냥 자해공갈일 뿐이다.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철학의 문제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확인하고, 한 철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깊게 독해하면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력을 기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식을 흡수하는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텍스트를 부여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눈을 돌리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귀머거리 곤충일 뿐이다.
2008-03-23
2008-03-21
Breifly, what banks do
To grasp the problem, you need to understand what banks do.Paul Krugman, "Partying Like It's 1929", The New York Times, 2008년 3월 21일.
Banks exist because they help reconcile the conflicting desires of savers and borrowers. Savers want freedom — access to their money on short notice. Borrowers want commitment: they don’t want to risk facing sudden demands for repayment.
Normally, banks satisfy both desires: depositors have access to their funds whenever they want, yet most of the money placed in a bank’s care is used to make long-term loans. The reason this works is that withdrawals are usually more or less matched by new deposits, so that a bank only needs a modest cash reserve to make good on its promises.
But sometimes — often based on nothing more than a rumor — banks face runs, in which many people try to withdraw their money at the same time. And a bank that faces a run by depositors, lacking the cash to meet their demands, may go bust even if the rumor was false.
Worse yet, bank runs can be contagious. If depositors at one bank lose their money, depositors at other banks are likely to get nervous, too, setting off a chain reaction. And there can be wider economic effects: as the surviving banks try to raise cash by calling in loans, there can be a vicious circle in which bank runs cause a credit crunch, which leads to more business failures, which leads to more financial troubles at banks, and so on.
That, in brief, is what happened in 1930-1931, making the Great Depression the disaster it was. So Congress tried to make sure it would never happen again by creating a system of regulations and guarantees that provided a safety net for the financial system.
And we all lived happily for a while — but not for ever after.
He's extremely brilliant.
2008-03-20
과학과 철학에 대한 논쟁을 넘어
철학뿐 아니라 그 어떤 분야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 그 자체를 면밀히 관찰하거나 그에 대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갖는 과학으로서의 의의를 논하다가 결국 이 논쟁은 과학철학에 대한 것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논쟁 참가자인 한윤형이 너무도 불성실한 태도로 텍스트를 읽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이 사용했던 용어의 일관성을 지키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지점을 지적하면서 내 논점을 펼친 후 논쟁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한윤형이 가지고 있는 '메타 이론'에 대한 정의는 글마다 다르다. 새로 올라온 포스트인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20일)에서는 '메타 이론'을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하고, 그 예시로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갖는 실천적인 오류를 들고 있다. 요컨대 자기지시적인 명제가 갖는 논리적 오류라거나, 모순율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가 낳는 논리적 파탄 등을 배제하는 것이 '메타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종류의 '메타 이론'은 특정한 분과 학문의 연구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판단의 지변에 두루 존재하는 일종의 대기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직전에 올린 포스트에 따르면 '메타 이론'은 사뭇 다른 모습을 띈다. "심리학의 메타 이론은 마땅히 심리철학"("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가상의 심리학도와의 대화에서 그가 "그것은 실체이원론입니까? 아니면 행동주의입니까? 심신 동일론? 인과론적 기능주의? 심적 인과성론? 심적 실재론? 부수 현상론? 이렇게 세부적인 것에서 고를 수 없다면, 그것은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물리주의입니까? 물리주의라면 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라고 묻는 방식을 보더라도 그 사실은 확실하다.
사흘 전에는 "마땅히 심리철학"이었던 것이, 어느새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0일의 그는 "메타 이론이 도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심리학을 과학으로서만 옹호한다면 분열이 일어난다는 정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나의 주장을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주장을 내뱉으라고 요구하는 미친 소리로 취급한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그렇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메타 이론'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윤형의 입장이 오락가락 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상식에 부합하도록, 또한 3월 20일의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다듬어준 다음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만약 그가 사고를 위해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범주'에 가까운 그 무엇, 혹은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탐구한 인식의 전제조건들을 '메타 이론'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 어떤 철학의 내용도 될 수 없고 다만 철학의 전제조건을 형성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의를 놓고 들어간다면 심리학에서 '메타 이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심리학자들이라고 해서 러셀의 역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들이라고 해서 동일률과 모순률을 어겨가며 실험을 할까?
그가 3월 20일에 말했던 바대로 '메타 이론'을 정의한다면, 한윤형이 심리학자들더러 '당신들의 과학에는 메타 이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하지만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메타 이론'의 형성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식의 '메타 이론'을 가지고 있는 과학은 내가 알기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메타 이론 1호'와 '메타 이론 2호'가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되어 버린 다음, '그러므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자신의 학문적 위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하므로 '덜 과학'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그것이 그가 3월 20일 포스트의 첫머리에서 말한 주장 2), 즉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 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내용일 것이다.
물론 저 질문 자체가 상당히 잘못 이루어져 있다. '메타 이론 1호'에 따르면 그것은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철학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 조건이 된다. 반면 '메타 이론 2호'에 따른다면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편이 더욱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이추판다님이 바로 직전 포스트인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Null Model, 2008년 3월 18일)에서 인용한 김재권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김재권에 따르자면 "인지 과학은 심성(mentality)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향상시키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심리학, 언어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의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2쪽, 김재권 씀, 하종호, 김선희 옮김, 《심리철학》(서울: 철학과현실사, 1997), 인용문에서 재인용)이다. 그리고 심리철학은 인지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에 힘입어 최근 큰 성과를 거두어왔다. 만약 한윤형의 주장대로 심리학이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하지 못하는 '덜 된 과학'이라면, 심리학과 인접한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인 인지 과학 또한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김재권이 쓴 《심리철학》의 내용 또한 전부 철학이 아니게 되어버린다(아이추판다님의 포스트 "콰인 가라사대"에 달렸다가 작성자 한윤형에 의해 오후 5시 40분 무렵 삭제된 리플에서 그는 "신경생리학이나 인지과학 같은 것에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구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윤형이 그 시점까지도 인용된 김재권 책의 내용을 정독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내 논점은 첫 글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 1.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으로서 나름의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 2.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3. 어떤 조건에 의해서인지 명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은 과학이다. 4. 심리학에서 잘못되었다고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인 논변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5. 현재까지 진행된 심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단일한 철학적 입장이 옹호되지 못한다고 해서 심리학이 '덜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6.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고전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하는 전통적인 대륙철학의 맥락이 전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고착되어 있는 일부를 제외한다면, 1에서 6까지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윤형 또한 나의 논지 중 개별적인 부분에는 찬성의 뜻을 표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학문을 규정하는 메타 학문'인 철학의 위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쓸린 나머지, '메타 학문'에 대한 개념 정의를 혼동하다가, 심지어는 '심리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 하기 어렵다'는 소리까지 하는 등, 너무도 많은 범위에서 너무도 많은 주장을 내놓고 있다. 바로 이런 엄밀하지 못한 태도가 대륙철학의 맥락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사회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추판다님이 이 논쟁에 참여하는 태도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실에 대한 참과 거짓을 밝히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이론을 단지 '철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철학이 현대 과학의 내용들을 마구잡이로 곡해하는 것에 당연히 반대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철학도들이 구체적인 분과 학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 스스로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려 있던 어떤 리플에 대해 대답하자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내 전공과 무관한 수학, 과학 도서들을 즐겨 읽는 편이다). 같은 요구를 철학의 고전들에 대해서까지 하는 일은 그렇다면 과연 합당할까?
생산적인 논점을 열어놓으면서 이 논쟁을 마무리짓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혹은 그가 대변하고 있는 전반적인 입장은, '잘못된 지식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철학의 고전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사례로 들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논거로 삼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을 '앞으로도 영원히 참일 것'이라고 말한 칸트의 철학 또한 시대의 유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수 있다시피,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의 모든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고전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단편적인 논의를 넘어, 언젠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한윤형이 가지고 있는 '메타 이론'에 대한 정의는 글마다 다르다. 새로 올라온 포스트인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20일)에서는 '메타 이론'을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하고, 그 예시로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갖는 실천적인 오류를 들고 있다. 요컨대 자기지시적인 명제가 갖는 논리적 오류라거나, 모순율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가 낳는 논리적 파탄 등을 배제하는 것이 '메타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종류의 '메타 이론'은 특정한 분과 학문의 연구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판단의 지변에 두루 존재하는 일종의 대기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직전에 올린 포스트에 따르면 '메타 이론'은 사뭇 다른 모습을 띈다. "심리학의 메타 이론은 마땅히 심리철학"("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가상의 심리학도와의 대화에서 그가 "그것은 실체이원론입니까? 아니면 행동주의입니까? 심신 동일론? 인과론적 기능주의? 심적 인과성론? 심적 실재론? 부수 현상론? 이렇게 세부적인 것에서 고를 수 없다면, 그것은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물리주의입니까? 물리주의라면 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라고 묻는 방식을 보더라도 그 사실은 확실하다.
사흘 전에는 "마땅히 심리철학"이었던 것이, 어느새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0일의 그는 "메타 이론이 도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심리학을 과학으로서만 옹호한다면 분열이 일어난다는 정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나의 주장을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주장을 내뱉으라고 요구하는 미친 소리로 취급한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그렇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메타 이론'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윤형의 입장이 오락가락 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상식에 부합하도록, 또한 3월 20일의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다듬어준 다음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만약 그가 사고를 위해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범주'에 가까운 그 무엇, 혹은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탐구한 인식의 전제조건들을 '메타 이론'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 어떤 철학의 내용도 될 수 없고 다만 철학의 전제조건을 형성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의를 놓고 들어간다면 심리학에서 '메타 이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심리학자들이라고 해서 러셀의 역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들이라고 해서 동일률과 모순률을 어겨가며 실험을 할까?
그가 3월 20일에 말했던 바대로 '메타 이론'을 정의한다면, 한윤형이 심리학자들더러 '당신들의 과학에는 메타 이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하지만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메타 이론'의 형성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식의 '메타 이론'을 가지고 있는 과학은 내가 알기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메타 이론 1호'와 '메타 이론 2호'가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되어 버린 다음, '그러므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자신의 학문적 위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하므로 '덜 과학'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그것이 그가 3월 20일 포스트의 첫머리에서 말한 주장 2), 즉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 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내용일 것이다.
물론 저 질문 자체가 상당히 잘못 이루어져 있다. '메타 이론 1호'에 따르면 그것은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철학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 조건이 된다. 반면 '메타 이론 2호'에 따른다면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편이 더욱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이추판다님이 바로 직전 포스트인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Null Model, 2008년 3월 18일)에서 인용한 김재권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김재권에 따르자면 "인지 과학은 심성(mentality)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향상시키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심리학, 언어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의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2쪽, 김재권 씀, 하종호, 김선희 옮김, 《심리철학》(서울: 철학과현실사, 1997), 인용문에서 재인용)이다. 그리고 심리철학은 인지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에 힘입어 최근 큰 성과를 거두어왔다. 만약 한윤형의 주장대로 심리학이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하지 못하는 '덜 된 과학'이라면, 심리학과 인접한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인 인지 과학 또한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김재권이 쓴 《심리철학》의 내용 또한 전부 철학이 아니게 되어버린다(아이추판다님의 포스트 "콰인 가라사대"에 달렸다가 작성자 한윤형에 의해 오후 5시 40분 무렵 삭제된 리플에서 그는 "신경생리학이나 인지과학 같은 것에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구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윤형이 그 시점까지도 인용된 김재권 책의 내용을 정독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내 논점은 첫 글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 1.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으로서 나름의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 2.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3. 어떤 조건에 의해서인지 명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은 과학이다. 4. 심리학에서 잘못되었다고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인 논변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5. 현재까지 진행된 심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단일한 철학적 입장이 옹호되지 못한다고 해서 심리학이 '덜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6.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고전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하는 전통적인 대륙철학의 맥락이 전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고착되어 있는 일부를 제외한다면, 1에서 6까지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윤형 또한 나의 논지 중 개별적인 부분에는 찬성의 뜻을 표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학문을 규정하는 메타 학문'인 철학의 위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쓸린 나머지, '메타 학문'에 대한 개념 정의를 혼동하다가, 심지어는 '심리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 하기 어렵다'는 소리까지 하는 등, 너무도 많은 범위에서 너무도 많은 주장을 내놓고 있다. 바로 이런 엄밀하지 못한 태도가 대륙철학의 맥락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사회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추판다님이 이 논쟁에 참여하는 태도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실에 대한 참과 거짓을 밝히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이론을 단지 '철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철학이 현대 과학의 내용들을 마구잡이로 곡해하는 것에 당연히 반대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철학도들이 구체적인 분과 학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 스스로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려 있던 어떤 리플에 대해 대답하자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내 전공과 무관한 수학, 과학 도서들을 즐겨 읽는 편이다). 같은 요구를 철학의 고전들에 대해서까지 하는 일은 그렇다면 과연 합당할까?
생산적인 논점을 열어놓으면서 이 논쟁을 마무리짓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혹은 그가 대변하고 있는 전반적인 입장은, '잘못된 지식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철학의 고전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사례로 들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논거로 삼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을 '앞으로도 영원히 참일 것'이라고 말한 칸트의 철학 또한 시대의 유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수 있다시피,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의 모든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고전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단편적인 논의를 넘어, 언젠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2008-03-19
Lose Hope to Gain Confidence
고시생이나 '취업 준비생'등을 실업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3% 실업률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듯.
2008-03-17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라는 글을 통해, 한윤형은 라캉 컬트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 논쟁의 방향을, 과학 자체에 대한 것으로 전환시켰다. 이 글을 곰곰히 읽어나간 후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던 과정에서, 나는 과학이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착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서술함에 앞서, 한윤형이 말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을 먼저 하는 편이 논지의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라캉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하겠지만, 철학은 메타 학문이기 때문에 개별 학문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아이추판다님의 말을, 한윤형은 "논변적 오류"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분과 학문인 심리학에서 인정받는 내용이 심리에 관한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한다면, 현재의 심리학은 어떤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는가? 심리학은 라캉의 이론과 다른 그들의 방법론을 가지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을까?"
두 문장을 가만히 읽어 보면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전자는 '올바른 철학이라면 올바른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라는, 철학에 요구되는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반면 후자는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라면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추판다님의 문제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과연 심리학자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을 우선 던져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한윤형과 같이 나 또한 b)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그는 현재의 심리학이 반드시 철학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 철학이 서로 무관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윤형의 글의 논지를 미리 요약해보자. 그는 1. 심리학은 올바른 메타 이론, 즉 철학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2. 그것은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확실하거나 단일한 방법론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3. 그러므로 그들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정신분석에 대해 '과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가 되는 명제인 1.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심리학이 확실한 과학이라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철학적으로 메타화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더욱 정밀한 방법론을 확보할수록 그것이 의지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전제들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한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체물리학은 각각 어떤 철학적인 입장을 낳을 수 있을까? 지질학은? 곤충학은? 정보경제학은?
철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학적 지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약'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하나의 집단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논리적 반박'으로 이해했던 비엔나 학파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그 어떤 과학적 지식도 그것이 철학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많은 수의 철학도들은 비엔나 학파의 반 형이상학에 대해 '그것도 형이상학'이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그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과학에는 철학적 비약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어쨌건 과학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 연구 종사자들은 그러한 입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 중 두 번째 것도 자연스럽게 참이 아니게 된다. 심리학이 어떤 확고한 심리철학에 기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방법론이 난삽하고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럴 필요가 없어서이다. 과학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부분적인 탐구에서 출발한다. 물론 모든 물리학자들의 이상은 세계의 모든 법칙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또한 모든 물리학자들은 그것이 거의 달성 불가능한 꿈임을 잘 알고 있다. 단일한 철학적 입장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학문의 존립을 가르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신경생리학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전제한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환원론적 물리론자들이 신경생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가져다 쓰는 것이 참이고, 또한 신경생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 문제에 대해 전제하는 입장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라고 하더라도, 신경생리학이라는 분야의 발생과 발전은 환원론적 물리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신경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축적하고 있는 생리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반면 물리론적 환원주의는, 분석철학의 맥락을 벗어나 그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현대적인 생물학이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출발하고 있는 철학적 사조이다. 그러므로 양자에 대해 무엇이 무엇의 전제 조건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가지 입장 모두 각 분야에서 존중받을만한 업적을 내고 있다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환원론적 물리주의같은 지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심리학은 과학으로서 미흡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된다.
한윤형은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을 그 학문으로부터 추상화된 철학적 입장과 혼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그가 상정하고 있는 논적에게 "당연히 하나의 학문 안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입장들은 하나의 보편화를 추구합니다."라고 답변을 하며,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비해 심리학은 "삼선짬뽕"처럼 얽혀 있지 체계가 잡혀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위험천만한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여기서 "게다가 주류 경제학은 여러분의 친구인 친애하는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보다도 훨씬 엄밀한 학문 체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한윤형의 과학에 대한 오해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과학을 과학이게끔 해주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어림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논거가 빈약한 추측이지만, 아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한윤형이 경제학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맨큐의 경제학의 1장에 나오는 경제학의 열 가지 법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그 책을 직접 펴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맨큐가 말하는 열 가지 법칙은 강학상의 편의를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저 법칙들이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님을 맨큐 본인도 알고 있고, 그래서 유력한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여 대체로 9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보여주기까지 한다. 맨큐가 꼽은 열 가지의 원칙이 경제학자들을 위한 '사람은 죽는다'라고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열 가지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법칙만을 수립"하는 식으로 경제학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심리학도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 3단 논법의 대전제를 심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부당한 질문이 된다. 하지만 심리학 뿐 아니라 경제학, 아니 그 어떤 과학에 있어서도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뉴턴이 세워놓은 고전 물리학의 체계도 아인슈타인의 연구와 양자물리학자들의 반란에 의해 논박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학철학의 여명기, 혹은 혼란기가 도래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내가 남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이라고 해도 어떤 철학적인 원칙을 전제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만이 철학적으로 단일한 입장의 추상화를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비약은 가령 정신분석처럼 과학으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자주 일어난다.
과학적인 인식이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은 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공 상태에서만 갈릴레오의 법칙은 참이다', 그러므로 '고전물리학은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하여야만 성립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곤란하다.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한 것은 최초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공기나 물 같은 흐르는 유체 속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이 들려오지는 않는다. 과학에 대한 불투명한 논박들은, 이렇듯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그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분야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합리성을 지켜낸다. 물리학의 법칙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신경생리학자는 생명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한다. 과학적 인식이 제한적인 것은 이렇듯 그 대상을 좁히는 일이지, '우리는 모든 인간이 인센티브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는 식의 교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가설은 사고의 도구로서 기능하지만, 또한 경제학의 경우 그러한 원칙을 다른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는 스티븐 레빗 같은 학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정 과학적인 발전은 그와는 정 반대로 사고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전제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해주는 발견을 통해 이루어진다. 뉴턴 물리학에서는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두 행성 사이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중력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리로서 전제되었다.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수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드디어 아인슈타인이 그 불필요한 전제로부터 물리학을 해방시켰을 때 물리학자들은 새 시대의 문을 연 천재의 도래를 환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는 대상의 범위를 한정지음으로써, 그 안에서 합리적인 추측과 논박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검증 가능하도록 연구된 결과들은, 심리학자들의 저널에서 공유되고 또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검증과 비판의 기제이다. 과학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처음 이 논의를 촉발시킨 라캉의 정신분석 같은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라캉이 남겨놓은 유고들이 전부 공개되어 있지도 않다. 황우석이 벌인 사기극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것은 과학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위세에 눌리거나 상식 밖의 기만에 넘어간 이들 외의 누군가에 의해 반박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오만하다'는 식의 비판을 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과학자들이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이지 않은 지식을 구분하는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그러한 자체적 비판 기능이 살아있을 때 과학은 사회적으로도 건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아닌 것에 대한 인식은 과학인 것에 대한 인식에 선행한다. 그리고 대체로 과학자들이 '과학이 아니다'라고 판정짓는 대상은, 스스로 과학이라고 주장하며 그 아우라를 누리고자 하는 유사 과학들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범위 이상에 대해 진지한 판단을 하려 들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현대 과학은 풀뿌리 하나가 자라나는 현상조차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테제를 과학자들이 모두 떠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학에 대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 잘 안다. 오히려 과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굳이 그 사실을 복창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과학의 한계를 구태여 부르짖는 이들이야말로, 마치 '신은 자비롭지 않다'고 외치는 '무신론자'들처럼, 그 어떤 절대적인 지식이나 권위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은 라캉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하겠지만, 철학은 메타 학문이기 때문에 개별 학문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아이추판다님의 말을, 한윤형은 "논변적 오류"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분과 학문인 심리학에서 인정받는 내용이 심리에 관한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한다면, 현재의 심리학은 어떤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는가? 심리학은 라캉의 이론과 다른 그들의 방법론을 가지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을까?"
두 문장을 가만히 읽어 보면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전자는 '올바른 철학이라면 올바른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라는, 철학에 요구되는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반면 후자는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라면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추판다님의 문제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과연 심리학자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을 우선 던져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한윤형과 같이 나 또한 b)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그는 현재의 심리학이 반드시 철학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 철학이 서로 무관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윤형의 글의 논지를 미리 요약해보자. 그는 1. 심리학은 올바른 메타 이론, 즉 철학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2. 그것은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확실하거나 단일한 방법론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3. 그러므로 그들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정신분석에 대해 '과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가 되는 명제인 1.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심리학이 확실한 과학이라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철학적으로 메타화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더욱 정밀한 방법론을 확보할수록 그것이 의지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전제들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한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체물리학은 각각 어떤 철학적인 입장을 낳을 수 있을까? 지질학은? 곤충학은? 정보경제학은?
철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학적 지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약'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하나의 집단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논리적 반박'으로 이해했던 비엔나 학파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그 어떤 과학적 지식도 그것이 철학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많은 수의 철학도들은 비엔나 학파의 반 형이상학에 대해 '그것도 형이상학'이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그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과학에는 철학적 비약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어쨌건 과학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 연구 종사자들은 그러한 입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 중 두 번째 것도 자연스럽게 참이 아니게 된다. 심리학이 어떤 확고한 심리철학에 기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방법론이 난삽하고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럴 필요가 없어서이다. 과학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부분적인 탐구에서 출발한다. 물론 모든 물리학자들의 이상은 세계의 모든 법칙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또한 모든 물리학자들은 그것이 거의 달성 불가능한 꿈임을 잘 알고 있다. 단일한 철학적 입장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학문의 존립을 가르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신경생리학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전제한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환원론적 물리론자들이 신경생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가져다 쓰는 것이 참이고, 또한 신경생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 문제에 대해 전제하는 입장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라고 하더라도, 신경생리학이라는 분야의 발생과 발전은 환원론적 물리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신경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축적하고 있는 생리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반면 물리론적 환원주의는, 분석철학의 맥락을 벗어나 그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현대적인 생물학이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출발하고 있는 철학적 사조이다. 그러므로 양자에 대해 무엇이 무엇의 전제 조건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가지 입장 모두 각 분야에서 존중받을만한 업적을 내고 있다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환원론적 물리주의같은 지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심리학은 과학으로서 미흡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된다.
한윤형은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을 그 학문으로부터 추상화된 철학적 입장과 혼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그가 상정하고 있는 논적에게 "당연히 하나의 학문 안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입장들은 하나의 보편화를 추구합니다."라고 답변을 하며,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비해 심리학은 "삼선짬뽕"처럼 얽혀 있지 체계가 잡혀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위험천만한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여기서 "게다가 주류 경제학은 여러분의 친구인 친애하는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보다도 훨씬 엄밀한 학문 체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한윤형의 과학에 대한 오해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과학을 과학이게끔 해주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어림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논거가 빈약한 추측이지만, 아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한윤형이 경제학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맨큐의 경제학의 1장에 나오는 경제학의 열 가지 법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그 책을 직접 펴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맨큐가 말하는 열 가지 법칙은 강학상의 편의를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저 법칙들이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님을 맨큐 본인도 알고 있고, 그래서 유력한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여 대체로 9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보여주기까지 한다. 맨큐가 꼽은 열 가지의 원칙이 경제학자들을 위한 '사람은 죽는다'라고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열 가지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법칙만을 수립"하는 식으로 경제학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심리학도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 3단 논법의 대전제를 심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부당한 질문이 된다. 하지만 심리학 뿐 아니라 경제학, 아니 그 어떤 과학에 있어서도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뉴턴이 세워놓은 고전 물리학의 체계도 아인슈타인의 연구와 양자물리학자들의 반란에 의해 논박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학철학의 여명기, 혹은 혼란기가 도래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내가 남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이라고 해도 어떤 철학적인 원칙을 전제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만이 철학적으로 단일한 입장의 추상화를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비약은 가령 정신분석처럼 과학으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자주 일어난다.
과학적인 인식이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은 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공 상태에서만 갈릴레오의 법칙은 참이다', 그러므로 '고전물리학은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하여야만 성립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곤란하다.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한 것은 최초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공기나 물 같은 흐르는 유체 속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이 들려오지는 않는다. 과학에 대한 불투명한 논박들은, 이렇듯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그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분야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합리성을 지켜낸다. 물리학의 법칙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신경생리학자는 생명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한다. 과학적 인식이 제한적인 것은 이렇듯 그 대상을 좁히는 일이지, '우리는 모든 인간이 인센티브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는 식의 교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가설은 사고의 도구로서 기능하지만, 또한 경제학의 경우 그러한 원칙을 다른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는 스티븐 레빗 같은 학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정 과학적인 발전은 그와는 정 반대로 사고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전제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해주는 발견을 통해 이루어진다. 뉴턴 물리학에서는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두 행성 사이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중력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리로서 전제되었다.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수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드디어 아인슈타인이 그 불필요한 전제로부터 물리학을 해방시켰을 때 물리학자들은 새 시대의 문을 연 천재의 도래를 환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는 대상의 범위를 한정지음으로써, 그 안에서 합리적인 추측과 논박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검증 가능하도록 연구된 결과들은, 심리학자들의 저널에서 공유되고 또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검증과 비판의 기제이다. 과학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처음 이 논의를 촉발시킨 라캉의 정신분석 같은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라캉이 남겨놓은 유고들이 전부 공개되어 있지도 않다. 황우석이 벌인 사기극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것은 과학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위세에 눌리거나 상식 밖의 기만에 넘어간 이들 외의 누군가에 의해 반박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오만하다'는 식의 비판을 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과학자들이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이지 않은 지식을 구분하는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그러한 자체적 비판 기능이 살아있을 때 과학은 사회적으로도 건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아닌 것에 대한 인식은 과학인 것에 대한 인식에 선행한다. 그리고 대체로 과학자들이 '과학이 아니다'라고 판정짓는 대상은, 스스로 과학이라고 주장하며 그 아우라를 누리고자 하는 유사 과학들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범위 이상에 대해 진지한 판단을 하려 들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현대 과학은 풀뿌리 하나가 자라나는 현상조차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테제를 과학자들이 모두 떠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학에 대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 잘 안다. 오히려 과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굳이 그 사실을 복창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과학의 한계를 구태여 부르짖는 이들이야말로, 마치 '신은 자비롭지 않다'고 외치는 '무신론자'들처럼, 그 어떤 절대적인 지식이나 권위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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