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3

아리스토텔레스와 귀머거리 곤충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서는 플라톤 다음으로 거론되지만, 생물학으로 넘어오면 그 학문의 비조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생물들을 분류하였고,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중세 이후까지 통용되던 분류표를 만들었다. 그가 주장한 생기론은 19세기까지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을 곧이곧대로 믿는 생물학자가 존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문을 최초로 개시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직접 하지 않았다. 흔히 드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말의 이빨이 몇 개냐'고 물으면 눈 앞에 있는 말의 이빨을 세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뒤져서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한 관찰 결과를 가톨릭 신학의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은 것 등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근대 철학의 고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던 관찰과 실험을 자기도 직접 해보겠노라고 나선 이들이 만든 것들이다. 새로운 오르가논을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을 가장 앞에 놓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새로운 운동 법칙을 만들어내기 위해 데카르트는 뭔가 이상한 도식을 개발해내는데, 그 내용은 데카르트 생전에 논박당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뉴턴이 빛을 통한 인간의 시각적 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바늘로 자기 눈의 수정체를 찔러서 조작하다가 실명할 뻔 했다는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인지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하고 있기도 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는 오감 중 기억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감관은 청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동물들을 쭉 관찰해본 결과, 우선 사람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기억하고, 개처럼 지능이 있는 동물들도 익숙한 소리를 들으면 반응을 한다. 이들에게는 외부의 지각 대상을 기억하여 자기 속에 갈무리했다가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반면 벌은 옆에서 징을 때려도 놀라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곤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짓고 군집생활을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본성적으로 타고난 어떤 지식이 있기 때문이며, 그 지식은 '벌들의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벌은 죽어서도 벌로 태어나지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할 수 없다. 막판으로 가면 결론이 이상하게 빠지는데 거기에는 일단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과 동물과 곤충을 모두 관찰하고, 당시에 가능하던 방법을 동원하여 실험도 해 본 다음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초기, 즉 우리가 아는 고전들이 생성되던 당시만 해도, 철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과학적인 발전의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습득하는 모습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모르는 게 없었다. 스피노자가 안경알을 깎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요즘 안경점에 앉아있는 직원을 연상하는데, 당시는 광학이 막 발전하던 시대였고 렌즈를 가공하는 것은 그런 첨단 과학의 소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실험실의 실험 보조 내지는 기자재 납품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과학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그쯤 되면 대충 과학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수학자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철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습득을 포기한 사건이 언제부터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자체가 철학사적 연구 과제일 것인데, 관련 도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시간' 개념을 들고 아인슈타인에게 논쟁을 걸었다가 참혹하게 무시당한 이후,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을 올바르게 습득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분석철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한 수학, 논리학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로 공격한 대상은 이른바 '일반 형이상학'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4권 1장에서 말한 바로 그런 형이상학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문법적 착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거의 모든 논의를 무화시켰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던 하이데거를 안주거리 삼아 대륙철학과의 거리를 한없이 벌려놓는다.

하지만 '특수 형이상학', 가령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등은 애초에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렇기에 언제나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철학이, 니체가 선언하기 이전부터 신과는 결별해버린 상태로 근 20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며, 덕분에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적 문제는 오직 신 스콜라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로 인해 고전적인 인식론이 특히 공격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신 스콜라 철학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성채를 끝내 지키고 있다. 그 외의 근대 철학의 사조들은 과학의 발전 앞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할 운명이다.

심리학적 발견이 철학의 인식론의 내용을 반박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고전으로 대접하는 텍스트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치열한 현재성마저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이 더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까지 탐구를 펼친 선구자들이다. '그 결론에 따르면 대륙철학의 많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므로 심리학적인 발견을 직접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윤형의 주장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대륙철학의 전통을 불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 적지 않은 부분은 '말의 이빨을 잘못 센' 기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될 뿐이다.

과학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과학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철학도'들의 모습이 이번 논쟁을 통해 숱하게 발견된 것 같아서 매우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들은 심지어는 아직까지는 과학을 통해 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대륙철학의 텍스트를 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지식을 직접적으로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지적인 토론도 아니고 그냥 자해공갈일 뿐이다.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철학의 문제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확인하고, 한 철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깊게 독해하면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력을 기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식을 흡수하는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텍스트를 부여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눈을 돌리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귀머거리 곤충일 뿐이다.

댓글 1개:

  1. 유럽과 근대. 그리고 과학. 대화하고 싶은, 혹은 공부를 하고 싶은 많은 부분들이 보입니다. 과학의 계보학은 꼭 한번 깊게 공부를 해야 할 것 같긴 합니다.

    각설하고, 한윤형님 등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인문학도들이. '과학적 지식'을 부정한다거나. 철학만의 영역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오해의 여지만큼 소통의 여지 또한 열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관련된 논쟁들이 다분히 감정적으로 흐르는 것이 조금 우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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