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어 번역본을 읽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 학계에서도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연구하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특히 하이데거처럼 독일어의 어감에 의지하여 작업을 진행한 이에 대한 논문이 순전히 영역본에 기대어 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This is later Heidegger's way of reinscribing his earlier claim that Dasein, human being, is Being-in-the-world--the basic thesis of Division I of Being and Time"같은 표현을 접했을 때 드는 막대한 당혹감은 또 어떤가. 현존재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저렇게 단순하게 이해하지 말라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15판에 자신이 달아놓은 주를 통해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 그렇지만 존재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실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다음의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세계-내-존재는 전체로서의 존재에 대한, 즉 존재이해에 대한 실존의 연관을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28,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서울: 까치, 1998))
짐작컨대 저 주석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특히 사르트르)을 떨쳐내기 위해 달아놓은 것일테지만, 현존재에 대한 너무도 단순한 이해는 미국에서도 돋보인다. 그리고 결론부의 "The skeptic's discomfort with the idea that our mutual intelligibility rests on nothing deeper than our form of life is understandable"이라는 문장과 맞닥뜨리면, '지금 《확실성에 관하여》쓴 비트겐슈타인 무시하나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이게 대체 뭐지?
문제의 논문은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의 2001년 9번째 호에 실렸다고 한다. 분석철학이 거두고 있는 성과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대륙철학의 텍스트에 대해 미국 학자들이 하는 말을 왜 아무도 듣는 척 하지 않는지만큼은 확실히 알 것도 같다. 여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간극이 있는데, 과연 그걸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라캉 논쟁을 통해 '대륙철학의 존립 근거' 따위를 머리에 넣고 굴리다가, 우연찮게 '미국 철학'의 텍스트를 읽어본 소감은 대략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