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4

미국 철학계의 대륙철학 이해

《존재와 시간》을 읽다가 문득,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론이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 분석과 통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싶어서, 관련된 논문을 찾기 위해 구글에서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그 결과 Edward Minar라는 사람이 쓴 "Heidegger, Wittgenstein, and Skepticism"이라는 논문이 뜨길래, PDF를 다운받아서 읽으려고 했는데 문장이 다소 거칠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출력해서 정독했는데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우선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어 번역본을 읽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 학계에서도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연구하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특히 하이데거처럼 독일어의 어감에 의지하여 작업을 진행한 이에 대한 논문이 순전히 영역본에 기대어 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This is later Heidegger's way of reinscribing his earlier claim that Dasein, human being, is Being-in-the-world--the basic thesis of Division I of Being and Time"같은 표현을 접했을 때 드는 막대한 당혹감은 또 어떤가. 현존재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저렇게 단순하게 이해하지 말라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15판에 자신이 달아놓은 주를 통해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 그렇지만 존재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실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다음의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세계-내-존재는 전체로서의 존재에 대한, 즉 존재이해에 대한 실존의 연관을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28,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서울: 까치, 1998))

짐작컨대 저 주석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특히 사르트르)을 떨쳐내기 위해 달아놓은 것일테지만, 현존재에 대한 너무도 단순한 이해는 미국에서도 돋보인다. 그리고 결론부의 "The skeptic's discomfort with the idea that our mutual intelligibility rests on nothing deeper than our form of life is understandable"이라는 문장과 맞닥뜨리면, '지금 《확실성에 관하여》쓴 비트겐슈타인 무시하나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이게 대체 뭐지?

문제의 논문은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의 2001년 9번째 호에 실렸다고 한다. 분석철학이 거두고 있는 성과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대륙철학의 텍스트에 대해 미국 학자들이 하는 말을 왜 아무도 듣는 척 하지 않는지만큼은 확실히 알 것도 같다. 여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간극이 있는데, 과연 그걸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라캉 논쟁을 통해 '대륙철학의 존립 근거' 따위를 머리에 넣고 굴리다가, 우연찮게 '미국 철학'의 텍스트를 읽어본 소감은 대략 이렇다.

영상 두 개



전 메가스터디 스타 강사인 이범의 심상정 지지 동영상. 학원 강사가 공교육 강화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상황이다. 6분 이후 나오는 쓸데없는 이미지컷이 에러이긴 하지만, 학원 강사답게 요점만 집어서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4월 3일 손석희의 시선집중. 심상정과 한평석 후보 인터뷰. 단일화가 되건 되지 않건, 부친상 기간동안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흘 공백이 있었지만 그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막판 유세에 힘을 기울인다면 역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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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0

공익 추구와 사실 보도

- 정의와 국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신문을 만드는 데 있어 항상 갈등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국익이 있고, 야당이 생각하는 국익이 있고, 신문도 저마다 다르게 국익을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은 국익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십니까.

“공익이나 국익, 정의가 중요한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은 늘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행동도 국익이나 정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것이 참으로 정의, 국익이 되려면 실현하는 수단은 정의로운지 봐야 합니다. 정의나 국익이란 것이 책임을 기피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말씀 드리자면, 며칠 전 여러 신문에서 대학 강사가 미국 오스틴에서 자살한 사건을 다뤘어요. 비정규직 강사들의 부당한 대접에 공감하기 때문에 유심히 기사를 봤어요. 전적으로 강사들의 처우가 부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16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가서 호텔에서 자살한 것을 보면 책임 있는 어머니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볼 때 사회정의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어요.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가서 자살했으면, 다른 이유도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보도해야 해요. 사회정의의 관점에서만 처리하지 말고 좀더 사실적인 보도를 했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강사 처우 문제로 가버려 충분히 해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사회정의 국익, 이런 것이 우리의 사고를 단축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먼저 탐색하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해요.”(김우창, 대담 이대근, ""위기의 한국 언론,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 《경향신문》, 2008년 3월 29일 8-9면)

물론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약한 '팩트'에 기반하여 의견을 내놓았다가 틀리는 모습을 못 본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부족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라는 점에서 짚어둘 가치가 있다.

이론가의 위의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은 임상의고 지젝은 문화비평가야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임상에 쓰이는 정신분석의 기법이 문화비평에 쓰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는 한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의 문화비평은 유추에서 출발한 곡예일 수밖에 없지 (노정태,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노정태의 블로그, 2008년 3월 12일))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라캉을 문화분석에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문화”라는 사회적 대상으로 옮겨왔을 때 과연 그 이론의 인식론적 토대는 절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임슨이 시인하듯이, 라캉을 “알레고리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알튀세르, 제임슨, 지젝, 바디우처럼 라캉을 사용하는 이론가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라캉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이론에서 항상 라캉은 철학자의 얼굴을 하고 출몰한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문화분석에서 라캉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택광, "라캉, 수용의 문제: 문화분석에서 라캉 사용하기"(WALLFLOWER, 2004년 12월 17일))


'라캉 논쟁'을 통해 (적어도 '철학과'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잠정적으로 합의된 바와 같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닌 그 무언가로 규정함으로써 라캉을 '사이비'의 덫으로부터 구원해낸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레고리적"으로 활용되기만 하는 이론가의 위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가령 《사도 바울》에 등장하는 바디우의 보편성 논의에 라캉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가? 그것은 프랑스의 라캉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통행세 같은 것 정도가 아닐까? 막 《사도 바울》을 읽은 후 '바디우'라는 키워드로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예전에는 눈여겨 읽지 않았던 글을 발견하였다. 거기서 최근 논의되었던 부분에 대한 언급을 따서, 일단 기록을 위해 붙여놓는다.

진보신당 TV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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