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30

이론가의 위의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은 임상의고 지젝은 문화비평가야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임상에 쓰이는 정신분석의 기법이 문화비평에 쓰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는 한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의 문화비평은 유추에서 출발한 곡예일 수밖에 없지 (노정태,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노정태의 블로그, 2008년 3월 12일))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라캉을 문화분석에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문화”라는 사회적 대상으로 옮겨왔을 때 과연 그 이론의 인식론적 토대는 절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임슨이 시인하듯이, 라캉을 “알레고리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알튀세르, 제임슨, 지젝, 바디우처럼 라캉을 사용하는 이론가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라캉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이론에서 항상 라캉은 철학자의 얼굴을 하고 출몰한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문화분석에서 라캉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택광, "라캉, 수용의 문제: 문화분석에서 라캉 사용하기"(WALLFLOWER, 2004년 12월 17일))


'라캉 논쟁'을 통해 (적어도 '철학과'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잠정적으로 합의된 바와 같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닌 그 무언가로 규정함으로써 라캉을 '사이비'의 덫으로부터 구원해낸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레고리적"으로 활용되기만 하는 이론가의 위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가령 《사도 바울》에 등장하는 바디우의 보편성 논의에 라캉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가? 그것은 프랑스의 라캉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통행세 같은 것 정도가 아닐까? 막 《사도 바울》을 읽은 후 '바디우'라는 키워드로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예전에는 눈여겨 읽지 않았던 글을 발견하였다. 거기서 최근 논의되었던 부분에 대한 언급을 따서, 일단 기록을 위해 붙여놓는다.

댓글 4개:

  1. 어휴, 노정태 선생님, 벌써 그 책 읽으셨군요.. 굽신굽신.. 저 같이 민중의 고혈이나 빨아먹는 자가 어찌 선생을 마주하겠습니까.. OTL OTL..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소위 대륙철학 이후로부터.. 꼭 알레고리라고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수용되지 않는 철학이 있던가여.. 굽신굽신.. 모르는게 죄는 아니잖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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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엄... 잘은 모르겠지만... 니체는 철학자가 아니라 롹커로 수용되어 온 것 같기도 한데, 음... 음... 곤란한 질문은 앞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모르는 걸 물어보는 건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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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런데 이택광 선배라고 할 때 선배의 의미가 뭐에요? 학교 선배신가요?
    이택광 씨라고 안하고 이택광 선배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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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개인적인 친분이 있죠. 그냥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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