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7

떡밥을 물지 말아야 하는 이유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수사기관은 완결되지도 않은 수사 내용을 조금씩 조금씩 언론에 흘린다. 기자들은 그것을 받아 적고, 데스크에서는 가장 자극적인 제목을 골라 뽑는다. 그 뉴스를 읽고 독자들은 ‘진실’이 뭐냐, ‘...설’의 팩트는 뭐냐, 왈가왈부 따지기 시작한다. 정작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는 것은 그저, 피의자의 황폐해진 영혼 뿐이다. 그는 설령 수사결과가 무죄로 나온다 해도, 사회가 자신을 평생 죄인 취급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은 선택은 결백을 주장하며 목숨을 던지는 것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살설 따위를 놓고 벌어지는 인터넷상의 설왕설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많은 이들은 쉽게 말한다. 조선일보가 문제야, 언론의 선정성이 문제야, 쯧쯧.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 사람부터가, 그 언론에서 흘리는 파편적인 정보를 놓고 누가 진범이네 아니네, ‘시나리오’가 이렇게 나오네 저렇게 나오네, 여론재판에 슬그머니 참여해버린다. 좋은 언론은 결국 좋은 독자가 만들고, 좆같은 언론은 좆같은 독자새끼들이 만드는 거다. 조중동 뿐 아니라 모든 언론이 싸구려스럽다면, 그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 특히 ‘...설’에 혹하는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아, 정신 좀 차려라. 이러다가 그 경호원 자살하겠다.

지금 똑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나가던 등산객의 증언, 번복되는 진술, 과연 진실은? 이게 지금이다. 일주일 전에는 이랬다. 박연차 회장의 증언, 번복되는 노무현의 진술, 과연 진실은? 타살설이니 뭐니 하는 떡밥을 덥썩 무는 순간, 당신도 결국 조선일보 독자들과 다를 바 없는 팩트 골룸이 될 뿐이다.

안티조선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언론운동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조선일보의 공신력이야 떨어졌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성취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를 욕하는지, 왜 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을 ‘진실 게임’으로 몰아가고, 한 개인의 공적 판단과 선택을 그의 신변잡기와 연루시키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의 황색 저널리즘을 이겨내는 방법은, 언론의 소비자들이 그런 천박한 ‘팩트’에 관심을 끄고 오직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담론을 쌓아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대체 그 죽음이 왜 닥쳐와야만 했는지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기 바란다. 검찰은 확인되지도 않은 범죄 사실을 언론에 계속 흘렸고, 언론은 그것을 확대재생산했다. 그러한 전방위적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노 전 대통령의 경호원에 대한 수사는, 경찰에서 조용히 하면 되고, 수사 결과 공개는 모든 사실이 확인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사안이 시급하다면, 경찰은 우선 완전히 확인된 사실부터 공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도 최대한의 신중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어떤가? 이미 또 하나의 여론재판이 시작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며 그 여론재판에 끼어드는 사람들, 당신들도 이미 공범이다.

조중동이 어쩌고 저쩌고, 좆중동이네 마네 욕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조선일보 못 이기는 이유가 딴 게 아니다. 그놈의 달콤한 ‘팩트’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거 살살 흘리면서 애간장 타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조선일보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 그래서 정작 지나고 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피의자는 병신 되어 있고 정작 ‘진실’은 과도한 ‘팩트’의 무더기에 갇혀버리고, 환기되었어야 하는 여론의 방향은 오직 ‘진실 게임’에만 쏠려버리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도 딱 그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그놈의 타살설 때문에 지금 묻혀진 이야기가 뭔지 잘 생각해보라.

서울시청 광장 봉쇄를 둘러싸고, 27일 수요일, 시민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져 가고 있었다. 타살설이 운위되기 전까지 그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고 있기도 했다. 정부도 아닌 일개 지자체 서울시가, 국민들의 집회의 자유를 완벽하게 억압하고 있다. 사실상의 집회허가제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그런데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타살설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선량한 사람들 덕분에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네, 진실 좋죠. 잘 찾아보세요. 이미 조선일보는 웃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팩트 골룸’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지만, 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놓고 제 깜냥으로 시나리오 써가며 왈가왈부하느라, 정작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을 놓쳐버리는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선일보가 문제라고? 부스러기 ‘팩트’를 줏어먹는 당신 같은 독자가 있는 한, 조선일보는 망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망한다 해도 어차피 같은 식으로 장사하는 다른 언론이 등장할 것이다. 그 품위 없는 언론은 결국 품위 없는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언론과 검찰의 수사가 노무현을 죽였다. 이제 그의 경호원도 칼날 위에 서게 되었다.

제발, 그만하자. 떡밥을 물지 말자. 당신들이 낚이는 한 저들은 영원히 낚게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독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듯이, 한겨레의 독자들이 노무현의 경호원을 죽이는 모습을 나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사회적 타살’은 바로 그렇게 저질러진다. 떡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그것을 물고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호응이 다시 한 번 큰 죄를 저지르기 전에, 제발 그만 좀 하잔 말이다.

2009-05-23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고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바보처럼 돌아가셨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05-21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알타이연합론인가 대동아공영권인가?

‘우리 핏줄’ 몽고, 혹은 변태적 혈통주의

짙은 안개 속에서 탈옥한 죄수는,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한 바퀴 빙 돌아 원래 갇혀있던 교도소로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민족문학’의 첨병이었던 왕년의 대문호 황석영의 이른바 ‘변절’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오리무중 속에서 걷고 걷다보니, 결국 또 하나의 제국주의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황석영이 주장하는 이른바 ‘알타이연합’, 그 논리를 천천히 짚어보도록 하자.

우선 그 ‘알타이’라고 통칭되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을 한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저 공통되는 것은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언어학상의 한 분류뿐인데, 그나마도 한국어가 정말 거기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이견이 존재한다. 바이칼 호수에서 태어난 위대한 민족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우길 수야 있겠지만, 현대의 맥락에서 보자면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혈통적 공통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굳이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면, 생판 본 적 없는 16촌 친척이 다가와 사업하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할 때의 그런 ‘친척’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선조가 되는 사람들과 ‘몽고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혈연 교배를 했던 시점은 다름아닌 몽고 강점기이다. 고려의 국왕은 반드시 몽고 여인과 결혼해야 했고, 그걸 보고 좋다고 권문세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국제 결혼’ 시키기에 바빴던 시절이니만큼, 왕성한 혈연 관계가 맺어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당시 그런 국제 결혼을 통해 혈연관계를 뒤섞은 후, ‘우리는 모두 몽고의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은 몽고인들이었을까, 아니면 고려인들이었을까? 혹은 고려의 지배계급이었을까 아니면 고통받는 민중들이었을까?

‘알타이 연대’의 근간에 깔려 있는 혈통주의에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만약 고려와 몽고가 한 핏줄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몽고강점기에 벌어진 지배층간의 대규모 국제 결혼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정복당한 나라의 후손들이 그걸 마치 자랑인 양 떠벌리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몽고강점기 당시 백성들은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다. 반면 권력을 잡고 있던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몽고에 줄을 대기 위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알타이 문화권’을 주장하는 것은 ‘몽골리안의 핏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낫다. 전자는 공허할 뿐이지만 후자는 변태적이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5월8일자 40면  
 
알타이연합론 ≒ 대동아공영론

이쯤 되면 황석영의 ‘알타이 연합론’은, 황석영에 앞서 일찍이 몽고 타령을 시작한 몽고반점 얼리어덥터 조갑제의 ‘기마민족 정복자론’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징기스칸과 함께 전 세계를 정복한 게 아니라, 그에게 정복당한 세계 중 일부에 불과했다. 원나라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가로 상당한 수혜국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고려가 몽고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효도르에게 두들겨 맞고 암바 걸려서 실신했다가, 나중에 효도르가 찾아와서 같이 술 한 잔 한다고 해서, 얻어터진 약골이 효도르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려가 원나라와 함께 외국에 원정을 나간 적이 있었긴 하다. 고려 민중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대 함대를 건설하고,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 병사들을 대신하여 엄청난 숫자의 고려 병사들이 출전했는데, 일본에서 폭풍이 불어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어버린 그 사건 말이다. 대체 ‘우리(몽고+고려)’가 정복해낸 게 뭔가? 기마민족의 기상,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강간하는 사나이의 모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몽고 타령, 알타이 타령, 바이칼호에서 뿜어져나온 우리 민족의 기상 타령, 이 모든 것들이 기대고 있는 지점은 동일하다. 힘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에 대한 갈망,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서 황석영의 ‘알타이연합론’은 일제 강점기 문인들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찬성과 공통분모를 지니게 된다. 정복당한 자들이 정복한 자들과 자기동일시하려 하고, 급기야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몽고 밑에서 2등 부마국이 되었으니 몽고와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일제시대의 문인들은 일본 밑에서 ‘내선일체’를 달성하면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될지 모른다며 학도병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황석영은 알타이 문화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마치 가미카제 전사처럼 폭탄을 짊어지고 이명박호의 갑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던 논리나, 황석영을 포함한 ‘범 몽고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이름 하에 몽골리안 국가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논리나, 양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도 않다. 한민족이 살기에 한반도는 너무 좁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 반면 저 넓은 대륙에는 인구는 없지만 풍부한 자원과 개척되지 않은 광활한 영토가 있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니깐. 우리가 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나라는 사실 따지고보면 먼 친척이기 때문에, 친척끼리 도와주는 거지 정복하는 게 아니라고? 일제가 하면 폭력적 침탈행위지만 우리가 하면 정당한 자본 투자일 뿐이라고? 일제도 그렇게 말했다. 서양 세력이 총칼을 앞세워 폭력적인 근대화를 강요할 때, 일본은 정당한 자본 투자를 한다고. 아시아인의 공통성에 주목하자고.


대한민국, 이미 제국주의 국가일지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일 뿐이다. 민족주의의 허울을 씌운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이미 대한민국의 자본은 그런 공허한 수사 없이도 공공연히 해외 ‘진출’을 하고 나선 상태이다.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사안만 살펴보도록 하자.

1987년 6월10일, 한국의 직선제 개헌 쟁취는 숱한 아시아 국가 민중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1988년 8월8일, 버마의 민중들은 대규모 봉기를 감행했다. 그런데 버마의 군부는, 애초에 국민을 위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렇게 8888은 진압되었고, 아직도 버마의 봄은 멀다.

문제는 버마(미얀마)의 연근해에서 천연가스를 뽑아내고 있는 한국 기업이, 바로 그 미얀마 군부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정환닷컴에 따르면, 대우인터네셔널은 버마에서 투자가치 4580억원에 이르는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다. 그 수입 중 버마 군부에게 들어가는 것은 86억4천만 달러로, 이는 그 나라의 국민총생산보다 많은 액수이다. 국민들이 죽건 말건 군부가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기업 덕분인 것이다. 게다가 대우인터내셔널의 최대 주주는 자산관리공사이며, 그와 무관하게 한국가스공사도 그 가스전의 개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별게 아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의 이익 때문에 사람이 죽건 말건,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프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더 넓은 땅에서 웅비를 떨치고 싶고, 칭얼칭얼 징징징징거리고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것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런 ‘진출’에는 사실 민족이니 알타이니 하는 수사도 그리 필요치 않다.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의 한복판에 벨기에 영토의 절반 크기나 되는 농장을, 무려 99년간 무상으로 임대받는 계약을 체결했을 때, 그게 ‘우리 민족’이어서 그랬겠는가 말이다. 결국 마다가스카르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시위대의 대표는 대우로지스틱스와의 계약을 해지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황석영이 꿈꾸는 몽고의 거대 농장과, 마다가스카르의 옥수수 농장이 다를 게 뭔가? 설마 아프리카 동남부의 섬 마다가스카르의 원주민들도 우랄 알타이 어군에 속하나? ‘우리 핏줄’인가?


알타이연합? 알타리김치나 드세요

온갖 비장미를 풍기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나선 황석영만큼이나, ‘문학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상상할 권리가 있다’며 그를 옹호하고 나선 김지하의 발언 또한 난망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김지하 본인이 촛불을 보면 촛불에서 율려를 보고,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보면 또 거기서도 율려를 보는 사람이니만큼, 황석영이 이명박 정부를 중도 실용주의로 평가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겠다.

하지만 케인즈의 말마따나 자신이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받아적고 있다고 여기는 광인 또한, 결국 어느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듯이, 황석영의 알타이공동체론은 100여년 전 일본인들이 떠들었던 시덥잖은 제국주의 옹호론의 헛된 변주일 따름이다. 그나마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제국주의에 필요한 국제 정세 인식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황석영 본인은 자신이 “알타이 연합을 통해 지역적 균형을 이루면서 중국, 일본과도 건설적으로 협력하고, 그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남북의 연방연합 논의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이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는데, 제발 이런 소리를 할 때에는 지도를 펴놓고 했으면 좋겠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래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아프가니스탄의 아래에는 파키스탄이 있으며, 파키스탄과 이란은 동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 일본과의 건설적 협력”과 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덜란드가 프랑스, 독일과의 건설적 협력을 위해 한국에 투자하고, 궁극적으로는 벨기에와의 1830년 이래의 분단을 넘어서 하나의 국가로 나가려고 한다고, 어느 네덜란드 작가가 말했다고 쳐보자. 타자를 치면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제발 꿈 좀 깨시라.

물론 문학가의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황석영이라는 최고 수준의 예술가가 내놓은 상상이라 보기에, ‘알타이연합’은 너무도 조악하고 유치하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와서 내놓은 구상이라고는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폼나는 소리니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산티아고에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 싶다. 의미 없이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며, 여행지에서 문득 마주친 풍경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를 성찰하는 여행기를 쓰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산티아고가 제격이니 말이다. 물론 서점가에는 ‘산티아고 여행기’가 넘쳐나지만 황석영이 하면 다르지 않겠는가. 먼길 떠나기가 힘드시다면 자택에서 알타리김치에 보리밥 한 그릇 석석 비벼 자시고, 푹 주무시고 일어나신 다음, <풍물기행 세계를 가다>, <W> 같은 프로를 보며 대륙의 꿈을 보듬으시는 것도 강추할 만하겠다.

2009-05-18

『예수전』 일별

예수전 - 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오래간만에 여유가 생겨서 교보문고에 들렀다.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이 매대에 놓여 있었다. 디자인과 만듬새가 좋아서 들춰보았는데, 저자가 전제로 삼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항은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가 가장 오래 전에 작성되었으며, 종교적인 가필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4복음서중 마가복음이 가장 이른 시점에 나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덜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설교하는 대신 전도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혈남아인데, 그것은 마가복음을 편찬한 집단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 연구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의 출처를 대략 다음과 같이 짐작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기독교 집단에서 편찬되었으며,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이방민족을 위한 전도를 염두에 두었던 분파의 것이고, 누가복음은 좀 더 후기의 로마 기독교인들이 집성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라 각 복음서의 개별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은 말도 안 되게 예수의 탄생설화를 비비 꽈서 '다윗의 14대손'으로 맞춰놓는다.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로마, 혹은 로마에서 가까운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로마인들과 이방인(즉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에게 온정적이다. '덜 종교적'인 마가복음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사도처럼 열성적으로 뛰어다닌다.

중요한 건 이러한 모습이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개념적 장치를 동원하여 엄연히 자신이 종교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예수("내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치인들이 탈정치적인 제스추어를 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 종교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긴 한 사람을 탈종교적인 누군가로 만들려 하는 것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탈정치의 시대가 정치적 타락을 낳았듯, 이러한 탈종교적 해석이 정치적 선보다는 종교적 악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우려한다.

나 또한 그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 것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인간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인간 예수'는 자신이 불러올 파장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가장 급진적인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마가복음에 대한 김규항의 취향은 존중해줄 수 있지만, 오직 그것만이 '올바른' 예수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는 종교에 의해 오염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김규항의 논법대로 작성 시기가 가장 앞서기 때문에 마가복음에 다른 복음서를 압도하는 권위를 부여한다면, 마가복음보다 앞서 저술·편찬되었을 뿐 아니라 저자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밝혀진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그보다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김규항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술이 마태, 누가의 내용이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가복음보다 앞서 쓰여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이후 복음서에 등장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술과 일치하며, 더구나 저자인 바오로를 포함한 오백 명이 넘는 증인을 열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마가복음의 뒷부분이 가필된 것일 가능성이야 적지 않겠지만, 그것을 '불순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수와 함께 살고 밥을 먹고 마셨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 전승으로 남아 있었고, 그게 바로 '종교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2009-05-07

돼지독감, 아프가니스탄 동물원

미디어스에 격주로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첫 꼭지로 '돼지독감'에 대해 썼다.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미디어스, 2009년 5월 6일) 참조. 블로그 링크는 여기. FP 마감을 하느라 밤을 새면서 쓴 것이어서, 완전히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링크를 걸어도 어차피 안 읽을 사람들은 죽어도 안 읽을 것이므로 결론만 요약해보자.

국내의 현 의료 체계를 놓고 볼 때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사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 국민에게 의료 접근권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현재 추진되는 의료법 개정은 철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칼럼에는 두 번째 문장의 주장을 대놓고 개진하지 않았지만 요점은 그거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감염된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고 인구 밀집 지역에서 병을 '참고' 있을 때이다. 감염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변종이 생길 가능성도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겁나서 병원 못 가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위험하긴 하지만 '독감'에 불과한 질병이 '재앙'으로 거듭날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돼지독감'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기 저기서 코미디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가령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탈레반이 지배하는 나라답게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돼지는 단 1마리이며, 당연히 동물원에 있다. 로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돼지독감을 우려해서 동물원측은 그 외롭고 쓸쓸한 돼지에 대한 격리 조치를 단행했다고 한다.


바로 그 공포의 돼지 (ⓒ로이터)



기사를 읽어보면 더 골때리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1992년에서 94년까지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내전 기간 동안 동물들이 많은 수모를 당했다. 무자헤딘 전사들이 동물원에 쳐들어가 사슴과 토끼를 잡아먹고 코끼리를 쏘아 죽인 것이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무자헤딘 전사는 사자 우리의 철창을 넘어 들어갔다가 마르잔이라는 이름의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그러자 다음날 그 남자의 형이 쳐들어와 사자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마르잔은 이빨 빠진 장님 사자가 되어버렸다. 마르잔은 이후 2002년 고령으로 죽었고, 지금은 동물원에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아프간 내전의 희생자, 애꿎은 사자 (ⓒ로이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억지로라도 마무리를 지어보자. 오늘의 교훈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의료법 개정은 더 많은 국민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돼지독감'이라는 말만 듣고 동물을 괴롭히거나 하지 말자. 아무리 내전중이라고 해도 동물원에 침입해서 동물을 잡아먹거나 사자우리에 뛰어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