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6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

돼지들만 억울하게 됐다. 돼지독감(swine flu)라고 초기에 명명된 것과는 달리, WHO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돼지에서 비롯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늦은 일이다.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질병을 '돼지독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18~1919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도 그랬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지금껏 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WHO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2009년 발병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꾸준히 ‘돼지독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40대 버스 운전기사 모씨가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을 때, 대형 일간지들은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1면에 보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안타깝게도(?) 그 환자는 단순한 독감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정리해보자. 현재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독감과 다를 바 없다. 인플루엔자는 그 바이러스의 종류를 통해 크게 A형, B형, C형으로 분류된다. 이것들 중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A형이다. B형은 우리가 매년 예방접종을 맞는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이며, C형은 그냥 ‘감기’의 원인이 될 뿐이다. B형과 C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 살아왔고, 인간에게는 그 각각에 대응할 수 있는 항체가 있다.

문제는 A형 독감이다. 이것들은 주로 조류를 숙주로 삼으며, 간혹 돼지에게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인플루엔자 A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야생 상태에 있으며, 지금도 끝없이 진화중이다. 통상적으로는 A형 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감염될 수 없다. 단백질의 구조가 인간의 기관지로 침입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그 침투가 가능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인플루엔자 대유행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조류독감>에 따르면, “인플루엔자(독감) 대유행은 흔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HA 아형의 출현 또는 재부상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플루엔자 유행이 ‘돌연변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면역성을 지니지 않은 독감에 걸린 채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길어도 한 달 내에 그 사람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 기간 동안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그 과정에서 계속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최대한 빨리 감염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격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몸은 바이러스를 배양, 증식할 수 있는 최고의 배양기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정부가 감염자 숫자를 제대로 집계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큰 비난에 직면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인플루엔자와의 싸움은 결국 환자 관리에 달려 있다. 감염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을 격리하여 치료해야만 파국을 방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과연 온 국민에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의료적 혜택이 주어질 수 있느냐이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개혁’이 단행되지 않은 지금 신종 인플루엔자 문제가 불거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전국에 보건소가 깔려 있고, 사람들은 누구라도 5000원 미만의 돈을 내고 병원에서 잘 훈련된 의사의 진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온 국민의 의료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인구 1억 명이 모여 사는 곳이다. 멕시코 또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사회적 안전망이 파괴된 나라 중 하나이다. 현재 발생한 인플루엔자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거대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인해 애꿎은 ‘타미플루’만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고 한다. 마치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라면을 사재기하는 일이 벌어졌듯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그 독감에 걸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의 의료 체계 하에서는, 본인이 스스로의 증세를 일찍 자각한다면,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도 큰 무리 없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그놈의 ‘개혁’이다.

   
<드라마틱>에서 수습기자 및 취재기자로 일했고, <Foreign Policy> 한국어판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를 규정짓게 될 키워드에 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아웃라이어>가 있다. 고려대 법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철학과 재학중.

 

노정태/ForeignPolicy한국어판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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